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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94화 (94/120)

94화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이끌리듯 들어간 여관 일 층은 다름 아닌 식당이었다. 숙박객뿐 아니라 일반 손님도 받는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운데, 직원이 그들을 가장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주문은 예약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친절하게 말한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 덩그러니 앉은 로위나는 반쯤 홀린 기분이었다. 반면, 태연한 얼굴로 긴 다리를 꼬고 앉은 킬리언이 팔꿈치를 식탁에 기댔다. 두 손을 깍지 낀 그가 손에 턱을 괴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빤히 쳐다보는 새파란 눈빛에 로위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뚫어지겠네요.”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글쎄요? 아무것도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군요.”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겼다. 짓궂은 농담에 귀가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예의를 갖춰요. 두 번째 만남이라고 한 건 당신이니까.”

애써 없던 일처럼 넘어가려는 게 보기 좋게 무산됐다. 대답 대신 알겠다는 듯 킬리언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큼, 헛기침을 한 로위나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옆자리에 앉은 화기애애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막 말을 시작한 아들과 그 아들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부부가 웃으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그 모습에 시선이 빼앗긴 사이, 다가온 손이 흐트러진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 음식이 나왔는지 식탁 위에 다채로운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유학할 때 친구들과 밤늦게 기숙사에 나가 본 적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식기를 잡고 그녀 몫의 샐러드를 볼에서 덜어 낸 킬리언이 그대로 그것을 내밀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행동도 말도 믿기지 않아 눈만 깜박이던 로위나가 엉거주춤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었다. 소스와 함께 신선한 채소들이 감기듯 혀에 녹아들었다.

싱그러운 소스와 아삭한 식감에 감탄한 것도 잠시, 그녀를 또다시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에 로위나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불량 학생이었다는 말은 아니죠? 안 믿겨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잠시 숨을 돌린 그녀가 추궁하듯 말하자 입매를 끌어 올린 킬리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보단 일탈도 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원래라면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로위나는 킬리언의 얼굴 위로 데미안을 겹쳐 봤다.

그녀의 상상 속에 그보다는 훨씬 어리고 데미안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진 소년이 앉아 있었다.

“친구가 있었…… 아니.”

살짝 가늘어진 킬리언의 눈에 슬쩍 시선을 피한 로위나가 질문을 바꿨다.

“일탈이라면 어떤?”

기어이 호기심이 자존심을 이겼다. 어차피 그와 이렇게 마주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무엇보다 ‘두 번째 만남’이라는 가정이 로위나를 흔들었다. 이제 막 만나 호감을 쌓기 시작하는 남녀가 충분히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말이 술술 나왔다.

“무슨 일탈을 해 봤는데요?”

“방금 말했듯 친구들과 기숙사 통금 시간을 어기고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기도 했고 어떨 땐 숙제를 안 해 와서 당일 아침 친구 걸 베끼기도 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모험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로위나의 표정이 점점 의심스럽게 변해 가는 가운데, 아랑곳하지 않고 킬리언이 말을 이어 나갔다.

“굉장히 까다롭고 가혹한 체벌을 주던 선생이 있었는데, 언젠간 그의 침대에 학교 축사에서 기르던 닭들을 모조리 옮겨 둔 적도 있죠. 일어나자마자 지독한 닭똥 냄새와 깃털에 혼비백산한 꼴을 보며 웃기도 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웃긴 장면이었다. 저도 모르게 상상하다 로위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진짜 말도 못 하는 개구쟁이였네요. 어떻게 졸업했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종종 정신없는 데미안이 킬리언의 아들이 맞는지 의심했던 게 바보 같은 일이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웃고 있는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웃음을 멈춘 로위나가 뒤늦게 킬리언을 살피자 넋 놓듯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뒤늦게 식기를 들었다.

“졸업이야 쉬웠습니다.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으니까.”

“같이 놀던 친구들은?”

“몇몇은 낙제했죠.”

어렸을 시절 일이었다. 개중 한 명이 그의 정보를 정적에게 팔아넘겼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삼킨 킬리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절교 안 당한 게 용…….”

