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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02화 (102/120)

102화

“엄마?”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쳐 버릴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희미한 목소리를 로위나는 똑똑히 들었다.

“엄마 맞아……?”

망설이는 듯 물기 어린 목소리. 홱 등을 돌리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계단에서 막 내려온 데미안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죽지도, 어디 다치지도, 아프지도 않은 모습으로.

“데, 데미안…….”

“엄마!”

이게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좋았다. 두 손으로 입을 막은 로위나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놀란 데미안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엄마, 괜찮아?”

“데미안……!”

이 얼굴, 이 목소리, 이 모습은 분명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 데미안의 것이었다. 손을 뻗은 로위나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았다. 얼결에 마찬가지로 주저앉은 데미안이 어색하게 엄마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 괜찮은 거지?”

“흐흑…….”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마른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에 얼굴을 보려 했으나 어깨를 끌어안은 손이 단단하게 데미안을 속박했다.

“데미안…… 데미안…….”

정처 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울컥한 데미안이 마찬가지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로렌 아주머니의 약을 구해 오는 과정은 재밌고 즐거웠다. 시련은 영문도 모르는 채 이곳에 다시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였다.

웬 사람을 따라가게 되어 어딘가에 갇혔다. 바깥에도 못 나가는 상황이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할 즈음, 겨우 엄마를 보나 싶었는데 또 세드릭 형과 헤어졌다. 그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고 한편으로 무서웠다.

막막한 심정에 훌쩍이는 데미안에게 다가온 건 다름 아닌 한 남자였다.

―데미안.

―……아저씨?

반가움과 함께 안도가 밀려들었다. 낯익은 품에 꼭 끌어안긴 데미안이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역시 저번에 본 게 허상이 아니었다. 잠결에 꾼 꿈이 아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세드릭 형은 그저 긴급한 상황이라고밖에 만 얘기해 주지 않았다.

―허어엉…… 나, 무서워서…….

말은 드문드문 나왔다. 반쯤 울음에 묻혀 웅얼거리는 말을 인내심 있게 들은 킬리언이 아들의 눈물을 닦아 냈다.

―이제부터 엄마를 만나러 갈 거야.

―엄마를? 정말요?

―그럼.

갑작스러운 말이었으나 의심 따윈 들지 않았다. 첫 만남 때부터 그는 언제나 자신을 구해 주는 존재였다. 꼭 닮은 얼굴 때문인지 처음부터 묘하게 이끌렸고 종종 생각났다.

―엄마…….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잠시 내리눌렀던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다시 한바탕 눈물바다가 되기 전, 무릎을 접어 앉은 킬리언이 데미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곤란하군. 씩씩하게 만날 수 있는지 보러 온 건데.

―씩씩하게……?

훌쩍대며 파란 눈을 마주한 데미안이 딸꾹질했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그 모습에 짙게 웃은 킬리언이 말랑한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검지로 닦아 냈다.

―네 엄마는 울보잖아. 안 그래도 펑펑 울 텐데 너까지 울면 어떻게 되겠어.

서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데미안은 딸꾹질하며 멍하니 킬리언을 바라봤다. 곰곰이 생각하니 맞는 말이었다. 엄마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고, 자신이 울면 더 많이 울었다.

―데미안.

아들의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제 손으로 다 닦아 낸 킬리언이 확인하듯 물었다.

―못 본 사이 얼마나 의젓해졌는지 엄마한테 보여 줄 수 있어?

―네……!

씩씩하게 대답한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차례 진정되자 잠시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세드릭 형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용한 반응에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곧 다시 만날 거야.

그 말이 끝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잠든 사이 어딘가로 보내졌다. 일어나 보니 낯선 집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 내려온 참이었다.

아이처럼 엉엉 우는 엄마의 얼굴에 킬리언과 한 다짐을 떠올린 데미안이 먼저 눈물을 그쳤다.

“엄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흐윽…… 응…….”

“나도 그랬어. 생각보다 늦게 와서 미안해. 엄마.”

“아니…… 아니야.”

살아 돌아와 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맙고 더는 바랄 게 없었다. 아들의 이마와 코, 양 뺨에 차례로 입 맞춘 로위나가 신께 감사하며 작은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눈물의 재회도 잠시, 데미안은 금세 활짝 웃으며 로위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다정한 모자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킬리언은 내내 말이 없었다.

지긋한 눈길을 받아 내던 로위나가 그에게 고개를 돌린 건 잠든 데미안을 이 층의 침실에 올리고 나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요.”

언제 오열했냐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묻는 얼굴에 킬리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로위나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한테까지 비밀로…… 한 거라고요?”

“당신에겐…….”

찰싹.

말을 꺼내려는데 뺨이 화끈했다. 고개가 돌아간 킬리언이 붉어진 뺨을 만졌다.

“재밌었어요?”

“로위나.”

“내가 그렇게 망가지고 미쳐 가는데, 어떻게 비밀로!”

화가 턱 끝까지 올라와 질식할 지경이었다. 다시 과호흡의 증상을 보이는 로위나의 어깨에 킬리언이 손을 얹었다.

