107화
대화는 끝이었다. 제녹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막 잠에서 깨어난 데미안이 웅얼거리며 엄마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꼭 달라붙은 아들 때문에 로위나는 그 길로 병원을 나왔다. 그녀가 향한 곳은 저택이 아닌 작고 아담한 집이었다. 항구로 향하기 전 잠깐 묵었던 곳이었다.
규모도 작고 시중드는 하녀나 가정부도 없는 곳이지만, 마치 원래 살던 집처럼 포근하고 편안했다. 이틀 전 제녹이 매입하여 로위나의 명의로 바꿔 준 그녀의 집이기도 했다.
“……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이야?”
“응. 이제 코 자자.”
동화책을 덮은 로위나가 아들의 허리춤까지 내려온 이불을 어깨 위로 올렸다. 작은 이마에 짧게 입 맞추고 일어나는데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엄마.”
“응?”
“이야기 속 사람들은 왜 행복하게 살았다고 끝나?”
두서없는 질문이었다.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던 로위나가 빙긋 웃고는 방금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자리 잡았다.
“글쎄. 왜일까?”
“그래야 독자들이 마음이 놓여서?”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
“보상이 아닐까.”
중얼거린 말에 데미안이 눈을 크게 떴다.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에 로위나가 아들의 머리를 사랑이 담긴 손길로 쓰다듬었다.
“누구든 힘든 시련과 고통을 겪잖아.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어 내고 나서 행복이 찾아오는 거지.”
“그 행복은 그냥 행복이랑 뭐가 다른 건데?”
“음…… 더 값지고 소중한 행복이지 않을까?”
“그럼 아빠도?”
부드럽게 이어지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눈치채지 못한 데미안이 대답을 재촉했다.
“아빠도 보상을 받을까? 응?”
“……글쎄. 일어나시면 데미안이 직접 물어볼래?”
대답을 유보한 로위나가 아들의 두 눈을 감겼다.
“그럼 이제 자자. 착한 아이는 일찍 자는 거야.”
* * *
또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킬리언은 눈을 뜰 기색을 보이지 않고, 언제까지고 데미안을 그대로 둘 수 없기에 로위나는 제녹의 도움을 받아 가정 교사 한 명과 하녀 한 명을 고용했다. 병실에 따라가겠다고 고집부리던 데미안은 다행히 배움의 즐거움을 느꼈는지 더는 로위나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위태롭게, 겉으로는 평온하게 이어지던 나날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깨어졌다.
“실례합니다. 미스 필로네 맞으신가요?”
여느 때처럼 일인실 전용문을 열고 병원에 들어서는 그녀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간만에 불린 이름에 고개를 돌리자 중절모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다가왔다. 손에는 수첩과 펜을 든 채였다. 경계한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무슨 일이시죠?”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뒤늦게 자켓 안주머니를 뒤적인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남자의 직업을 확인하자마자 로위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반응을 눈을 반짝이며 확인한 남자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안에 입원해 계신 분은 역시.”
“여기 계셨군요.”
기자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끼어든 목소리가 로위나를 구해 냈다.
“제녹 씨.”
“들어가시죠. 기다렸습니다.”
구원자라도 만난 얼굴로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가 손을 뻗었다.
“아, 잠시만!”
뒤돌아 멀어지는 두 사람을 따라가려 했으나 조용히 다가온 남자들이 기자를 가로막았다.
한편, 돌아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빠른 걸음으로 병실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그들 외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제녹이 운을 뗐다.
“더는 고국에 사실을 숨기기 힘듭니다.”
데본셔 공작의 공백은 컸다. 그의 부재를 메우고 언론과 사람들의 입을 막느라 안간힘을 다했으나 언제까지고 많은 이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없었다. 이제 슬슬 한계였다.
“제일 최악의 경우는 여왕께서 알아채시는 겁니다. 아직 친우의 죽음으로 깊은 실의에 빠져 계셔서 세간의 소식에 귀를 닫고 계시지만…….”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예전과 달리 많이 유해진 상태라 해도 여왕은 한 나라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여왕은 사심보다는 나라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고, 공작을 피가 섞인 조카보다는 국익에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 대했다.
“조만간 공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쪽에서 선수를 치기 전에요.”
