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제녹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진술서 작성 및 조사는 그것으로 끝이었으나, 그날 밤 로위나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마다 제녹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기분이었다. 덩달아 킬리언의 마지막 인사도 묘하게 계속 꿈속에서 되풀이됐다. 옅게 웃는 얼굴과 계속해서 데미안을 쓰다듬던 손. 마지막으로 그들의 얼굴과 감촉을 기억하려는 듯한.
폭발음이 들렸을 당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과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마차의 잔해를 발견했을 때,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막막함도 함께 찾아왔다. 겉으로는 담담하고 태연했으나 속으로는 조금씩 조금씩 어두운 바닷속에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르고 로위나는 계속 잠든 남자를 내려다봤다. 정적의 입에서조차 얼굴만큼은 국보라고 농담 삼아 일컬어지는 외모였다. 단정하고 서늘한 이마와 조금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아치형 눈썹, 물 흐르듯 이어지는 오만한 콧대와 고집처럼 꾹 다물린 입술. 부채처럼 펼쳐진 속눈썹은 웬만한 여자보다 길었다.
정부였던 시절, 정사를 치르자마자 집무실로 향했던 그가 어쩌다 옆에서 잠들 때면 날이 샐 동안 잠든 모습을 바라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애써 지워 내려고 노력했을 텐데, 가슴이 욱신거리고 자책감이 밀려들었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립다거나 애틋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주 오래전 일인 것처럼 막연하고 흐릿하기만 했다.
“당신과 만난 것도 거의 십 년이네요.”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녀가 더는 스무 살의 어리고 순진했던 로위나 필로네가 아니듯 킬리언 데본셔 또한 더는 이전의 잔인한 남자가 아니었다. 냉담한 성정이야 천성이라 바꾸지 못한다 쳐도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그 모습을 철저히 감췄으니까.
가끔 두 눈을 비비고 의심할 정도로 달라진 태도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아니었다. 제녹의 말이 그 증언이었으며 그녀의 로브에 몰래 넣었던 재산 상속 증명서가 그 증거였다.
“정말 일부러 그랬던 거예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번 열린 입술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러면 내가 용서해 줄 것 같았어요? 정말 죽으려고 했던 거면.”
“…….”
“난 당신을 마지막까지 증오할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사람 마음에 끝까지 남아 있고 싶었던 거잖아요. 자기 마음 편하겠다고, 고작 그 이유로 지금…….”
말을 할수록 목이 메어와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성대가 조이는 듯한 아픔에 로위나는 두 손으로 제 목을 감쌌다. 저주와 다름없는 말을 퍼부어서라도 인형처럼 닫힌 눈을 뜨게 하고 싶었다. 그게 설령 악마나 다름없는 행동일지라도.
“지금 상황이 당신이 가장 피하고 싶던 상황이겠죠. 계획이 실패하고 내가 그저 동정심으로 옆에 남아 있는 것. 그건…….”
말끝이 떨렸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상체를 숙인 로위나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당신의 고귀한 자존심에 절대 허락 못 하는 상황이겠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게 약한 모습만큼은 보여 주기 싫어했으니까.”
“…….”
“지금 당신을 봐요. 고결한 록포드의 공작 저하. 얼마나 비참해요? 거울이 있다면 스스로를 보라고 하고 싶네요.”
도발할 만큼 도발했으나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등을 곧추세운 로위나가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속이 후련해지기는커녕 가슴에 돌덩이가 앉은 느낌이었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간호사인가 싶어 들어오라 하자 낯익은 얼굴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로위나 님.”
“……제녹 씨.”
그녀와 마찬가지로 며칠간 초췌해진 제녹이 데미안과 로위나를 번갈아 보더니 그녀에게 성큼 다녀왔다.
“내내 여기 계셨군요.”
“네…… 제녹 씨는요?”
“사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서섹스 남작의 사생아였어요. 아버지가 저하께 살해당한 걸 알고 앙심을 품고 있었을 거라더군요.”
“서섹스 남작…….”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정부였던 시절, 그녀를 비참하게 버려지도록 물밑에서 몰아간 남자기도 했다. 뇌까리는 로위나에게 제녹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폭탄이 반쪽짜리 불량품이어서 사망자는 범인 외엔 없습니다. 당시 행인도 없어 부상자는 저하와 마부뿐이지요. 마부가 오늘 아침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거길 방문하고 오는 길입니다.”
“불행 중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로위나의 옆에 자리 잡고 앉은 제녹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나저나 잘 못 주무신 모양입니다. 도련님과 함께 저택에서 한숨 주무시죠.”
“괜찮아요. 잠이 안 오네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은 로위나가 한숨처럼 낮은 숨을 토해 냈다.