“진정해.”

“그 손 치워요!”

매섭게 그의 손을 떨쳐 낸 로위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동안 얼마나 내가…….”

지옥이었다. 살아 있는 게 죄스럽고 숨 쉬는 것조차 미안해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다.

머리로는 킬리언의 행동을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로위나의 몸을 커다란 손이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거 놓으……!”

“로위나.”

다시 한번 안간힘을 다해 밀어내려는데 귓가에 훅 들어온 뜨거운 숨이 온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로위나…….”

매달리는 듯한 간절한 목소리. 애달픈 목소리였다. 그대로 굳어 버린 로위나를 더 힘주어 껴안은 킬리언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어. 그러니.”

이번만 참아 줘. 삼킨 뒷말은 굳이 입밖에 내뱉지 않아도 들렸다.

애절한 목소리에 문득 로위나의 머릿속에 지난밤이 떠올랐다. 무릎 꿇어 발을 살핀 뒤, 제 목깃을 풀고 두 손을 제 목에 쥐여 주던 손길. 발작하듯 몸을 떨고 미친 듯이 오열하는 그녀의 몸을 밤이 새도록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던 손길.

조금씩 진정된 로위나가 눈물을 그쳤다.

생전 처음으로 그가 가엾게 느껴졌다. 분명 그녀의 삶을 뒤틀리게 만든데다 그녀를 아주 잔인하게 버린 남자인데. 지독하게 오만하고 이기적인 남자인데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마치 버려지기 적전의 어린 소년을 보는 것처럼. 그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 느낌과 감정은 진심이었다.

“……로위나.”

팔이 저절로 올라갔다. 아이를 토닥이듯 흑발 위에 툭 손을 올리자 놀란 듯 킬리언이 고개를 들려 했다. 힘주어 그의 머리를 꾹 누른 로위나가 말없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들과 똑같은 머릿결이었다.

흠칫한 킬리언이 그대로 굳은 채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로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킬리언.”

“…….”

갈구하듯 로위나의 손길을 만끽하던 킬리언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내려다봤다. 로위나 또한 그를 빤히 바라봤다.

물기 하나 없는 눈, 여전히 냉혹하고 무심한 인상이었다. 오로지 그녀가 보지 않는 데서만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날렵한 턱을 감싼 로위나가 충동적으로 붉은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제 행동을 깨닫고 입술을 물리려는 때, 뒤통수를 움켜쥔 손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제게로 이끌었다.

“아!”

아랫입술을 간질이듯 핥는 혀에 본능적으로 입술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그의 것이 들어왔다. 뒤로 물러설 틈도 없이 정복하듯 그녀의 혀를 휘감은 혀가 입천장과 치열까지 샅샅이 훑었다.

“으응…….”

숨이 부족해질 정도로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어깨를 밀어내던 손도 차츰 힘을 잃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

한참이 지나서야 은실을 길게 이으며 두 입술이 떨어졌다. 가쁜 숨을 깊게 내쉰 로위나가 확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닦았다.

“충동이었어요. 아무 의미 없는.”

종종 그러듯 알 수 없는 눈으로 로위나의 뺨을 감싼 킬리언이 쓴웃음을 삼켰다.

“아무렴.”

격렬했던 건 그쪽이었으나 시작한 건 그녀였다. 어쩐지 갖고 논 쪽이 된 것 같은 어색함에 그의 시선을 피한 로위나가 화제를 돌렸다.

“세드릭 씨는 어디 있어요?”

질문과 동시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잔인한 물음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와 동시였다.

“설마 어떻게 한 건.”

“내일 새벽.”

“…….”

그늘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던 것도 잠시, 로위나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려는 때 킬리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총 4매 에셀우드 행 배표를 끊어 놨어. 당분간 거기서 지내. 그는 중간에 합류할 거야. 이번엔 안전하니 안심해도 돼.”

4매. 그녀와 데미안, 그리고 세드릭. 마지막으로 로렌의 배표였다. 조용히 배표를 받아든 로위나가 넌지시 질문했다.

“데미안과 세드릭을 노린 남자는?”

“꼬리를 잡았으니 곧 붙잡을 거야.”

“……당신은요?”

머뭇거리다 물은 한마디에 킬리언이 입꼬리를 올렸다. 안개처럼 옅은 미소였다.

“나도 곧 돌아가겠지. 일을 마무리 짓고.”

“……그런가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새벽이라니, 이만 자러 가야겠네요.”

그대로 뒤를 돌려던 로위나가 문득 우두커니 멈춰 섰다.

“혹시 더 할 말 없어요?”

영겁과도 같은 적막이 또 한 번 내려앉았다. 뒤를 돌고 싶었으나 어쩐지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약간의 간극 뒤에 나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당신과 데미안이 행복하게 지냈으면 해.”

“…….”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사랑. 진부하고도 상투적인 단어였다. 적어도 그에게는. 한 번도 킬리언 데본셔란 남자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단어에 로위나는 잠시 계단 난간을 움켜쥐다 도망치듯 위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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