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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05화 (105/120)

105화

킬리언은 닷새가 다 가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그사이 몸이 나은 로렌은 퇴원했고,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기차역 앞에서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와 세드릭이 마차 천장 위의 짐을 모두 내리는 사이, 두 여자는 가볍게 포옹했다. 짧게 포옹이 끝나고 로위나는 조금 애틋한 얼굴로 로렌의 손을 꼭 잡았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로렌.”

“무슨 그런 소릴…… 내가 할 말이에요. 날 살려 줘서 고마워요.”

“세드릭 씨가 한 일인걸요.”

“로위나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다고 들었어요.”

로위나는 맞잡은 손의 온기를 느꼈다. 로렌의 얼굴은 시종일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살아오며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치유 받았다. 영원한 미움도, 영원한 아픔도 없다는 걸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데미안과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고 감싸 주셔서 감사해요.”

“로위나, 당신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에요. 아름답고 상냥하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감사해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차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짧게 로위나를 끌어안았다 놓은 로렌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기다릴게요. 건강하게 잘 지내요.”

“그럴게요. 조심히 가세요.”

로렌은 얼마 전 폭탄 사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킬리언이 크게 부상을 입었고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가 아는 건 그저 세드릭과 로위나의 혼인이 무효가 되었고, 당분간 로위나는 수도에서 머무른다는 것뿐이었다. 밝게 웃은 로렌이 뒤를 돌아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짐을 모두 내려놓은 세드릭이 그녀를 불렀다.

“로위나.”

“……세드릭 씨.”

킬리언이 사고를 당하고, 세드릭과의 혼인이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 이후 요 며칠 그와는 어색한 상태였다. 로위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그를 알게 모르게 피했다. 슬쩍 눈을 내리깐 로위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삼킨 세드릭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인사한 그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말없이 멀어지는 세드릭을 쳐다보던 로위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세드릭!”

기다렸다는 듯 홱 고개를 돌린 세드릭이 그녀와 마주했다.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누님을 따라가려 해요.

―…….

알 수 없는 눈으로 운을 뗀 세드릭이 복잡한 얼굴을 한 로위나에게 웃어 보였다.

―아주 가는 건 아니에요. 다 나으셨다고는 하나 아직 몸이 불편하셔서 당분간 옆에서 지켜드리려고요. 짐도 여자가 들기엔 무거우니까요.

―세드릭 씨……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그를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망설이던 로위나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세드릭이 한발 앞서 그녀의 말허리를 끊었다.

―거기까지.

희미한 웃음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안개처럼 보였다. 입을 꾹 다문 로위나를 향해 세드릭이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 저하가 많이 다쳤다는 건 나도 알아요. 다름 아닌 당신과 데미안을 지키려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도.

미안함과 죄책감, 동정심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로위나는 천성이 매정하지 못한 여자였고 게다가 킬리언 데본셔는 데미안의 친부이기도 했다. 아무리 외면하고 부정해도 똑 닮은 얼굴이 그것을 증명했으니까.

―혼란스럽겠죠. 복잡하고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켰을 거예요.

제 마음을 읽은 듯한 말에 로위나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 당신 감정은 그저 죄책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로위나.

말을 내뱉으면서도 왼쪽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의식 없이 누워 있는 킬리언을 내려다보던 눈동자 안쪽에는 분명 뜨거운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잘 못 본 것이리라 애써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가까웠던 사람이 위태로워지면 동요하기 마련이리라.

―당신 마음이 완전히 정해지고, 다시 내 손을 스스로 잡아 줄 때까지 난 기다릴게요.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손을 거둔 세드릭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잘…….”

혹시나 하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눈을 마주하자 로위나는 방금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른 자신을 책망했다.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며 손을 흔들었다.

“잘 지내요.”

수없이 지나치는 행인들 사이로 세드릭이 옅게 웃었다. 고개를 까딱 숙인 그가 로렌의 발자취를 좇아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다시 마차로 돌아온 로위나가 향한 곳은 킬리언이 입원한 병원이었다. 어지간한 응접실보다 훨씬 넓은 일인실엔 잘 꾸며진 장미목 가구가 조화롭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커튼이 쳐진 창가에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남자가 있었다. 머리맡에는 한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간 로위나가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데미안.”

“……으응.”

“데미안. 일어나.”

“엄마……?”

눈을 비비며 하품한 데미안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세드릭 형이랑 로렌 아주머니는?”

“새벽 일찍 기차역에 가셨어.”

“나도 데려가지.”

“어제 미리 인사했잖아.”

