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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97화 (97/120)

97화

“그런 건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

“생존자는 없다는 말이군요.”

눈을 빛낸 로위나가 매달리듯 조사관의 소맷자락을 잡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다가온 목소리가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킬리언!”

정말 오랜만에 입에서 터져 나온 이름이었다. 희번덕 눈을 반짝인 로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줬다. 그러나 방금 전 충격의 후유증인 건지 좀처럼 일어서기 힘들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킬리언이 휘청이려는 로위나를 잡은 때였다.

철썩.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고개가 돌아간 킬리언을 노려본 로위나가 뺨이 붉어진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야.”

“…….”

“당신이 범인이야!”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렸으나 강렬할 정도로 진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온몸을 태워 버릴 듯한 분노와 원망이 뜨겁게 로위나를 휘감았다.

“전부 당신 탓이라고!”

소리치는 이유는 세실리아의 말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순전히 우연이라고 가장해도, 돌이켜 보면 전부 킬리언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순간이 흥분한 로위나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가 그녀를 억지로 구금해 두지 않았더라면, 이곳까지 쫓아와 협박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이전에 처참하게 버려 놓고 뻔뻔하게 그녀를 찾지 않았더라면.

한 번 돌이켜지기 시작한 시곗바늘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끝을 향해 내달렸다.

애초에…… 그 기차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등석 자리의 문을 연 건 자신이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던 그녀를 유혹한 건 다름 아닌 킬리언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매료되지 않았더라면.

“살려 내.”

요 며칠 사이 뼈가 만져질 정도로 마른 몸은 무게가 없었다. 멱살을 잡힌다 해도 팔은 조금만 힘을 준다면 맥없이 꺾일 정도로 가녀렸다. 하지만 눈빛 하나는 암고양이처럼 날카롭고 형형하게 빛났다.

“살려 내라고! 이 살인자야!”

울부짖듯 외친 로위나가 킬리언의 멱살을 흔들었다.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그 와중에도 미칠 것 같이 화가 나고 심장이 쥐어짜 낼 듯 아팠다. 빠르게 오르는 혈압에 점점 얼굴이 빨개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전부 당신이 그런 거야! 당신 탓이라고!”

“……로위나.”

“흐흑…….”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괴롭게 들렸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리라 무시했다. 뒤이어 화를 낼 기력조차 쇠진한 로위나가 미끄러지듯 흙바닥에 털썩 앉았다. 팔을 잡힌 그대로 줄이 끊긴 목각 인형처럼 온몸에 힘이 빠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재킷을 벗은 킬리언이 그것으로 그녀를 감싸듯 안아 들었다.

분노하여 발악한 게 무색하게도 충격에 넋이 나간 로위나가 조심스러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데미안.”

마차로 향하는 가운데 넓은 가슴팍에 뺨을 기댔던 로위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데미안은 당신 아들이야. 다른 남자 아이가 아니라.”

“…….”

놀라 손을 떼고 자신을 떨어뜨리리라는 예상과 달리, 잠시 멈춰 섰을 뿐 킬리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몇 초가 몇 년처럼 무겁게 지나갔다. 침묵 속에서 다시 걸음을 옮기고 그녀를 마차에 앉히는 킬리언을 바라보며 로위나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알고 있었구나. 그렇죠?”

대답 대신 그늘진 얼굴로 킬리언이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 문이 닫히기 무섭게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정적 안에서 로위나는 돌연 앞으로 고꾸라졌다. 재빨리 자신을 받친 킬리언의 어깨를 밀어내고 마른 웃음을 토해 냈다.

“하하! 하하하하…….”

“…….”

담담한 어조였으나 내뱉는 숨 하나하나 처절했다.

“그래. 모를 리가 없지. 당신이 어떤 사람인데.”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몸이 뜨겁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이대로 미쳐버리기 전, 누군가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다.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모든 분노를 터뜨릴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모든 원망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나쁜 놈이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마른 웃음은 폐가 찢길 듯이 아파 온 뒤에야 서서히 그쳤다. 힘줄이 두드러질 만큼 꽉 주먹을 쥐었다 편 킬리언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고 얼마 안 돼서.”

예상외의 대답에 로위나가 입을 벙긋했다. 이곳에서가 아니었다. 에셀우드의 시골, 낡고 쓰러져 가는 오래된 빌라에서 마주쳤을 때.

“그래서…….”

묘하게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그녀에게 너그럽게 대한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버렸던 정부가 제 아이를 낳아 몰래 키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어서.

“기분이 어땠어요? 좋았어요? 내가 당신에게 아직 옭아매 있는 거 같아서? 당신 아들을 낳아 길렀다는 게 당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었던 거 같아서?”

