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며칠 후, 기력을 회복한 로위나를 기다린 건 근래 맡지 못했던 꽃향기였다. 데미안과 세드릭의 배 사고 이후, 저택에 있을 때면 모든 커튼을 내리고 방 안에서 동굴에 들어간 것처럼 살던 터라 낯설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데 막 커튼을 젖히고 있던 하녀가 인사했다.
“일어나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아……, 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창한 햇살이 방 안을 파고들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안한데 다시 커튼을 닫아 주면…….”
“일어나셨군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화려한 복장의 여자가 들이닥쳤다.
“오늘 할 게 많아서 바빠요.”
“네?”
“자자. 어서 준비해.”
두 번의 박수 소리와 함께 우르르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이 밀려들었다. 화들짝 놀란 로위나가 경계하듯 노려보자 그제야 제일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허리 굽혀 인사했다.
“맞다. 인사가 늦었군요. 오늘 치장을 맡을 로즈에 의상실의 달튼 로즈에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뒤로는 정신없는 과정이 이어졌다. 재봉사가 치수를 재자마자 미리 준비해 온 드레스를 솜씨 좋게 수선한 다른 재봉사가 그것을 달튼에게 내밀었다.
막 사교계에 데뷔한 풋풋한 아가씨들에게 어울릴 법한 샛노란 드레스였다. 나이에 맞지 않는 거 아닌가 생각했으나 전신 거울 앞에 선 로위나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세상에! 정말 동안이시네요. 열아홉 살이라 하셔도 믿겠어요. 입술은 조금 더 붉게 칠할까요?”
“그러니까 필요없…….”
“자자, 여기 앉으시고.”
며칠간 제대로 식사하지 않아 기력이 없는 로위나는 베테랑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화장대 앞에 로위나를 앉힌 달튼이 일사불란하게 휘하의 부하 직원들을 지휘했다.
그대로 여러 명의 손에 이끌려 욕실에서 꼼꼼하게 씻겨지고 나와 푸석푸석한 금발에 오일을 바른 뒤, 머리 세팅과 동시에 화장이 진행됐다.
드레스까지 입으니 두 시간에 걸친 치장이 마무리 단계까지 이르렀다.
“안색이 창백하셔서 어떻게 생기를 돋게 할까 걱정했는데 조금만 손을 대도 미모가 확 살아나시네요!”
연거푸 찬사를 보낸 달튼이 로위나를 다시 전신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수척해진 뺨과 푸석푸석해진 머리가 전문가의 손에서 순식간에 생기 넘치는 얼굴과 윤이 흐르는 머리로 탈바꿈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자신의 모습에 로위나가 낯설어하며 눈을 깜박이는데, 다시 한번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준비가 다 되셨으면 나오시라 하십니다.”
“지금 곧 나가요!”
로위나 대신 대답한 달튼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에 진주 머리핀을 꽂아 장식했다.
“부러워요. 어쩜 이렇게 다정한 남편이 계실까.”
남편. 불현듯 들린 단어에 잠시 넋이 나간 로위나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남편 아니에요.”
“예?”
“정부죠. 물론 제가 아니라 상대편이.”
귀를 의심한 달튼이 멀거니 눈을 깜박이는 사이 로위나가 방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그녀를 현관으로 안내했다.
현관으로 나오자마자 마차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를 알아본 로위나가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이네요. 제녹 씨.”
“오랜만입니다.”
고개 숙여 인사한 제녹이 마차 문을 열었다.
“타시죠.”
“이게 다 무슨 일이죠?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런 일을 할 상황으로 보여요?”
방금까진 휩쓸렸으나 더는 휩쓸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팔짱을 낀 로위나가 따지듯 묻자 제녹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이요?”
“네. 그러니 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그의 말을 확인했다.
“날 놓아주겠다는 말인가요? 그가 정말 그런 말을 했어요?”
“직접 만나셔서 물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마차에 올랐다.
* * *
마차가 천천히 멈춘 곳은 의외로 고급스러운 극장이나 식당이 아닌 조그마한 별장이었다. 수도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있어 조용하고 소박한 별장이었다. 숲에 둘러싸인 별장 앞에서 말들이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여긴…….”
마차가 달리는 내내 조용히 시시각각 바뀌는 창밖을 바라보던 로위나가 생소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는 동안 먼저 내린 제녹이 로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리시죠.”
“아, 네.”
제녹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폭신한 풀이 밟혔다. 동시에 싱그럽고 시원한 숲의 냄새가 로위나의 코에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맡는 숲 냄새에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로위나.”
“……킬리언.”
저하라고도, 당신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위급했던 날 이후 오랜만에 불린 제 이름에 그가 가만히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여긴 어디죠?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요? 아침부터 이건 또 뭐고요.”