“그래도 인사하고 싶었는데…….”

“미안.”

빙긋 웃은 로위나가 팔을 뻗었다. 안아 올리려는 시도는 무산됐다. 예전에는 무거워도 두 손으로 안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힘들었다.

“됐어, 엄마.”

로위나의 손을 밀어낸 데미안이 고개를 돌려 킬리언을 바라봤다.

“아빠는 언제 일어나?”

“……글쎄.”

애매하게 대답한 로위나가 옆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눈을 떴을 때는 그렇게 단단한 빙벽 같던 남자가 이제는 정교한 인형처럼 잠들어 있었다. 정말 살아 있나 의심될 정도로 곤하게.

때때로 숨을 확인하기 위해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기도 했다. 그때마다 희미하지만 느껴지는 숨에 안도했다.

“나 아빠 꿈꿨다?”

“아빠 꿈?”

“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손을 뻗어 이불 위에 놓인 큰 손을 잡았다.

“아빠가 또 큰 개한테서 날 구해 줬어.”

“…….”

“너무 무섭고 춥고 힘들었는데, 몸 바쳐서 날 구해 주고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봤어.”

킬리언이 친부임을 알게 된 데미안은 그동안 무수히 그에 대해 질문을 쏟아 냈다. 거기엔 어떻게 로위나와 킬리언 두 사람이 만났는지부터 왜 헤어졌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왜 같이 살지 않았는지 그 과정에 대한 물음도 포함이었다. 로위나는 데미안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서 최대한 빙 둘러 사실을 이야기했다. 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데미안은 울지도 웃지도 졸지도 않은 채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에는 킬리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랬구나.”

이야기를 하는 쪽은 항상 로위나만이 아니었다. 데미안 또한 킬리언과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공원에서 달려드는 커다란 개에게서 데미안을 지켜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로위나는 그즈음 그의 안색이 안 좋았던 걸 기억해 냈다. 그런데도 하나도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더 못되게 굴었던 것도.

그것을 계기로 그녀를 흔들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어쩌면 마지막이 되었을 순간까지 비밀로 간직한 그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후아암…….”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긴 하품이 적막을 깨뜨렸다. 정신을 차린 로위나가 웃어 보였다.

“많이 졸리지? 저택에 가서 편하게 잘래?”

“아니…… 여기 있을래.”

고개를 저은 데미안이 한쪽을 가리켰다. 간병인과 보호자를 위한 작은 침대 겸 카우치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의자 등받이에 걸쳐 있던 담요를 집었다.

“알았어. 가서 누워. 재워 줄게.”

자장가 하나를 다 끝내자마자 데미안은 금세 잠이 들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로위나는 조심스레 일어났다. 창가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방 안을 환기했다. 막 출근하는 사람들과 우체부, 신문 배달부와 굴뚝 청소부가 도시의 아침을 열고 있었다. 분주한 병원을 내려다보다 로위나는 조용히 데미안이 앉아 있었던 의자에 앉았다.

“언제 일어날래요?”

“…….”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은데.”

“…….”

“일단 당신이 눈을 떠야 할 수 있네요.”

세드릭 말대로 지금 그녀의 마음이 대체 무엇인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지도 모두 킬리언이 무사히 깨어난 다음에야 가능했다.

“이대로 있다간 그저 고여 있게 될 뿐이에요. 당신도, 나도.”

대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은 계속 이어졌다.

“데미안이…… 당신을 꽤 좋아해요. 핏줄은 핏줄인지.”

친부에 대해 물을 때마다 흐려지는 로위나 때문에, 그동안 아빠라는 단어 자체를 잘 쓰지 않았던 아들이었다. 킬리언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부터 데미안은 그동안의 한을 풀려는지 계속 아빠라는 단어를 썼다.

“어서 일어나요. 당신 아들을 한번 안아 줘. 그 앤…… 이제 막 당신의 정체를 알았다고요.”

목소리가 갈수록 떨렸다. 이제 겨우 닷새째일 뿐이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런데 점점 불안하고 초조했다.

사건 경위 파악을 위해 여러 번의 치안판사의 조사를 받았을 때, 나란히 앉았던 제녹의 말이 발단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그 괴한을 잡았을 때, 원래라면 철저하게 수색하셨을 분이 그저 포박한 뒤 마차에 태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절 동행시키지 않으셨죠. 수출품의 작은 변화까지 눈치채시고 도련님의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실 정도로 섬세한 분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조사실이 얼어붙었다. 치안판사가 심각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치…….

―마치?

―잘못될 것을 예상하신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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