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파편들만 남았을 뿐, 그 안에 승선한 사람들은 몇몇 살덩이 외에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구분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포기하시는 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조사관이 털썩 주저앉으려는 로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뻗어 온 팔이 한발 앞서 가녀린 허리를 받쳤다.
“로위나.”
“이거 놔요.”
“오늘로 벌써 닷새째에요. 눈 좀 붙이는 게…….”
“이거 놓으라고!”
바르작거리듯 힘없이 킬리언을 밀어낸 로위나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게 어느덧 5일째였다. 처음엔 뭔가 소식이 잘못된 거라고 부정하다가 직접 현장에 도착하자 항구에 처참하게 널려 있는 배의 파편과 증거물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차츰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눈꺼풀은 누군가 아래에서 잡아당기듯 계속 감기는 가운데에서도 로위나는 또렷이 깨어 있으려 노력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저택에 잠깐잠깐 돌아갔다가도 용건만 끝나면 또 바로 항구로 향했다.
세드릭과 데미안이 폭발한 배에 타지 않았을 거라고 분명 사고가 일어나기 전 다른 곳에 몸을 피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굳센 믿음은 거센 파도에 평온한 모래사장이 뒤엎어지듯 매일매일 흔들렸다.
눈을 감으면 화사하게 웃었던 데미안이 보였다.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휘둘렸던 하나뿐인 아들. 어느덧 훌쩍 자라 그녀를 지탱해 주던 사랑스러운 아들. 세드릭을 따라 배를 타겠다던 말에 금세 돌아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순순히 보내 준 게 뼈저리게 후회됐다.
멀어지는 모습에 손을 뻗어도 꿈속에서조차 데미안은 그녀의 먼발치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막 그녀와 혼인했었던 세드릭도.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면 마차 안이거나 항구 주변에 임시로 마련한 숙소 안이었다. 옆에는 언제나 그늘진 얼굴의 남자가 있었다.
“여기에 그들이 있었을 리 없어.”
세드릭 외에 데미안을 입에 담았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로위나가 중얼거렸다.
“분명 잘 숨어 있을 거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락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처절한 혼잣말에 킬리언이 대답 대신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 핼쑥한 뺨과 초췌해진 눈. 거뭇한 눈 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로렌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킬리언이 제 뺨을 감싸든 말든 생각에 잠긴 로위나가 문득 든 생각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세드릭이 인편으로 로렌의 약을 미리 보내온 덕분에 로렌의 상태는 많이 호전된 상황이었다.
약만 보내오고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남동생에게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아직 로위나에게 따로 연락을 하진 않았으나 그녀가 세드릭에 대해 물어볼 건 시간문제였다.
“사람을 보내서 잠시 수도를 떠났다고 하지.”
“…….”
“그럼 되겠지?”
달래듯 부드럽게 말한 킬리언이 이윽고 다시 휘청하는 로위나의 몸을 공주님 안듯 안아 올렸다.
“내려놔요.”
“당신은 자야 해.”
“괜찮다니까!”
소리 지른 로위나가 넓은 어깨를 밀려고 했으나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발버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마차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킬리언이 그녀를 안은 채 자리에 앉았다.
“이러다 당신마저 쓰러지면, 그들은 누가 찾지?”
“그건.”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여. 그동안 내가 찾을 테니까.”
차분한 속삭임에 로위나가 몸의 힘을 뺐다. 킬리언은 잠잠해진 로위나의 눈꺼풀 위로 손을 내리눌렀다.
“안 되……는데.”
“쉿.”
어린아이를 다독이듯 다른 손으로 어깨를 토닥인 킬리언이 맥없이 누운 로위나를 달랬다.
“잠잘 시간이야.”
그 말과 동시에 밀린 외상값이라도 받으려는 듯 무서운 기세로 졸음이 쏟아졌다.
깊은 잠이 든 로위나의 숨소리가 차츰 잦아들자,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은 킬리언이 마부에게 출발을 지시했다.
* * *
정신력으로 닷새를 쪽잠만 잔 채 버텼으나 로위나는 아슬아슬하게 한계 직전에서 멈췄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저택의 푹신한 침대 위였다.
“물…….”
목이 타들어 갈 듯 건조했다. 부르튼 입술로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협탁 위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마셔요.”
“……고마워요.”
“뭘요.”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머리맡에 앉은 세실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킨 로위나가 사막에서 샘을 발견한 사람처럼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잔에 가득 찬 물을 비운 후에야 숨통이 트였다.
