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부는 도망친다-100화 (100/120)

100화

“이쪽입니다. 저하.”

층을 통째로 빌린 작은 호텔 안이었다. 제녹의 안내를 따라 방문을 열어젖히자 긴장된 얼굴의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를 들고 있는 세드릭과 눈이 마주친 킬리언이 심드렁하게 쳐다보자, 민망해진 세드릭이 천천히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았다.

“혹시 몰라서.”

대답 대신 그를 스쳐 지나간 킬리언이 쇠창살로 막힌 벽난로 앞 카우치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뒤따라 맞은편에 앉은 세드릭이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죠.”

“무엇을.”

“목숨을 구해 준 거요.”

“착각할 줄 몰랐는데.”

미간을 찌푸린 킬리언이 말을 덧붙였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 당신이 우연히 내 아들 곁에 있었을 뿐.”

“……알고 있었군요.”

“모를 리가.”

확고한 대답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드릭이 흘깃 문을 돌아봤다.

“그건 그렇고 로위나는 어디 있죠?”

아무렇지도 않게 제 여자의 이름을 담는 입에 킬리언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온다기에 여기 온 겁니다. 나도 데미안도.”

“계속 그녀가 당신 것인 것마냥 말하는군.”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요.”

지금껏 살려 주어 안심했는지, 아니면 원래 겁이 없는 건지 첫 만남과 다름없이 거침없는 태도였다. 휘둘릴 뻔한 것도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킬리언이 태연하게 받아쳤다.

“웃기는군. 혼인한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신문 기사 부고란에 올라와 잠정적으로 사망 신고가 되었으니 혼인 무효지.”

전쟁 후 미망인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제도였다. 오래전 입법된 법을 알고 있는 킬리언에 세드릭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그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우릴 노린 사람에 대해 듣죠.”

로위나를 만나러 간다기에 꽁꽁 싸매듯이 정체를 감추고 마차를 타고 또 다른 은신처로 온 거였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기다리는 건 텅 빈 넓은 객실이었다. 데미안은 제녹의 손에 이끌려 옆방으로 갔고, 지금쯤 씻고 자고 있을 터였다.

그녀를 보고 안심시켜 주는 게 시급했으나 일단 데미안과 그를 노린 이의 정체에 대해서 듣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 상대방의 마음을 읽었는지 킬리언이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에 내가 축출한 측근의 끄나풀일 가능성이 높아.”

“상대를 특정한 거군요. 그럼 금방 잡겠네요.”

희망적인 이야기에 세드릭이 눈을 반짝였다. 킬리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쥐새끼마냥 꼼꼼히 숨어 있더군.”

그동안 몰래 사람을 풀어 수도 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서섹스 남작의 끄나풀은 잡히지 않았다.

“그럼 잡을 때까지 여기 있으란 말입니까?”

“당신 혼자 떠나는 거야 상관없지.”

이곳에서 나가는 거야 자유지만 로위나와 데미안을 데리고 가는 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절대 혼자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킬리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진 여기서 지내도록.”

“로위나는.”

어느새 멀어져 문고리를 잡은 그에게 세드릭이 불쑥 물었다.

“잘 있나요?”

잘 있느냐. 짧은 질문이었으나 묵직한 말이었다. 로위나는 점점 말라 가고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데미안과 이 남자와 만나게 한다면 그들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놈이 눈치챌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놈은 현재 물불 가릴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면 꼬리를 잡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로위나가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멈춰 선 킬리언이 이내 묵묵부답으로 객실을 나갔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제녹이 공손하게 보고했다.

“도련님은 주무십니다. 방금 씻고 식사하시더니 곯아떨어지시더군요.”

“…….”

바로 데미안의 방문을 열 줄 알았던 킬리언이 계단 쪽으로 향했다. 당황한 제녹이 뒤따라 붙었다.

“안 보고 가실 겁니까?”

“다음에.”

“다음이 또 언제이실 줄 알고…….”

이곳까지 오는 것도 만사에 주의를 가했다. 혹시 모를 미행을 피하기 위해 빙빙 돈 것도 모자라 거리에 아무도 없는 늦은 밤을 틈타 온 거였다.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죠.”

“됐어.”

한번 얼굴을 보면 품에서 놓아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작은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따뜻한 몸을 끌어안으면 그대로 데려가고 싶은 충동이 들 것 같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았다. 걸음을 재촉하는데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를 불러 세웠다.

“유령…… 아저씨?”

우뚝 멈춰 선 킬리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잠에 취해 눈을 비빈 데미안이 그를 알아보고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계단을 못 봐 발을 헛디디는 순간, 재빨리 아들을 잡은 킬리언이 데미안을 일으켰다.

“아저씨…….”

“데미안.”

“나 보러 왔어요?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우리 엄마는 잘 지내는지 알아요?”

질문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킬리언은 대답 대신 데미안을 번쩍 들어 안았다. 아기처럼 가볍게 품에 안긴 데미안이 하품을 하며 킬리언의 목에 손을 둘렀다.

