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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95화 (95/120)

95화

목적지가 어디인지 킬리언은 끝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때문에 마차가 멈춰 설 때까지 로위나는 그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과 함께 조금씩 속도를 줄인 마차가 천천히 어느 인적 드문 호수 앞에서 멈춰 섰다. 킬리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로위나가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떡 벌렸다.

“아직도 얼어 있는 호수가 있네요?”

“이 호수는 일 년에 반은 얼어 있죠.”

“처음 와 봐요.”

“그렇겠죠. 사유지니까.”

생각해 보니 몇 개의 문을 지나온 것 같기는 했다. 로위나의 궁금증을 읽어 낸 듯 킬리언이 덧붙였다.

“지인이 이곳 소유주입니다.”

“아, 그래서…….”

납득한 로위나가 펼쳐진 강을 감상했다. 강 한가운데 둥 떠 있는 작은 가제보가 보였다. 그것을 가리킨 로위나가 킬리언을 바라봤다.

“저긴 뭐죠?”

“휴식 공간입니다. 원래는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죠.”

“신기하네요. 어떻게 지었을지.”

로위나가 감탄하는 사이, 마부에게서 스케이트 두 켤레를 건네받은 킬리언이 그녀를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바로 무릎 꿇고 앉아 한 켤레의 끈을 풀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휩쓸리듯 앉은 로위나가 이내 스케이트를 신기려는 킬리언의 어깨를 밀어냈다.

“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가 언제!”

“기차에서.”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지만 지금 와선 까마득하게 예전 일이었다. 뒤늦게 기억해 낸 로위나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옛날 일이잖아요. 안 탈래요.”

“겁납니까?”

그대로 일어서서 마차로 가려는데 날아온 도발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홱 몸을 돌린 로위나가 쏘아붙였다.

“안 나거든요. 타기 싫어서 그래요. 한 번도 탄 적 없는데 갑자기 타자고 하면.”

“그런가요? 나는 또 도망치는 줄 알고.”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은 킬리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섭다면 어쩔 수 없죠.”

봐준다는 듯한 말투에 참다못한 로위나가 다시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스케이트를 빼앗듯 가져갔다.

“타면 되잖아요. 뭐가 어려운 거라고.”

“신을 줄은 알고?”

“그건.”

호기롭게 스케이트를 가져갔지만 이어진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멈칫한 로위나가 어물거렸다.

“어떻게든 신으면 될 일이죠.”

“날 줘요.”

소리 없이 웃은 킬리언이 그녀의 손에서 부드럽게 스케이트를 다시 가져갔다.

“앉아요.”

“혼자 신겠다니까요.”

“이번엔 뭐가 무서운 거지?”

“누가!”

발끈해 대꾸하자 그가 증명해 보라는 듯 벤치로 턱짓했다. 결국 털썩 자리에 앉은 로위나가 어서 신기라는 듯 발을 내밀었다.

반쯤 치기 어린 자신의 행동에 뒤늦게 뺨을 붉히기도 전에, 그녀의 구두를 벗겨 낸 킬리언이 조심스럽게 스케이트를 신기기 시작했다.

생전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일 일이 없는 남자가 이젠 자연스럽게 그녀 앞에서 무릎 꿇었다. 묘한 기분에 로위나는 가만히 발을 맡겼다. 마치 그녀의 발에 쏟아진 홍차를 닦았을 때와 같은 구도였다. 로위나는 꼿꼿이 세운 등을 생소한 상황에 대한 불편함 때문이라 단정했다.

“역시 내가 직접.”

“가만히.”

조용하게 경고한 킬리언이 스케이트 끈을 묶기 시작했다. 혹시 넘어질까 꽉 조이고 난 뒤 묶는 과정에서 몇 번인가 왼쪽 손이 멈칫했다.

“어디 아픈가요?”

“아니. 그저 처음이라.”

“항상 시중을 받는 입장이셨죠.”

비아냥에도 말없이 손을 놀린 킬리언이 끈을 단단하게 매듭지었다. 졸지에 할 말이 없어진 로위나는 잠시 희귀한 짐승을 보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여왕의 시중을 드는 시종처럼 경건하게 스케이트를 신기는 남자의 모습은 차마 꿈에서도 본 적 없을 만큼 낯설었다.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칼에 뺨 위로 부챗살처럼 퍼진 속눈썹은 마찬가지로 칠흑 같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번엔 오른쪽 스케이트를 든 킬리언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마음에 로위나가 입을 달싹였다.

“……이런 걸 하실 줄 아는지는 몰랐네요.”

“나도 몰랐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킬리언이 뒤이어 반대쪽 신발을 벗기고 스케이트를 마저 신겼다.

로위나는 생소한 눈으로 제가 신은 스케이트를 내려다봤다.

생전 처음이었다. 고국에도 겨울이면 야외 스케이트장이 열렸지만, 꼭 필요한 연회 자리가 아니면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싫어하던 킬리언이었기에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 단단하게 묶인 끈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어느덧 옆에 앉아 자신의 스케이트까지 신은 킬리언이 일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기 무섭게 로위나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친 킬리언이 호수로 그녀를 이끌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걸음을 옮기던 로위나의 발이 호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는 호수 표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라앉을 것 같은 불안감이 그녀를 휩쌌다.