잔을 다시 돌려받은 세실리아가 불쑥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네?”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아…….”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진 로위나가 숨겨진 뜻을 읽고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이야 세드릭과 데미안 두 사람 일 때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지만, 이곳은 세실리아의 저택이었다. 킬리언이 집세로 어느 정도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세실리아의 입장에서는 낯선 사람이 제집에 있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집을 알아볼게요.”
이곳을 나간다 하면 킬리언의 표정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해도 머지않아 잡힐 게 분명했고, 무엇보다 두 사람을 찾기 전까지 그녀는 이 나라에서, 이 수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날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몰지 말아요.”
손사래를 친 세실리아가 부정하며 로위나의 손을 잡았다.
“그럼……?”
“사고를 조사해야죠.”
“그건 이미 조사관이.”
기절하듯 곯아떨어지기 전, 포기하라던 조사관의 말이 떠오르자 먹은 것도 없는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로위나의 등허리를 쓸어내려 주던 세실리아는 그녀가 헛구역질을 끝내자 슬그머니 화제를 꺼냈다.
“사실 해 줄 말이 있어요. 이걸 말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머뭇거리는 기색에 로위나가 고개를 돌려 슬쩍 시선을 피한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요?”
“나도 걱정돼서 사실 사람을 보내 이것저것 알아봤거든요. 배에서 사용됐다던 폭탄 있잖아요. 그거 굉장히 보기 드문 사제 폭탄이래요.”
“사제…… 폭탄?”
휴전 중이라 군사적 용도 말고는 개인이 폭탄을 제조하거나 소유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요 며칠 반쯤 정신을 놓고 다니느라 생각하지 못했던 요소에 로위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간 가장 희귀한 원료가.”
“원료가?”
말끝을 따라 하자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춘 세실리아가 허리를 숙이곤 작게 귓속말했다.
“아버지의 장부를 우연히 봤는데, 최근 저하께서 취급하는 품목 중에 있었어요.”
“…….”
“물론 저하와 폭탄은 아무런 연관이 없겠죠. 운 좋게 그걸 손에 넣은 사람이…… 미스 필로네?”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불을 걷어 올린 로위나가 잠옷 차림으로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벽을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화들짝 놀란 세실리아가 그녀를 막아섰다.
“당신은 조금 더 쉬어야 해요.”
“괜찮아요. 그보다 갈아입을 옷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바로 옆 드레스 룸에서 아무거나.”
“아, 알았어요.”
거절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에 주춤한 세실리아가 드레스 룸과 이어진 방문을 열어젖혔다.
침실에 홀로 남자 로위나는 그대로 벽에 기대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닐 거야…….”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사제 폭탄. 희귀한 원료. 킬리언. 연관성을 생각하자 한 가지 의문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킬리언을 기한부 정부로 받아들인 이후 사고가 났다.
세드릭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도 단 한 명이었다.
방금 전 현장에서 떠나지 않겠다며 몸부림치는 로위나를 강제로 마차에 태우고 잠을 재운 것도 그였다.
냉혹하리만치 침착한 태도와 대처. 한 번 똬리를 튼 의심은 금이 간 유리처럼 점점 그 영역을 넓혔다.
“일단, 직접 물어봐야겠어.”
떨리는 숨을 몰아쉰 로위나가 결론을 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오라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연 이는 하녀였다.
“찾으시던 분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가셔야 할 것 같답니다.”
생각은 사치였다. 눈을 번쩍 뜬 로위나가 세실리아를 기다릴 틈도 없이 외투만 하나 걸치고 하녀를 따라나섰다.
* * *
발견된 증거품은 다름 아닌 세드릭의 목걸이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담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로켓 목걸이.
손을 떨고 있는 로위나를 향해 안타까운 얼굴로 조사관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백방으로 찾았으나 그것뿐이었습니다. 아마 이 외에는…….”
산산조각이 나 바다에 흩어졌을 거라는 말이었다. 주저앉은 로위나가 목걸이를 제 품에 안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부인.”
손을 뻗어 자신을 일으키려는 조사관을 거절한 로위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호, 혹시 어린아이의 물건이나 그런 건…….”
이미 나와 있는 증거품 앞에서 더는 부정할 수 없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붙잡고 싶었다. 절실함을 읽었는지 침통한 얼굴로 조사관이 나직이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