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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99화 (99/120)

99화

온몸의 피가 모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있는 로위나의 뒤로 성큼 다가온 킬리언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가슴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뿌리칠까, 도망칠까 망설이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다.

당황한 나머지 방황하지도 못한 채 푹신한 침구 위에 앉자 돌연 킬리언이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정수리를 바라보는데 힘줄이 도드라진 손이 그녀의 발꿈치를 잡아 들고는 살폈다.

“오늘은 중정에 나가지 않은 모양이지.”

이어진 작은 한숨에 안도가 묻어 나왔다. 수수께끼 같은 말과 태도에 로위나는 그대로 눈만 깜빡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느긋하게 꽃구경할 여유 따윈 근래에 없었다. 고개를 든 킬리언이 로위나의 얼굴을 살폈다. 로위나의 눈에 뒤늦게 그의 뺨에 새겨진 상처가 들어왔다.

낮에 그녀가 던진 화병에 스쳐 생긴 상처와 그녀가 손톱으로 할퀸 상처였다. 새하얀 설원에 발자국이 생기듯, 흠결 하나 없이 매끈하던 피부에 새겨진 흉터에 저절로 시선이 머물렀다.

“기다려.”

눈동자가 흔들린 건 그다음이었다. 그녀의 발과 얼굴을 확인한 킬리언이 옷을 갈아입으려는 듯 일어나 끝까지 잠근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

드러난 목은 손자국으로 새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모습에 로위나가 말을 잃은 사이, 뒤를 돈 킬리언이 상의를 벗었다. 넓은 어깨 아래로 날렵하게 자리한 근육이 잠깐 눈앞에 보였다 잠옷 아래로 사라졌다. 금세 잠옷으로 갈아입은 킬리언이 다시 침대로 다가왔다. 흠칫한 로위나가 엉덩이를 뒤로 빼는데, 그가 한 발 더 빨랐다. 양손으로 로위나의 손을 감싼 킬리언이 그대로 제 목으로 가져다 댔다.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

“이제 졸라도 돼.”

“…….”

“하지만 중정에 나가는 건 안 돼. 걷다가 넘어질 수 있으니까.”

따뜻한 목에 얹힌 로위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처음 있는 일에 미간을 찌푸린 킬리언이 어둠 속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로위나?”

“아니야.”

울부짖은 로위나가 킬리언을 밀쳐 내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저택의 유령. 목의 손자국.

재해처럼 밀려든 진실이 로위나를 덮쳤다. 동시에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이 밀려왔다. 수몰된 사람처럼 허우적대며 그녀가 단말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니야!”

“로위나.”

그제야 로위나가 깨어 있다는 걸 안 킬리언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진정해.”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아니야…….”

“그래. 아니야. 그러니…….”

“아아악!”

처절한 외침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정말 미쳐 가고 있었다.

이래선 미친 여자와 뭐가 다르지?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입술 사이로는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보다 못한 킬리언이 그녀를 껴안았다.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만이 그의 희망이었다.

“놔!”

“못 놔.”

“놓으라고! 싫어!”

“안 돼.”

몸부림은 소용없었다. 밀치고 할퀴고 욕을 퍼부어도 단단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로위나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저항했다.

“날 완전히 미쳐 버리게 만드니 좋아? 미친 여자를 끌어안는 게 당신 취향이야?”

“당신은 안 미쳤어. 전부 내 잘못이야.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어. 미친 것도 나고, 죽어야 할 놈도 나지.”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어깨에 와 닿는 숨이 떨리고 있었다. 더불어 애써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얼마 전, 마지막으로 항구에 갔을 때 바다에 빠졌었다. 부력을 느끼며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그녀를 끌어올린 건 다름 아닌 킬리언이었다.

처절하게 그녀를 부르던 목소리. 정신을 잃었고 어째서인지 이튿날부터 기억하지 못했다.

충격과 분노, 절망으로 흥분한 숨소리가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조금씩 조금씩 잦아들었다. 모든 힘을 소진하고 늘어진 로위나에게 긴 시간 미뤄 두었던 잠이 찾아왔다. 꾸벅꾸벅 눈을 깜빡이는 로위나를 알아챈 킬리언이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안 돼…….”

목소리는 속삭이듯 나왔다. 몸을 굽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춘 킬리언이 익숙하게 그녀의 눈을 감겼다.

“이만 자도록 해.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로위나의 눈꺼풀이 완전히 닫혔다. 그녀가 깊은 잠이 들고 나서도 한참을 내려다보던 킬리언이 문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서 있던 이를 불렀다.

“제녹.”

