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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03화 (103/120)

103화

해는 금방 저물고, 새벽은 금세 찾아왔다. 어스름이 짙게 깔린 새벽, 로위나는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그 뒤로 데미안을 품에 안은 킬리언이 맞은편에 올라탔다.

문을 닫고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로위나는 답답하게 얼굴과 몸을 가린 로브를 벗었다. 로브를 쓰는 건 혹시 모를 위험과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곤히 잠든 데미안을 옆으로 데려오려 손을 뻗었으나 어느새 아이에게 제 무릎을 베게 한 킬리언이 화제를 돌렸다.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

“괜찮아요.”

대답과 달리 로위나의 안색은 수척했다. 어제 펑펑 울어 눈시울이 부어 있는 데다 저녁 내내 잠든 데미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뜬눈으로 지새운 바람에 눈 밑은 어둑했다.

“그럼 한숨 자요. 나중에 깨울 테니.”

세드릭이 합류하기로 한 지점을 말하는 듯했다. 그의 말대로 눈을 붙이려다 로위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조곤조곤한 손길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킬리언이 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무표정한데 어째서인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땠어요?”

대답 대신 데미안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던 킬리언이 시선을 올렸다. 새파란 눈을 바라보며 로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토록 냉대하던 데미안을 처음 봤을 때. 당신의 아들임을 알았을 때.”

문득 물어보고 싶었다. 이게 부자간의, 그리고 그녀와 그의 마지막이니까. 혹시 오랜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나중에 장성한 데미안이 그에게 한번 찾아갈 수는 있겠으나, 그건 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와는 관계없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킬리언과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제저녁의 키스는 갑작스레 일어난 사고였고, 더는 그런 충동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어떤 기분이었어요?”

돌아온 침묵에 다시 한번 묻자 그제야 킬리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상하더군.”

“뭐가요?”

“어린 시절의 날 보는 것 같아서.”

새까만 흑발에 새파란 눈동자. 그 얼굴은 분명 자신이었으나 외모를 제외하곤 모든 게 달랐다. 어릴 때부터 표정 없고 냉담하던 그와 달리 데미안은 활기가 넘쳤으며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 얼굴과 마주한 순간 온몸에 알 수 없는 전율이 오싹오싹하게 그를 옭아맸다.

풍족하지 못한 살림에 몸도 약해 항상 약을 달고 다녔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지 신기했다.

그 이유는 바로 로위나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 남자에게 처참하게 버림받고도 그 남자의 아이를 낳아 키울 정도로 심지 곧고 강한 여자니까.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낳은 아이가 그 남자와 쏙 닮았대도 아이에게 남자를 투영하지 않고 오롯이 제 자식으로, 제 하나뿐인 아들로 생각하며 아낌없이 사랑을 쏟을 정도로 다정하고 상냥한 여자의 아들이니까.

안도와 함께 미안함, 고마움, 죄악감이 그의 머리 위에 암석처럼 쏟아졌다. 하나둘 그를 짓눌러 압사시키려는 것처럼. 어색한 침묵 속에서 킬리언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고마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을 읽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제 눈을 빤히 바라보는 초록색 동공이 앞에 있었다. 그는 차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미소 짓는 채이길 바랐다.

“데미안에게 당신이 베풀어 준 모든 것. 그리고 내게 베풀어 준 모든 것에 대해 고마워.”

처음 듣는 말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모진 시간을 지나 힘겹게 아들을 낳고 키워 냈다. 곁에서 힘이 되어 주던 헤리엇조차 수고했다 고생했다는 말뿐이었다.

“데미안은 내 아들이에요. 그러니 그거에 대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당신에게는…….”

침착하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말을 이어 갈수록 먹먹해졌다. 목구멍을 누군가 틀어쥔 느낌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입을 다무는데, 아스라해진 미소가 그녀의 망막에 새겨지듯 계속 시선을 잡아끌었다.

“당신에게는 그만한 대가를 받았으니 괜찮아요. 난 ‘정부’였잖아요.”

“아니.”

단호하게 부정한 킬리언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멍청해서 몰랐어. 당신은 내게 그저 정부가 아니었어.”

“…….”

“당신은 내게 행복이 뭔지 가르쳐 줬지. 사소한 것에도 감사해할 줄 아는 것도, 식당 직원에게 작은 감사를 전하는 것도, 작고 여린 동물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법도 모두.”

하나하나 열거할수록 로위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가가 뜨겁고 코가 시큰했다. 견디다 못한 그녀가 창가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옆얼굴을 보며 킬리언이 열거를 끝맺었다.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용서하는 법도, 용서받는 법도.”

“…….”

“그래서 고마워, 당신은 내게 가장 고마운 여자야.”

고작 말 몇 마디일 뿐인데 그간의 설움과 응어리들이 한데 모여 녹아내렸다. 결국 창백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을 뻗은 킬리언이 조심스럽게 로위나의 눈물을 엄지로 닦아 냈다. 로위나는 느릿하게 그를 다시 마주 봤다.

“당신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그럴 거예요.”

“데미안과 함께, 아무 걱정 없이.”

“……걱정 말아요.”

“그러지.”

환하게 웃은 킬리언의 얼굴에 로위나의 동공이 흔들릴 때였다. 마차가 차츰 멈춰 서더니 마부가 큰소리로 도착을 알렸다. 작은 가게 앞이었다. 마차를 바짝 대서 바깥쪽으로는 누가 내리고 타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커튼을 닫은 킬리언이 마차 문을 열기 전 당부했다.

“로브를 다시 뒤집어써. 아이도 함께.”