마지막 물음은 의상실에 대한 질문이었다.
“내가 저번에 그랬잖아.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한다고.”
“그건 이미 지난 일 아닌가요.”
“마지막이니까.”
제 입으로 내뱉은 단어는 소태를 씹은 듯 쓰디썼다. 로위나의 모습이 그의 눈에는 처음 만났던 약 십 년 전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똑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싱그러웠다. 무너져 내리고 망가졌던 근래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안으로 들어가지.”
어쩐지 평소와 다른 킬리언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그를 따라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담한 별장 안은 일반 시민들의 집과 똑같았다. 좁은 현관 맞은편엔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고, 그 계단을 사이에 두고 거실과 주방이 나뉘었다.
어제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로위나가 손때 묻은 장식장과 손으로 짠 카펫을 내려다보는 사이, 주방에 들어간 킬리언이 물잔을 내밀었다.
“목이 마를 텐데.”
“고마워요.”
물잔을 받아 벌컥 마신 로위나가 사람의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하녀는요?”
“없어.”
“네?”
“오늘은 나와 당신뿐이야. 그 외 사람은 없어.”
제 손으로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가져왔다는 말이었다. 귀를 의심한 로위나가 그럴 리 없다는 듯 그를 제치고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의심했던 게 무색하게 정말 아무도 없었다. 그대로 굳어 버린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이네. 아무도 없어.”
“그렇다고 했잖아. 시장하지는 않고?”
“……조금요.”
“기다려.”
그녀를 식탁 의자에 앉힌 킬리언이 미리 꺼내둔 감자와 버섯을 물로 깨끗하게 닦고 썰기 시작했다. 로위나는 그 옆모습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켜봤다. 이 남자가 낯설게 구는 거야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지금은 낯선 걸 넘어 기괴한 광경을 보는 느낌이었다. 마치 익숙한 남자의 탈을 쓴 다른 무언가가 서 있는 기분.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 공작 저하가 맞아요?”
돌연 튀어나온 질문에 막힘없이 칼질을 하던 손이 멈췄다.
“내가 아니면 누구로 보이지?”
“그건…….”
“가만히 앉아 있어. 주변을 둘러봐도 좋고.”
부드럽게 지시한 킬리언이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화덕에 불을 붙이고 깨끗한 물과 방금 썬 재료, 그리고 수프의 분말을 넣었다.
“여기는 누구 집이에요?”
“제녹의 친구 집. 하루 동안 빌렸지.”
“…왜요?”
“당신과 이러고 싶어서.”
“그러니까 대체 왜.”
로위나가 목소리를 높이는 때,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냄비에서 거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국자로 그것을 걷어 낸 킬리언이 작은 숟가락으로 간을 봤다.
“처음 한 것 치고는 괜찮게 됐군.”
만족스럽게 중얼거린 그가 이어 두 개의 그릇을 꺼내고는 나누어 담았다. 부드러운 빵과 절인 무를 함께 놓으니 그럴듯한 한 끼가 완성됐다.
“한번 먹어 봐.”
“……그럼.”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오늘은 장단을 맞춰 주는 게 나을 듯싶었다. 못 미더운 눈으로 수저를 든 로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맛있네요?”
“그렇다고 했잖아.”
어제 저녁을 먹지 않고 자서인지, 한입 뜬 수프가 생각보다 맛있어서인지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게 눈 감추듯 그릇을 비웠다. 설거지를 하는 것도 킬리언의 몫이었다.
손을 거들겠다는 말도 거절당한 로위나가 멋쩍게 거실로 가 앉자 따뜻한 차가 나왔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로위나가 그제야 궁금한 걸 물었다.
“대체 무슨 변덕을 부린 거예요?”
“저번에 당신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봤어.”
“무엇을요.”
“내 곁에 이대로 당신을 두는 게 나을지, 아니면 당신을 놓아주는 게 나을지.”
“그래서요?”
“답이 안 나오더군. 당신을 놓아주느니 죽여 버리고 나도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했지.”
“…….”
날것 그대로의 말이었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오만했지만 킬리언 데본셔다운 말에 오히려 안도가 들었다. 어깨에 힘을 뺀 로위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요?”
“당신이 날 두고 혼자 죽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맞닥뜨리는 순간 지옥이 펼쳐졌지.”
말투는 담담했으나 무겁고 뜨거웠다. 로위나는 그날, 뺨에 닿았던 것을 떠올렸다. 아닐 거라고 부정하며 외면했으나 그건 분명.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을 놓아주려고.”
“킬리언.”
“당신이 죽는 것보다 내가 혼자 남아 괴로워 몸부림치는 게 나을 테니까.”
킬리언이 아주 짧게 웃었다. 로위나가 두 눈을 비비려는 순간이었다.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