“본채 요리 올리겠습니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가온 직원이 빈 볼을 치우고 가져온 트레이에서 다음 요리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직화로 구운 양고기 요리였다. 비린내가 하나도 없었고 살코기는 부드러워 보였다. 로위나가 나이프를 쥐자마자 킬리언이 그대로 그녀의 요리를 가져가 대신 고기를 썰었다. 둘도 없이 다정한 남자 같은 행동에 로위나가 가만히 입을 다문 사이, 질문이 날아왔다.

“그러는 당신은?”

“네?”

“친구가 있었습니까? 전에 본 그 친구 말고.”

전에 본 그 친구가 뜻하는 사람은 자명했다. 불쑥 떠오른 얼굴에 로위나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졌다.

“없었어요.”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자 상대방은 왜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워낙 외진 시골이었고 이웃은 다들 제 부모님뻘이었으니까요. 또래라고는 한 명이 전부였죠.”

기껏 수도에 올라와 사귀었던, ‘친구’라 믿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멜리사였다.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고 뻔뻔하게 그 곁을 지켰던.

하지만 누구보다 다정한 아이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배신감에 매정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던 걸 생각하자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멜리사는 어떻게 됐죠?”

“고향에 내려갔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모르고.”

“혹시 폭력을 쓰거나 해한 건…….”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닐 테니.”

담담한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로위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어느새 그녀의 스테이크를 전부 자른 킬리언이 다시 그것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멋쩍게 감사 인사를 한 로위나가 포크를 들고 한 조각을 입에 가져갔다. 보이는 것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맛을 음미하는데 킬리언이 연이어 물었다.

“어떤 소녀였습니까?”

“그건.”

잠시 뜸을 들인 로위나가 대꾸했다.

“이미 얘기한 적 있는데요. 다 잊으셨겠지만.”

그녀는 기차에서 이제 막 알게 된 남자에게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스무 살 무렵의 자신을 떠올렸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 약간의 불안을 안고 있던 어리디어렸던 아가씨.

과거를 생각하며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돌아온 대답에 로위나는 귀를 의심했다.

“염소 한 쌍을 키웠다고 했죠. 닭도 암탉만 세 마리, 그리고 양은 없지만 양치기 개 한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도.”

“…….”

“전부 이름을 지어 줬다고 했었는데. 개 이름은 로로였던가요?”

“……맞아요.”

눈을 동그랗게 뜬 로위나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기억해요?”

“말했잖아요. 성적은 좋았다고.”

빙긋 웃은 킬리언이 한 박자 늦게 자신의 고기를 잘라 입에 넣었다.

“흘려들은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첫눈에 반했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로위나는 사레에 걸릴 뻔했다. 급하게 물을 마시고 겨우겨우 목에 얹힌 고기를 삼키고 나자 정신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할 거라고.”

뒤늦게 따졌지만 돌아온 건 태연한 대꾸였다. 이제 와서 바뀐 모습에 언짢아져 그를 자극하고 싶어졌다.

“이제 와서 뻔뻔하다고 생각 안 해요?”

“…….”

“내게 미안하다면서 내가 원하는 건 안 해 주잖아요.”

이어진 말에 킬리언은 대답 대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로위나가 원하는 거란 명백했다. 자신을 영원히 떠나는 것. 그리고 그녀는 그걸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심장을 누군가 가뿐히 지르밟은 느낌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온몸이 저릿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킬리언을 향해 로위나가 쐐기를 꽂았다.

“우리 이쯤에서 그만하는 건 어때요? 피차 시간 낭비일 텐데.”

“……그건 안 돼.”

한참 만에 대답한 킬리언이 씹어 삼키듯 덧붙였다.

“난 당신 생각보다 더 절박하니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로위나가 멀거니 앉아 있는데 어느덧 마지막 디저트가 나왔다. 셔벗을 몇 숟갈 뜨는 듯 마는 듯 하다 식사는 끝났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로위나가 닫힌 커튼을 젖혔다.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아직 지평선 너머에 머문 해가 사방을 노을빛으로 비췄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지나치는 다른 마차와 행인들을 바라보던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언제부터 그녀를 보고 있던 건지 킬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넓은 식당에서 단둘이 마주 앉는 것과 마차 안에서 아무 말도 없이 마주 앉는 건 비교할 수 없이 달랐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킨 로위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나요?”

“아니요.”

고개를 저은 킬리언이 조용히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갈 곳이 있습니다.”

“……지금 피곤한…….”

은근슬쩍 거절하려던 로위나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절박하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는 새파란 눈빛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먼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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