여왕이 알게 된다면 즉시 산소 호흡기를 떼고 죽음을 공표할지도 몰랐다. 이후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눈독 들였던 킬리언의 재산과 사업을 모두 왕실에 귀속시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과정에서 데미안과 로위나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인정하지 않은 여자. 심지어 무효가 되었다고는 하나 한 번은 다른 남자와 혼인 관계였던 여자. 거기다 신 앞에 떳떳하지 않게 태어난 사생아.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보이지 않는 적은 점점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혹시 몰라 철저하게 집 근처와 로위나의 주변에 호위를 깔아 두었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저 사람이 일어나면 끝나는 일이잖아요.”
억지로 웃었으나 입가가 경련했다.
“그럼 되는 거 아닌가요?”
쓴 한숨을 삼킨 제녹이 무겁게 눈을 감았다.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갑니다. 언제까지 일어나시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지금으로선, 그 상속서를 공개하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시간이 멈췄다. 로위나는 귀를 의심했다.
“상속서를 공개하고 공식적으로 적자로 인정받으신 후, 도련님이 원래 가져야 했던 모든 걸 상속받으시는 게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제녹 씨!”
새된 목소리로 소리친 로위나가 제녹의 말을 끊었다. 상속서를 공개한다는 건 그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멀쩡히 숨 쉬는데 눈을 뜨지만 않았을 뿐이지 분명 살아 있는데. 머릿속이 터질 듯이 복잡했다. 로위나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내 아들은 공작위를 물려받지 않을 거예요. 나랑 지금처럼 살 테니까요.”
“도망치겠다는 말입니까?”
쐐기를 박아 넣은 제녹이 무섭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로위나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그래.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입이 무거웠고 영주인 로렌에 대한 충성심이 두터웠다. 세드릭의 손을 잡고 로렌의 저택에서 지금처럼 신분을 위조해서 살아가면 됐다. 데미안은 세드릭의 아들로, 그녀는 세드릭의 아내로.
그저 그러면 되는 건데. 그러겠다고 말만 한다면 제녹은 고민할지언정 끝끝내 그녀의 말을 들어줄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사선을 헤매게 될 킬리언이 계속 눈에 밟혔다. 제녹이 조용히 침묵을 깨뜨렸다.
“영원히 이런 상태일 수는 없습니다.”
“…….”
“보통 한 달이 되고 나서도 눈을 못 뜨면, 뇌사 판정을 내린다더군요. 이후 일어난 사례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보름 정도가 남은 상태였다. 눈앞이 막막하고 발밑이 아득한 낭떠러지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죠? 가장 가까운 측근이잖아요.”
“가장 가까운 측근이라서입니다. 이것이 저하가 내릴 만한 판단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로위나가 털썩 카우치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제녹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깊게 고민해 보시죠.”
이후 몇 번 간호사와 의사가 병실에 찾아왔다. 체온과 혈압을 체크하고 몸 상태가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내내 로위나는 반쯤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의사의 말이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흘러 나갔다.
슬슬 병원에서 나갈 시간이 된 건 해가 지고 나서였다.
“……데미안.”
그녀에겐 챙겨야 할 아들이 있었다. 번뜩이며 스쳐 지나간 얼굴에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오늘은 도저히 잠든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문을 여는데, 맞은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막 들어오려고 했는지 카트를 끈 간호사였다.
“아니에요.”
짧게 웃은 로위나가 간호사의 곁을 스쳐 지났다. 가방을 고쳐 잡고 긴 병원 복도를 지나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선득하게 등을 훑었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낮 진찰은 끝났고 밤 회진을 돌 시간도 아닐 텐데…….”
깨달음은 순식간이었다. 동시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황급히 뒤를 돈 로위나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새도 없이 병실 문을 열었다. 막 링거에 무언가를 주사하려던 손이 보였다. 로위나는 빠르게 주사기의 내용물을 훑었다. 새파란 물질이 불길하고 위험해 보였다.
“당신 누구죠? 왜 여기 있죠?”
“링거액을 바꿔 주려고…….”
어색하게 주사기를 거둔 간호사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 모습에 더욱 수상함을 느낀 로위나가 날을 세웠다.
“소속을 말해요. 당장.”
칫, 혀를 찬 간호사가 모자를 벗어 던진 건 다음 순간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간호사가 달려들었다. 끝이 날카롭고 첨예한 주사기 바늘이 로위나의 목 끝 바로 앞을 향하는 순간이었다.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