“역시 다음에 타는 게 좋겠어요.”

“다음에?”

“지금은 아닌 거 같…… 꺅!”

뒤돌아 다시 벤치로 가려는데 몸이 뒤로 기울었다. 뒤통수를 박나 싶어 눈을 꼭 감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보라색과 붉은색, 그리고 남색으로 이지러지는 하늘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와 박혔다.

“…….”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군.”

좀 전 식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밀어내듯 킬리언의 품에서 벗어난 로위나가 잠시 그를 흘겨보고는 깊게 심호흡했다.

“무리라면 돌아가도.”

“안 돌아가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결연하게 말한 로위나가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호수에 내디뎠다. 중심을 잡지 못해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까마득한 호수 밑에 가라앉을까 뒤통수에 식은땀이 흘렀다. 일단 호수에 서긴 했으나 스케이트를 어떻게 타는지 알 수 없어 멀거니 서 있는데,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은 킬리언이 뿌리칠 새도 없이 그대로 제 팔에 얹게 했다.

“한결 낫지 않습니까?”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말대로였다. 대답 대신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리 없이 입매를 끌어 올린 킬리언이 조금씩 조금씩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무리하지 않고 느린 속도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하자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던 균형은 안정되어 가고, 로위나는 스케이트에 차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앞을 볼 여유도 없이 한 손은 킬리언의 팔을 붙잡고 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나아가자 어느 순간 길이 막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멀리만 보였던 가제보가 바로 앞에 있었다.

“언제……?”

“생각보다 별거 아니니까.”

먼저 가제보 위로 올라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 킬리언이 힘주어 로위나를 끌어 올렸다.

빙판 위에서 벗어나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위로 올라온 로위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킬리언이 불쑥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보입니까?”

“마차……네요.”

그들이 타고 온 마차가 멀찍이 보였다.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그저 발밑만 보고 걸었는데 어느덧 여기까지 온 게.

방금 지난 길을 멍하니 보며 로위나의 떨리는 숨도 천천히 진정됐다. 어느 정도 안정됐을 때,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킬리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

로위나는 느릿하게 풍경을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처음이었다. 다시 만난 이후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게.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이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미 조사를 했던 거 아닌가요.”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냈어요.”

골짜기에 살던 무렵처럼 목가적이고 조용한 시골에서 그녀를 좋게 봐주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다.

“알겠지만, 소설도 냈고요.”

“읽어 봤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로위나가 눈을 깜박였다. 문학이건 예술이건 그녀가 가고 싶다 말하지 않는다면 관심도 없던 남자였다. 온갖 귀한 장서들이 가득한 공작저 서재 안에는 과학과 실용적인 서적들만이 가득했다.

“어땠어요?”

“재밌더군요.”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내심 기대했던 로위나가 짤막한 대꾸에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중간에 덮지 않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공기가 그녀를 어느덧 너그럽게 만들었다. 안개가 옅게 낀 풍경이 마치 그들이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애증도, 경계도 모두 미뤄 놓고 그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소설의 주인공은 당신이겠지.”

“맞아요.”

“그녀를 못되게 희롱한 남자는 당연히 나겠고.”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려요.”

선문답을 하듯 이어진 대화에서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기도 하고 날 경멸스럽게 바라봤던 사교계이기도 하죠. 어리숙한 내 스스로이기도 하고.”

자조 섞인 말이었으나 말투는 덤덤하고 평온했다. 알 수 없는 눈으로 로위나를 내려다보던 킬리언이 그녀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로위나는 뒤로 물러서지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분위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그 단순한 사실이 그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로위나. 나는.”

“…….”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어 본 적이 없어.”

그는 한 나라의 공작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그가 가리킨 건 그른 것도 옳은 게 됐고, 물이라도 그가 불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불이라 불렀다.

따라서 옳고 그름은 그의 가치 판단에 있어 고려할 사항도 아니었고, 그저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으냐만이 오롯한 기준점이었다.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 이토록 간구해 본 적이 없어. 할 수만 있다면 심장이라도 도려내 보여 주고 싶을 정도야. 내가 얼마나 절실하고 간절한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손을 제 팔로 이끌었던 것과 달리, 잡아먹을 듯한 시선 아래로 손은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 그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안개 낀 호수로 시선을 던졌다.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 게 마치 그들 사이 같았다. 그녀 혼자 이곳에서 벗어나면 이 남자는 아마 영원히 이 호수를 헤매리라.

“……추워요.”

한참의 침묵 끝에 로위나가 되돌린 말은 그것 하나였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킬리언이 제 손을 내밀었다.

침묵 속에서 마차는 저택을 향해 내달렸다. 어색하게 킬리언과 헤어져 별채로 들어가자 로위나의 방 안에 누군가 와 있었다.

“늦게 들어오는군요.”

“……세실리아?”

형형한 눈으로 로위나를 쏘아본 세실리아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에셀우드에서 온 급보예요. 읽어봐요.”

순간 세드릭을 떠올리고 죄책감에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이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하나의 단어가 그녀의 모든 신경을 뒤흔들었다.

에셀우드에서 출항한 작은 선박, 오늘 새벽 의문의 폭탄으로 폭발.

탑승객 명단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드릭 고드웰. 외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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