한마디 한마디 심장에 시퍼런 칼날을 박아 넣듯 질문한 로위나가 대답 없는 킬리언을 쏘아봤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남자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망적으로 확실해졌다. 의심스럽다고 해도 킬리언은 범인이 아니었다. 만약 세드릭만 죽었다면 분명 그가 배후에 있었을 테지만, 배가 폭발할 당시 세드릭은 데미안과 함께였다. 제 아들을 죽일 리 없었다. 그 무엇보다 그녀의 발목에 확실한 족쇄가 될 존재니까.

“대답해요. 왜 모르는 척했던 거죠?”

“당신이.”

이어진 힐난을 꿋꿋이 받아들이던 킬리언이 고해하듯 털어놨다.

“당신이 내게서 또다시 도망칠까 봐.”

“왜죠? 내가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한들 아이를 인질로 이용할 수 있었잖아요.”

“그 앤 내 아들이기도 해.”

처음으로 목소리에 힘을 준 그가 이를 악물었다. 냉혈한답게 평정을 유지하던 남자답지 않은 반응에 로위나는 처음으로 마주한 남자를 제대로 바라봤다. 관자놀이에 핏대가 서고 눈도 충혈되어 붉었다. 가증스러웠다.

“하하……! 아들은 무슨,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이제 와서 절절한 아버지인 척.”

호흡이 점점 밭아졌다. 숨 쉬기 힘들어 목을 움켜쥔 로위나가 참아 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뺨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어지럽고 손끝에서부터 저려 왔다. 메스꺼움과 함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 당신은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어. 당신을 저, 저주해.”

헐떡이며 퍼부은 저주는 땅을 기는 듯 참혹하고 온몸의 장기를 쥐어짜 내는 듯 고통스러웠다.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앉아 있기 힘들었다. 손발이 잘게 경련하고 가슴 통증이 밀려들었다.

빠르게 팔을 뻗은 킬리언이 그녀의 옷깃 단추를 풀어 내렸다.

“뭐, 뭐 하는…….”

“가만히.”

기겁한 로위나를 붙잡은 그가 허리까지 단추를 다 풀어 내리고는 드레스를 내렸다. 다음 순서는 코르셋이었다. 꼼꼼하게 묶인 끈을 다 풀어내고 나서야 로위나는 겨우겨우 심호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보다 조금 좋아진 것뿐 혈색은 여전히 새파란 상태였다. 차츰 눈앞이 새하얘지고 전신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 기력이 없었다.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려는 머리를 받친 킬리언이 자리를 옮겨 로위나의 머리를 그의 허벅지 위에 조심히 올렸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손으로 훑고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데미안…… 세드릭…….”

단말마처럼 들려온 속삭임에 멈칫한 것도 잠시, 혼절한 로위나의 이마에 입 맞췄다.

“날 원망해. 증오하고 저주해.”

“…….”

“그게 당신을 살아가게 한다면, 버티게 한다면 그렇게 해.”

설령 로위나가 순순히 품에 안기고는 숨겨 온 칼로 심장을 헤집어 대도 이제 와 안은 팔을 놓을 순 없었다. 슬퍼하고 절망한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그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나았다.

가슴 깊숙이 묻어 놓은 분노를 터뜨리고 수십 번 수백 번 그를 찔러 대는 게 나았다.

“로위나.”

“…….”

“로위나.”

만지는 것도 조심스러운 여자였다. 이름을 부르는 것도, 눈을 마주치는 것도. 매일 매 순간 로위나는 그를 휘두르고 엉망진창으로 찢어 놓고는 다시 살게 만들었다. 코 가까이 손을 대 조금씩 진정되어 가는 숨을 확인한 킬리언이 보드라운 뺨을 매만졌다.

거침없이 달리던 마차가 조금씩 속도를 줄인 건 잠시 후였다.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부름꾼 소년 한 명이 다가와 유리창을 두드렸다.

“나리.”

마차의 주인이 창을 열자마자 모자를 벗어 꾸벅 인사한 소년이 두 손으로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받아 든 킬리언이 내용을 읽는 동안, 마부에게서 품삯을 받아 든 소년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등을 돌렸다. 멀어지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소년의 발목을 붙잡았다.

“잠시만.”

“예?”

뒤를 돈 소년에게 킬리언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소년이 다시 다가오자 그가 품에서 봉투를 꺼내 들었다.

“이걸 편지를 보낸 사람에게.”

봉투와 함께 내민 건 방금 받았던 것보다 더 큰 돈이었다. 눈을 빛낸 소년이 편지를 받아 들고 빠르게 멀어졌다. 작아지는 뒷모습을 흘깃 본 킬리언이 마차 문을 닫고 지팡이로 마부석과 이어진 벽을 두 번 두드렸다.

숨을 고르던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발굽을 다시 굴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떠난 자리엔 흙먼지가 일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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