사고가 난 날, 이튿날은 그저 망연자실하게 흘러갔다. 그다음 날은 모든 게 꿈 같아서 계속 현실을 부정했다. 그다음 날은 병실에서 내내 킬리언을 내려다봤고, 또 그다음 날, 그다음 날이 찾아왔다.
그나마 곁을 지켜 주던 세드릭이 오늘 새벽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로렌과 영지로 돌아가자 그녀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언제 일어날까요? 일어나시긴 할까요?”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질문에 제녹이 침통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알 수 없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로위나는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건조한 눈을 깜박였다. 침묵이 내려앉고 다음 순간, 고해하듯 절절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전 그동안 후회했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제녹은 잠든 킬리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왜 그때 로위나 님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았을까, 왜 다시 재회한 이후 도련님의 정체를 숨기라고 조언했을까.”
그때가 의미하는 건 확실했다. 정부였던 시절이었다. 빤히 제녹의 옆모습을 보던 로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하가 나와 데미안에게 해코지할까 봐 그런 거 아니었나요.”
“글쎄요. 그럴 분인 것 같습니까?”
예전이라면 성큼 그렇다고 대답이 나왔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뭐라 반응하지도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는 로위나에게 제녹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저는 이분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철모르는 시절부터 모셔 왔고 오랜 시간 함께 해 왔으니까요. 대개 남작과 경쟁하듯 모셔 왔지만.”
마주칠 때마다 이를 세우고 경계했으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킬리언에게서 시선을 들어 로위나를 마주 본 제녹이 느릿하게 고백했다.
“남작이 저하를 공경하고 진정으로 모신 건 사실입니다. 로위나 님께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죄송스럽지만요.”
더 이야기를 해도 될까 양해를 구하는 눈이었다. 로위나는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예전이라면 듣는 것조차 힘들었겠지만 풍파에 조금씩 다듬어지는 바위처럼, 수십 번 수백 번의 담금질에 조금씩 단단해지는 철처럼 그간의 시련이 그녀를 단련시켰다. 지나올 때는 뜨거운 불 속처럼 괴롭고 고통스러웠으나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은 그저 견디고 이겨 내 온 것 중 하나였다. 인정하기는 싫었으나 그것들이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로위나 님은 저하가 굉장히 냉정하고 무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죠. 다른 모습을 보셨음에도.”
떨어진 허락에 조심스레 운을 뗀 제녹이 동의를 구하듯 그녀를 쳐다봤다.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하신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천성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녀와 데미안에게는 다른 모습만을 보여 주고 이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으나,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사람은 사실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하고 있는 ‘사업’이 그것을 증명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불법적이고 은밀하며 누군가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사업.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말투, 자세도 변하지 않았다. 뱀처럼 차갑고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좋다 나쁘다는 가치 판단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뿐.
“보호색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
“카멜레온 같은 도마뱀은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외부 환경과 비슷한 색깔로 스스로를 보호하죠. 저는 인간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킬리언의 환경이 그를 몰아세웠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귀로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지만.
“……그렇다고 그가 지나온 행적이 정당화되지는 않아요.”
흔들린 것도 잠시,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부정했다. 그 모습에 씁쓸하게 웃은 제녹이 나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놨다.
“그거 아십니까? 데미안 님을 처음 본 순간, 저는 충격과 함께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저하께도 로위나 님 같은 어머니가 계셨다면 어쩌면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가슴을 헤집는 듯한 말이었다. 로위나는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나마 그와 데미안을 겹쳐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데미안에 그를 겹쳐 본 적이 있던가. 밝고 긍정적이고 아이다운 데미안의 얼굴에 킬리언이 떠오른 적은 거의 없었다.
“도련님의 정체를 숨기라고 조언한 것은 저하가 겪으실 혼란과 이후의 행동이 우려된 것도 있으나,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제가 옅게나마 느낀 그런 박탈감과 좌절감을 느끼실까 두려워서 받아들이실 여유를 가지셨으면 하는 바람에서요.”
로위나는 묵묵부답으로 제녹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 반응에 용기를 얻어 제녹은 그동안 쌓여 왔던 진심을 토로했다.
“로위나 님 말대로 저하의 지난 행적은 지울 수도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저하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신 적도 있고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이도 적지 않죠.”
가만히 듣고 있던 로위나가 입술을 열었다.
“그가 그것에 대해 한 번이라도 속죄하거나 죄책감을 느꼈나요?”
“아니요.”
단호한 대답에 로위나가 잠시 들었던 고개를 숙였다. 푹 숙인 로위나의 머리 위로 제녹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로위나 님.”
“…….”
“정말 날 때부터 냉혈한인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똑같이 인간으로 태어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