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항구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공식적으로 출항하는 에셀우드행 배였다. 북적거리는 인파에 밀려 로위나는 데미안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앞장서 걷던 세드릭의 뒷모습을 좇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도는 순간, 묘한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분이 밀려들었다. 짧은 순간 스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세드릭이 밝게 웃었다.
“로위나.”
“세드릭 씨.”
“한참 찾았네요. 언제 앞서갔어요?”
“모르겠어요. 세드릭 씨를 따라가다가…….”
“그래도 만나서 다행이에요. 저쪽 통로로 들어가면 될 거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데미안의 손을 고쳐 잡았다. 바로 그가 가리킨 곳으로 향하는데 이번엔 데미안이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엄마.”
“응?”
“아저씨는?”
“…….”
“아저씨는 안 타? 우리만 가?”
아저씨. 누구를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마차를 갈아타고 항구로 오는 내내, 데미안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잠시 얼어붙은 로위나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아들을 다독였다.
“나중에. 바쁘셔서 나중에 오실 거야.”
“같이 가지…….”
“일단 어서 타자.”
시무룩해진 데미안을 데리고 긴 통로를 거쳐 막 갑판 위에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퍼어어엉!!!
“꺄아아악!”
“으악!”
고막이 멍멍해질 정도의 굉음이 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동시에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고 두 귀를 막았다. 세드릭 또한 몸을 던지듯 로위나와 데미안을 감싸고 엎드렸다. 귀를 찢을 듯한 소리가 지축을 뒤흔든 것도 잠시,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수많은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제일 먼저 몸을 일으킨 누군가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수많은 쌍의 눈이 거의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멀지 않은 건물 사이 골목에서 매캐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폭탄인가?”
“또?”
“어서 출발해!”
공포와 충격, 두려움이 좌중을 휩쓸었다. 당황한 선장이 돛을 내리라고 지시하는 사이, 세드릭이 로위나를 잡아끌었다.
“안으로!”
그때 로위나의 로브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봉투였다. 그것을 주워 든 로위나가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로위나 필로네의 아들 데미안이 친자임을 인정한다.
밑으로 쭉 이어진 상속 내역서는 상상조차 못 했던 규모였다. 갖고 있는 섬 전부와 광산 채굴권, 록포드의 공작저 소유권과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 봤을 회사의 지분까지. 읽어 내려갈수록 심장이 쿵쿵 무겁게 내려앉았다.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의 사망 시, 친자에게 위 재산 외 다른 재산을 모두 상속한다.
상속. 마차를 갈아타고 항구로 향하기 시작한 때부터 조금씩 그녀를 휘감았던 기묘한 불길함과 불안이 목구멍까지 들어차기 시작했다.
“로위나? 시간이 없어요.”
“엄마.”
발목에 무거운 추를 매단 느낌이었다. 로위나는 덜덜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대로 등을 돌려 배를 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르르 배 안으로 몰려드는 인파에 세드릭이 다시 한번 로위나를 재촉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저씨 일이야?”
로위나의 손을 스르륵 놓은 데미안이 물었다.
“……응.”
“아저씨, 내 아빠 맞지?”
부정할 수 없었다. 로위나가 입만 벙긋하는 사이, 그녀의 표정에서 답을 찾은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그럴 거 같았어.”
“어떻게 알았어?”
“나랑 똑 닮았잖아.”
“…….”
“걱정되는 거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다름 아닌 데미안의 앞이었다.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문 로위나가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일 아닐 거야. 가자.”
결연하게 말했으나 말끝이 떨렸다.
“엄마, 이 배 타지 말자.”
“뭐?”
갑작스러운 말에 귀를 의심하는데, 데미안이 돌연 반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데미안!”
폭탄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그들이 타고 왔던 마차였다. 먼발치서 마차를 알아보자마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자욱한 안개 속에 휩싸인 것 같았다.
“엄마…….”
“세드릭 씨. 잠시만…… 데미안을 데리고 있어 줘요.”
