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졌다. 계속된 불면증에 로위나의 신경은 매일 조금씩 깎여 나갔다. 그리고 같은 무렵, 루드빌 저택 안에서는 기괴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때는 모든 게 어둠 속에 묻힌 한밤중이었다. 경비를 돌던 하인 한 명이 멀리서 보이는 희끄무레한 인영에 눈을 홉떴다.
“허억!”
흰 슈미즈 차림으로 배회하는 머리채 긴 여자가 있었다. 얼어붙은 하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
“누, 누구요!”
대답 대신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훅 불어온 바람이 위태롭게 흔들리던 램프의 불을 꺼 버렸다. 기겁한 하인이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 다가오지 마!”
“뭐야? 무슨 소란이야?”
때늦은 외침에 깨어난 다른 하인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주저앉은 남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공을 가리켰다.
“저기…… 유령이!”
“뭐?”
“…….”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헛것을 봤구만. 쯧쯔…….”
짜증스럽게 혀를 찬 동료가 창문을 소리 내어 쾅 닫았다. 당황한 남자가 다시 여자가 서 있던 곳을 가리켰다.
“아니야! 저기 분명!”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언제 누군가 있었냐는 듯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중정을 돌아다니는 유령의 소문은 저택에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그런 소동 가운데서도 로위나의 정신은 오롯이 이곳이 아닌, 세드릭과 데미안이 사라진 항구에만 붙박여 있었다.
매일 아침 새벽이 되자마자 그곳으로 향했고, 기적을 바라듯이 밤늦게까지 머물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제 생명줄처럼 움켜잡은 데미안의 생환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져 갔고, 그럴 때마다 모든 분노와 원망은 단 한 남자에게 향했다.
증오가 절정에 치달은 건 건강상의 이유로 항구 출입을 거절당하고 나서였다.
쨍그랑.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슬아슬하게 킬리언의 뺨을 스친 화병이 곧이어 옆벽에 산산조각이 났다. 얇게 베인 볼을 만져 피를 확인하기 무섭게 비난이 쏟아졌다.
“죽어 버려!”
“로위나.”
“당신이 뭔데 날 막아? 무슨 권리로? 무슨 염치로?”
달려든 로위나가 킬리언의 옷깃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비틀면 당장이라도 꺾일 듯한 가녀린 팔이었다. 쇄골이 확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마른 몸에 잠시 이를 악문 킬리언이 천천히 로위나의 손을 감쌌다.
“지금 당신 모습을 봐. 정상인지.”
“쓸데없는 걱정!”
날카롭게 쏘아붙인 로위나가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곧 손목을 붙잡혔다.
“이거 놔! 소름 끼치니까 당장.”
“봐.”
몸부림치는 그녀를 질질 끌고 간 킬리언이 그대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오랜만에 보는 거울에 멈칫한 것도 잠시, 로위나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제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눈이 마주친 여자는 광인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어지럽게 풀어 헤쳐진 머리며 푹 꺼진 뺨, 움푹 들어간 눈 밑은 밤에 본다면 흠칫할 정도로 해골 같았다.
“이게 지금 당신이야. 항구에 갈 때마다 당신은 점점 더 말라 가지.”
잇새로 씹어 내뱉듯 말한 킬리언이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조금 있으면 관에 들어갈 것 같아서 금지시켰어.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스스로 듣기에도 냉정하고 싸늘한 어투였다. 일그러지는 거울 속 얼굴에 가슴이 욱신 아렸으나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로위나는, 그의 단 하나뿐인 여자는 광풍이 휘몰아치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저 아래로 기어이 스스로 몸을 내던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됐다. 모든 칼날 같은 바람과 원망을 자신이 떠안더라도.
“데미안을 찾아야지. 그 남자도. 그 전에 당신이 죽어선 안 되지.”
“당신이 죽인 거지?”
충격적인 스스로의 모습에 얼어붙었던 로위나가 홱 몸을 돌렸다. 초록 눈동자엔 섬뜩한 광기가 번득였다. 불붙은 몸으로 상대를 끌어안아 기어코 지옥으로 함께 떨어질 것 같은 광기였다.
“당신이 죽여 놓고 지금 내게 이러는 거지? 맞지?”
“그렇게 믿고 싶어?”
돌아온 반문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매섭게 그의 뺨을 친 로위나가 다그쳤다.
“맞다, 아니다 그렇게만 대답해.”
“아니야.”
“거짓말이야…….”
거칠게 킬리언을 밀어낸 로위나가 뒷걸음질 쳤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닦아주려 팔을 뻗은 킬리언이 천천히 주먹을 쥐고 손을 내렸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을 말하는 순간 결말은 정해졌다.
이상할 일도, 충격적인 일도 아니었다. 이 여자에게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알았다. 끝을 모르고 뻗었던 오만으로 저지른 끔찍한 실수. 차라리 자신을 원망하여 죽인다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걸 잃어버린 여자가 제일 먼저 고를 선택지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게 소름 끼치도록 두려웠다.