* * *

계획이 어그러졌다. 뭔가 잘못됐다.

요 며칠 몸을 숨기고 킬리언 데본셔와 로위나 필로네를 염탐하던 톰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길함에는 세실리아가 한몫했다.

“대체 이게 뭐예요. 오히려 더 관계가 돈독해진 거 같은데!”

“기다려요.”

“언제까지! 일은 이미 일어났는데!”

원래 목표대로라면, 슬쩍 흘린 근거로 로위나 필로네가 킬리언 데본셔를 의심하고 살인자로 몰아가야 했다. 초반에는 그게 성공한 듯했지만, 머지않아 상황은 예상을 뒤엎었다.

로위나 필로네가 킬리언 데본셔에게 지극히 폭력적이고 경멸 어리게 대하고 있었으나 그를 살인자로 오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신이라도 뒤늦게 발견됐다고 보여 주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라는 거죠?”

거기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톰은 갑자기 그것을 떠올리게 한 세실리아를 홱 노려봤다. 움찔한 세실리아가 어깨를 움츠린 사이 그가 이를 드러냈다.

“없는 걸 어떻게 내보인다는 말입니까.”

“뭐라고요?”

“폭발로 죽었고 그 빌어먹을 목걸이 외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럼 더 결정적인 증거라도 만들어서.”

“예를 들면?”

날카로운 질문에 슬쩍 시선을 피한 세실리아가 말을 더듬었다.

“예, 예를 들면 뭐…… 측근의 고백이라던가.”

측근. 제녹 길리터스. 머릿속에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놈이 있었어!”

최근 아무리 공작 주변을 배회해도 보이지 않던 인물이었다. 대리로 일부 권한을 위임한 터라 주인을 대신해 일로 바쁠 거라고 넘어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어, 어디 가는 거예요?”

뜬금없이 홱 몸을 돌려 멀어지는 톰 뒤로 다급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갈 곳이 있어요.”

뒤도 돌지 않고 대꾸한 톰이 뛰듯이 어딘가로 달려갔다.

* * *

데미안은 낯선 환경에 계속 적응하지 못했다. 배에 타기 무섭게 끌어 내려져 거의 감금되다시피 갇힌 곳은 고급 여관이었다. 때가 되면 삼시 세끼 식사가 나오고 필요한 물품은 모두 준비됐다. 방을 나가는 것 외엔 어느 정도 자유가 허락됐지만 그래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형.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데미안.”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자 세드릭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두 사람을 별장으로 데려온 이는 다름 아닌 공작의 측근인 제녹 길리터스였다.

―지금 당장 절 따라오십시오.

―우리가 왜 그래야 합니까?

―목숨이 아깝다면 따라오시죠. 지금 당장.

상대편이 총을 겨누진 않았으나 협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따라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삼엄한 경비 속에 어느 외진 고급 여관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창문까지 모조리 커튼으로 닫아 안팎을 차단하고 나서야 제녹은 그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당신들을 노리는 이가 있습니다.

―뭐라고요?

―잡을 때까지는 이곳에 계셔 주셔야겠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죽은 사람으로.

믿을 수 없었으나, 만약 데본셔 공작이 그를 죽일 셈이었다면 굳이 이곳까지 데려와 감금하며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더불어 데미안을 본 제녹의 반응 또한 그걸 증명했다. 킬리언 데본셔의 유일한 아들임을 아는 눈치인데다 데미안을 대할 때면 그를 대할 때보다 더 정중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간신히 구해 온 약이나마 겨우 누님인 로렌에게 전하도록 부탁한 뒤, 세드릭은 데미안과 함께 아무 기약 없이 시간을 보냈다.

“나 엄마 보고 싶어. 로렌 아주머니도.”

“……나도.”

데미안을 꽉 끌어안은 세드릭이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어른인 그는 버틸 수 있으나 데미안이 걱정이었다.

“멀리서나마 엄마 보고 오면 안 돼?”

품에서 고개를 든 데미안이 울먹이며 물었다. 대답할 수 없어 세드릭이 작은 머리를 쓰다듬는데 방문 너머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긴장한 것도 잠시, 이어진 목소리에 세드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드웰 씨.”

“들어오세요. 길리터스 씨.”

허락과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제녹이 두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당장 나갈 준비를 하세요.”

제녹이 내민 건 다름 아닌 후드가 달린 긴 로브였다. 정체를 숨기기엔 딱 좋은.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같은 편이라 인지했음에도 본능적으로 데미안을 제 등 뒤에 숨긴 세드릭이 경계했다.

이해한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제녹이 천천히 대답했다.

“로위나 님을 보러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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