대답 대신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데미안을 들어 안았다. 눈빛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로위나가 웅성웅성 몰려든 구경꾼들을 제치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보안관의 지시 아래 마차 주변으로 빙 둘러 임시 펜스가 세워진 가운데, 흰옷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것으로 누군가를 옮기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흰 시트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데 낯익은 남자가 보였다. 로위나가 젖 먹던 힘을 다해 소리쳤다.
“제녹 씨!”
“……로위나 님?”
그도 마찬가지로 폭발음에 헐레벌떡 왔는지 숨이 가득 찬 상태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당황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펜스를 넘어 덤비듯 그에게 다가간 로위나가 옷깃을 잡았다.
“방금 저 사람 아, 아니죠?”
희번덕거리는 눈에 주춤한 제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저 마차는…….”
그저 우연이리라, 아니면 그가 저 마차에서 내렸을 때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외면이었다.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라 따지려는데, 또 하나 들것이 마차에서 나왔다. 손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동시에 시간이 멈췄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 위로 천천히 시선이 올라갔다. 소매가 보였다. 그녀가 예전에 선물한 단추가 달린.
* * *
불행 중 다행히도, 괴한의 사제 폭탄은 반 정도의 위력을 가진 불량이었다. 직접적으로 폭탄과 닿은 남자의 시체는 처참했지만 킬리언의 경우 사지는 멀쩡했다. 하지만 폭탄의 여파로 마차의 바닥이 꺼지고, 머리의 충격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유리 파편이 목동맥의 아슬아슬한 부분을 스쳤다. 그가 바로 병원으로 옮겨지자마자 장장 14시간의 응급 수술이 이어졌다.
“출혈이 심했습니다만, 간신히 수술이 잘돼 다행히 지혈이 됐습니다.”
“그, 그럼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지옥 같은 14시간이었다. 수술실 밖에서 숨소리도 못 낸 채 기도하던 로위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긴 한데…….”
말꼬리를 길게 잇던 의사가 그녀의 뒤에 선 제녹에게 눈빛을 보냈다. 눈짓의 뜻을 이해한 제녹이 끼어들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한숨 주무시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도련님도 방금 주무시러 가셨으니까요.”
마치 그녀가 들어서는 안 된다는 듯한 말이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의사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도 듣겠어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킬리언은 제 아들의 친부였다. 그러므로 로위나는 그가 어떤 상태인지 데미안에게 전해 줄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했으나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결국, 제녹과 의사가 백기를 들었다.
“그게…… 머리의 충격이…… 컸습니다.”
“그 말씀은…….”
“뇌 손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잠시 뜸을 들인 의사가 침통하게 말을 끝맺었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위처럼 무거운 침묵이 병원 복도에 내려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제녹이 의사의 가운을 멱살 쥐듯 움켜쥐었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
“거짓말이라고 하라고!”
처절하리만치 애탄 외침이었다.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로위나가 그들을 지나쳤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벽에 손을 짚고 의지하듯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발을 뗐다. 제녹의 고함에 달려온 병원 관계자들이 그녀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울리는 가운데 수없이 많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차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킬리언. 식사 칸에서 식기를 쓸 줄 몰라 허둥거리는 그녀에게 나이프를 쥐는 법을 알려 주던 킬리언. 친구에게 속고 빚쟁이에게 쫓겨 거리를 헤매던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제 외투를 둘러 주던 킬리언. 정부가 되기를 받아들였을 때와 종종 변덕을 부리듯 다정했던 모습들. 도발하는 그녀의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무릎 꿇고 발을 조심스레 살피고, 제 목을 순순히 내어주던 밤까지.
이상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잔인하게 굴던 그를 떠올리려 했으나 이상하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없이 깊은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거대한 부력이 두 다리와 팔을 움켜쥐고 그녀를 계속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하…….”
벽 귀퉁이를 지난 순간 죽을힘을 다해 움직이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은 로위나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속이 메슥거리고 땅이 제멋대로 헤엄쳤다.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속이 뒤집힌 듯 고통스럽고 누군가가 심장을 틀어쥔 듯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입을 막은 두 손위로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괜찮으세요? 많이 아프신가요?”
지나가던 간호사 한 명이 멈춰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부인!”
몸이 흔들리더니 위태로운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땅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이마를 잡은 간호사가 주변에 뭐라 뭐라 소리쳤다. 그러나 점점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