세드릭이 탄 마차는 가게 반대편에 있었다. 잠든 데미안을 먼저 마차에 안겨 준 킬리언이 끝으로 로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위나.”

두 남자를 잠시 번갈아 보다 로위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이 닫히기 직전, 킬리언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건강하게 지내요. 전부 잊고.”

잘못 들은 건가 싶은 순간, 마차가 출발했다.

“다행이에요. 순순히 보내 줘서. ……로위나?”

데미안과 로위나가 무사함을 확인한 세드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마차 뒤쪽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한 로위나가 뒤늦게 대답했다.

“미안해요. 뭐라고 했죠?”

“……아니에요. 커튼은 닫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래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위나가 바로 앉았다. 세드릭이 마차의 커튼을 닫았다.

* * *

반대편 마차를 먼저 출발시킨 뒤, 다시 돌아온 마차 또한 금세 출발했다. 목적지는 로위나와 마찬가지인 항구 쪽이었다. 배편을 구했다는 건 그들을 노리는 놈도 알 테니, 일단 같은 방향으로 말머리를 트는 게 옳았다.

커튼을 닫아 어둑해진 마차 안에서 킬리어는 느릿하게 시가를 꺼내 물었다. 데미안의 존재를 알게 되고, 아이에게 접근하면서 긴 시간 끊었던 담배였다. 로위나가 결혼식 날 도망치고 나서는 다시 시작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오랜만이었다. 성냥에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자 자욱한 연기가 마차 안을 채웠다. 거침없이 달리던 마차가 급하게 멈춰 선 건 으슥한 골목을 들어선 때였다.

“거기 멈춰!”

“히히힝!”

갑자기 끼어든 남자로 인해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급하게 멈췄다. 시퍼런 총구에 놀란 마부가 두 손을 들어 고삐를 놓았다.

기세등등하게 마부를 제압한 톰이 미동 없는 마차 문을 확 열어젖혔다. 동시에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끈 킬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텅 빈 마차 안에 당황한 톰이 따져 물었다.

“네 여자는? 네 아들은 어디 있지?”

“유감이지만 여기 없어. 먼저 떠났거든.”

“무, 무슨!”

“잡아!”

예상외의 상황에 톰이 주춤한 사이, 매복하고 있던 제녹이 호위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남자를 향해 달려든 세 명의 호위가 순식간에 톰이 든 총을 떨어뜨리고 그를 제압해 바닥에 처박았다.

“으윽!”

“싱겁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킬리언이 흙바닥에 처박힌 톰의 얼굴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개자식!”

“서섹스 남작의 사생아라고.”

“그렇다! 네가 죽인 그 남자의 아들이다!”

“확실히 눈매가 닮았군.”

“어떻게 할까요?”

관찰하듯 톰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는 킬리언을 향해 제녹이 조용히 물었다. 손을 털고 일어난 킬리언이 마차 쪽으로 고갯짓했다.

“일단 포박하고 마차에 집어넣어. 저택으로 데려간다.”

“예?”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제녹이 눈을 크게 떴다. 당장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라는 지시를 기다렸으나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더 미온적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뒤늦게 대답한 제녹이 두 손과 발이 꽁꽁 묶인 톰을 마차에 집어넣었다. 마차에 다시 올라탄 킬리언에 이어 안으로 발을 내딛는데 냉정한 말이 그를 가로막았다.

“뒤에 쫓아와.”

“하지만, 위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탁, 하고 마차 문을 닫는 소리가 제녹의 말을 끊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마부가 고삐를 다시 잡았다. 말머리를 돌린 곳은 떠나왔던 저택 쪽이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양손과 다리가 묶인 톰이 증오 가득한 눈으로 킬리언을 노려봤다.

“왜 날 안 죽이지?”

“글쎄.”

성의 없이 대답한 킬리언이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눈에 핏발이 선 톰이 이를 갈았다.

“아, 그건가? 사생아라? 손에 피 묻히기는 너무 더러워서?”

“…….”

“그야 그렇겠지. 고매하신 공작 각하께서는 제 아들이나 나 같은 사생아는…….”

“제녹에 대해 아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이 멈췄다.

“무슨 말이지?”

“제녹은 내 아버지의 정부, 아니 연인이었던 여배우가 낳은 사생아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비밀이었다. 심지어 그 자신에게도. 충격에 입을 벌린 톰을 바라보며 킬리언이 깊게 시가를 들이마셨다.

“찾아서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반대로 빈민굴에서 다 죽어 가던 걸 살렸어. 그때 내가 무슨 변덕이었는진 모르겠지만.”

시작은 작은 동정, 호기심, 제 아비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수족처럼 부리다 쓸모없어지면 사실을 알려 주고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그러지 못했다.

“서섹스 남작은 네게 좋은 아비였나?”

뜬금없는 물음에 넋이 나가 있던 톰이 눈을 깜박였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킬리언이 결말을 냈다.

“아마 아니겠지. 네 꼴을 보아하니.”

담백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깃든 감정은 복잡했다. 그 감정이 뭔지 알 리 없는 톰의 가슴 깊숙한 곳에 치욕감과 함께 열등감이 치밀었다. 그토록 사랑받고 싶었으나 사랑받지 못했다. 그러니 복수라도 하면 하늘에서 인정해줄까 싶었던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혹시 몰라 품 안 깊숙이 숨겨 놓은 사제 폭탄이 있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터지는. 최후의 순간 자폭을 하려고 준비해온 비장의 카드였다. 어차피 고문당하고 죽나 지금 죽나…….

크게 심호흡을 한 톰이 안간힘을 다해 바닥을 향해 몸을 던졌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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