로위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다면. 그것만큼은 가정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신경과 근육이 졸아드는 듯 고통스러웠다.
“원한다면 그렇다고 믿어.”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귀를 의심한 로위나가 미간을 좁혔다.
“난 당신 정부잖아. 저번에도 말했듯. 거기다.”
“…….”
“당신에게 매달리는 중이지.”
그러니 날 마음대로 휘두르고 갖고 놀고 농락해도 괜찮아.
의미를 이해한 순간, 정수리 위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듯한 감각이 로위나를 찾아왔다. 동시에 거친 숨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래. 그랬지.”
아직 그 웃기지도 않은 ‘놀이’를 계속하겠다는 뜻이었다. 어처구니없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식은 눈물이 턱에 맺혀 떨어졌다. 비틀거리며 카우치에 풀썩 앉은 로위나가 몸을 숙이고 두 손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또 두통이…….”
“생각해 보니, 이제 필요 없어졌어.”
“…….”
갑작스러운 행동에 킬리언이 다가오기 무섭게 말을 끊은 로위나가 느릿하게 얼굴을 들었다.
“……뭐?”
“질렸다고, 당신이. 고개 꼿꼿하게 들고 날 아래로 볼 때는 굴복시키는 재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별로 흥미도 재미도 없어. 지긋지긋해. 당신도 이래서 날 버렸나 싶을 만큼.”
마지막 말에 킬리언의 눈 밑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귀찮은 벌레를 내쫓듯 손을 휘저은 로위나가 소파의 등받이에 길게 몸을 기댔다.
“내 눈앞에서 꺼져요. 영영.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마.”
이 남자에 대해 더는 생각하기 싫었다. 남은 돈을 끌어모아 항구 근처 작은 집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매일매일 기도하며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데미안이 엄마, 하고 부르며 품 안에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런 작은 소망이나마 붙들고 싶었다.
무거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킬리언이 느릿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눈을 치뜬 로위나가 가까이 오지 말라 눈빛으로 경고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긴 킬리언이 그녀의 등 뒤에 섰다.
“맞아. 난 오만한 개새끼지.”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로위나가 고개를 젖히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새파란 눈빛과 마주쳤다. 동시에 킬리언 데본셔라는 남자를 새삼 깨달았다.
제 목줄을 쥐여 주고 얌전히 굴었으나, 당장이라도 그녀를 한입에 삼켜 버릴 날카로운 송곳니를 감추고 있는 짐승이었다.
“그래서 길들여지길 원하잖아.”
커다란 손이 목 아래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빠르게 뛰는 맥동이 느껴졌다. 그대로 날 선 눈빛이 볼품없이 마른 뺨을 지나 정맥이 도드라질 정도로 투명한 목의 능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야릇한 시선에 로위나는 올가미에 걸린 사냥감이 된 느낌이었다. 목덜미가 오싹오싹하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마른침을 삼킨 로위나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이런 감각은 그저 압도적인 수컷을 향한 여자로서의 본능일 뿐이었다.
“난 질렸다고 했잖아. 다른 주인 찾아봐. 좋다고 환영할 여자가 널렸잖아?.”
“그건 안 돼.”
“당신이 날 싫어하건 원망하건 상관없어. 하지만 날 버리는 건 안 돼.”
“약속이랑 다르잖아.”
“아, 그걸 믿었어?”
끌어올린 입매가 죽이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분명 자신인데 목줄을 쥔 손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그녀를 종종 주춤하게 만들었다.
눈썹을 치켜올린 로위나가 손톱을 세워 휘둘렀다. 그가 제 목을 감싸 쥐었던 것처럼 그의 목에 상처를 내주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목 끝까지 단추가 잠겨 있었다.
대신 방금 파편에 스쳐 베인 뺨의 상처 위로 또 다른 상처가 새겨졌다. 얼굴을 찡그릴 만도 한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킬리언이 그녀의 손을 잡은 때였다.
다급한 노크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하!”
다급한 목소리로 문을 연 건 킬리언의 수하 중 한 명이었다. 로위나를 놓아준 그가 뒤를 돌자마자 남자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당장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킬리언이 남자를 따라 방을 나갔다. 카우치에서 벌떡 일어난 로위나가 창문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멀어지는 마차를 말없이 노려봤다.
* * *
무언가 숨기는 게 분명하다.
폭발 사고의 원흉이 아니더라도 그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곳에서의 중요한 볼일은 다 끝났는데도 킬리언은 오늘 낮처럼 종종 급하게 저택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로위나가 어두운 밤중에 일전에 우연히 발견한 통로의 문을 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대로 긴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을씨년스러운 소리와 함께 열린 문밖은 다름 아닌 킬리언의 침실이었다. 그가 자는 틈을 타 무언가 실마리라도 찾을 작정이었다.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살금살금 침대에 다가가는데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없었다. 텅 빈 침대에 놀란 로위나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여기 어딘가 뭐라도 있을 거야.”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가 협탁 서랍을 하나둘 여는 순간이었다. 세 번째 서랍을 여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로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