“엄마…… 보고 싶은데. 하암…….”

“보게 될 거야.”

“언제요……?”

“조만간.”

“아저씨는…….”

담담히 이어진 대답에 안도한 듯 또 길게 하품을 한 데미안이 새근거리며 몸에 힘을 풀었다. 다시 잠들기 시작한 데미안의 등을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토닥였다.

살짝 벌어진 방문을 발로 연 킬리언이 조심스럽게 데미안의 몸을 침대에 눕혔다. 저와 쏙 빼닮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제 어미와 판박이인 작은 이마에 입 맞췄다. 처음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땐 그저 놀라움뿐이었다. 직접 얼굴을 봤을 땐 호기심이 일었고, 차츰 아이에 대해 알아 갈수록 애틋한 마음이 가슴에 자리 잡았다.

“아저씨…….”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도 잠시, 무거운 걸음을 떼려는데 작은 손이 이번엔 소매를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잠꼬대인지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킬리언이 아이의 뺨을 부드럽게 손등으로 쓸었다. 다시 머리맡 의자에 자리 잡고 앉는 모습에 문을 열고 들어온 제녹이 슬쩍 말을 걸었다.

“지금 안 나가실 겁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평화가 깨진 건 얼마 안 돼서였다.

* * *

몽유병을 의식한 날부터 로위나는 밤이면 수면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눈을 붙이면 그래도 어느 정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항상 정량을 먹던 약을 조금 더 먹은 건 더 오래 자고 싶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자는 동안엔 데미안을 볼 수 있었고 그 작은 몸을 끌어안을 수 있었으니까.

몸이 물먹은 솜처럼 깊게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약통을 찾던 하녀가 그녀의 방에 들어선 건 이십여 분 뒤였다.

곤히 잠들어 있는 로위나를 확인한 하녀는 협탁 위에 올려진 약병이 평소보다 훨씬 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묵직한 목소리가 로위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다행히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다. 위를 게워 내게 하고 휴식 중입니다.”

“……수고했어요.”

의사의 말을 받은 이는 킬리언이었다. 며칠 전, 루드빌 저택을 오웬에게서 매입하고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난 적 없었다. 수면제를 몇 알 더 삼킨 것도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꼴도 보기 싫은 남자인데 혼몽한 상태여서인지 낮고 높낮이 없는 익숙한 목소리에 어쩐지 안심이 됐다. 다시 잠이 들려는데 하녀를 통해 의사를 배웅한 킬리언이 그녀를 불렀다.

“로위나.”

비몽사몽 한 와중이라 눈꺼풀은 닫혀 있었다. 그녀가 자는 줄 알았는지 목소리가 이어졌다.

“로위나…….”

처음으로 들은 고통스러운 목소리였다. 놀란 나머지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자 가라앉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혹시 우는 건가 싶었는데.”

“…….”

“그럴 리 없지. 당신은 피조차 차가우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비수가 박히는 말에도 입매를 끌어 올린 킬리언이 그녀의 이마를 서늘한 손으로 쓸었다.

“몸은.”

“무거워.”

“더 자도록 해.”

“킬리언.”

오랜만에 불린 이름이었다. 흐트러진 금발을 정리해 주던 손이 그대로 멎었다.

“나 이만 쉬고 싶어요.”

“나갈…….”

“아니요.”

언제 반말을 했냐는 듯 다시 존대로 돌아온 로위나가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갔다.

“쉬고 싶어요.”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휘감고 지나갔다. 한참 후에야 킬리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데미안 때문에?”

“그것도 있지만, 너무 지쳤어요.”

“…….”

“당신을 만나고 살아온 내내 나는 너무 지쳤어. 전부 당신 잘못은 아니었지만.”

전속력으로 달리다 탈진한 느낌이었다. 더는 뛸 자신도, 아니 걸어갈 자신도 없었다. 우울과 함께 깊은 무기력이 찾아왔다. 온몸에 쇠사슬을 인 채 바다 깊은 곳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다시 입을 여는데, 뺨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닿았다. 뭔지 확인하려 했으나 두 눈이 내리감겼다.

“킬리언?”

“만약, 내 옆을 떠난다면.”

목소리는 조금 전과 똑같았다. 놀란 로위나가 얼어붙은 사이, 킬리언이 느릿하게 덧붙였다.

“당신이 원하는 사람과 아들 옆에서 살 수 있다면 당신 마음이 변할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아요.”

이미 모든 게 헝클어졌고 되돌릴 수 없었다. 분노만 가득했던 마음도 이젠 차츰차츰 절망과 체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바쳐도 좋지만…….”

“만약에 말이야.”

로위나의 말을 끊은 킬리언이 거듭 물었다.

“그렇게 된다면.”

로위나는 데미안을 떠올렸다. 그 옆에 선 세드릭도. 귀엽고 영리한 아들과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가족이었다.

“그래요……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요.”

대답과 동시에 잠이 쏟아졌다. 킬리언은 오랜 시간 곁을 지켰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