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로위나의 제안은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도박이었다. 하지만 킬리언에겐 그 어떤 것보다 필요한 기회였다. 이 나라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냈던지라 시간은 여유로웠다.
기한이 정해진 대신 도망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로위나는 철저히 지켰다. 아침엔 그가 보낸 싱싱한 생화 향기를 맡으며 눈을 뜨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중정에 나와 미리 준비된 아침을 그와 함께 들었다. 점심이면 공원을 걷기도 하고 해 질 녘이 되면 노래나 발레 공연을 보러 다녔다. 그가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함께 돌아오면 이미 컴컴한 밤이었다.
스타킹을 벗기던 날처럼 저돌적으로 나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킬리언은 생각보다 더 신사적이고 선을 지켜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호기심 많은 시선이 그들을 향할 때면 로위나가 무안하지 않게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그녀를 자연스레 제 몸으로 가렸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접촉 외에는 먼저 손을 대거나 접근하지 않았다.
“오늘도 즐거웠습니다. 좋은 밤 되기를.”
마차에서 나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 맞출 때면, 애틋한 약혼녀를 집에 바래다주는 순정적인 남자로도 보였다.
“당신도요.”
반면 로위나는 무정하게 손을 빼내고 예의상 대꾸를 할 뿐이었다. 거부만 하지 않을 뿐이지 빙벽처럼 차갑고 딱딱한 모습에 조금은 물러설 법도 한데 킬리언은 좀처럼 그녀가 원하는 반응을 되돌려 주지 않았다.
“이제 사흘 남았네요.”
심술궂게 덧붙인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늘로 콕콕 찌르듯, 쥐를 갖고 놀듯 로위나는 지난 나흘간 부지불식간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럼 내일 보죠.”
하지만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하는 로위나의 기대는 바로 다음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준수한 미소를 띤 그가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진 뒷모습을 바라보다 로위나 또한 본채로 들어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현관 앞에서 각자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멀찍이 바라보던 세실리아가 손톱을 깨물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입 안이 말랐다.
“이러면 기껏 준비했던 게 오히려 역효과가 나잖아.”
짜증스럽게 홱 고개를 돌린 곳에는 그녀 못지않게 형형한 눈으로 두 남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심통 난 얼굴로 세실리아가 이를 갈았다.
“어쩔 셈이야, 톰 씨? 계획은?”
“……걱정 말아요. 아가씨. 전부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스산하게 대꾸한 톰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지?”
“읽어 보세요.”
처음 말을 걸었을 때와 달리 오만방자한 말투였다. 남자의 건방진 태도에 신경이 거슬린 것도 잠시, 그의 손에서 쪽지를 건네받은 세실리아가 천천히 그것을 읽었다.
“세드릭 고드웰, 내일 입항 예정. 대기하고 있음…… 내일?”
쪽지를 읽다 말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세실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원래 일정보다 빠르잖아요. 어떻게 된 일이죠?”
저택에 방문했다가 터덜터덜 쫓겨나는 세드릭 고드웰을 불러 세운 건 그녀였다. 그와 로위나의 사연을 대략 알고 있다고 말하고 그들이 만날 수 있게 공원으로 로위나를 이끈 것도 그녀였다.
이후로는 톰의 활약이었다. 하늘이 도운 덕으로 로렌이란 여자와 똑같은 병을 앓았던 이를 예전에 알았고, 건너 건너 사람을 통해 그 소식을 세드릭 고드웰에게 알렸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핑계로 망설임 없이 에셀우드 행을 택하도록 종용했다.
혹시나 킬리언 데본셔에게 꼬리가 밟힐까 노심초사하며 만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세드릭 고드웰과 로위나 필로네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 명분은 훌륭하게 갖춰졌다.
“로위나 필로네가 킬리언 데본셔에게 억지로 끌려다니고 있고 잠자리를 강요받는다는 이야기를 흘렸어요.”
“그래서 예정보다 더 서둘러 오는 거군요.”
“아가씨로서도 저 꼴을 이제 더 안 봐도 되니 다행인 일이죠.”
모든 일의 목적은 ‘킬리언 데본셔가 세드릭 고드웰을 죽였다’라는 누명을 씌우는 데 있었다.
수도 한복판인 이곳에서 로위나 필로네를 해치는 건 꼬리를 밟혀 오히려 자멸하기 쉬운 일이었고 데본셔 공작의 경우 말할 필요도 없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세드릭 고드웰을 이용해 킬리언 데본셔가 살해한 것처럼 꾸미고, 그걸 로위나 필로네가 목격하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얌전히 기다리시면 원하는 게 굴러 들어올 겁니다. 그러니 재촉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통보하듯 말한 톰이 그녀의 손에서 다시 쪽지를 빼앗듯 가져갔다. 등을 돌리는데 세실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잠깐.”
“뭐죠?”
“문득 궁금해져서요. 나야…… 저 두 사람을 완전히 끝내게 하고 저하의 옆자리를 채울 수만 있으면 좋지만, 당신에겐 무슨 이득이 있죠? 목숨 걸고 하는 일인데.”
“개인적으로 갚아야 할 빚이 있거든요.”
반쪽짜리 사생아에 제대로 된 재산도 없는 그가 킬리언 데본셔에게 복수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설사 만에 하나 경호를 뚫고 그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저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일 남자였다. 그런 세계에 발을 담갔고 마음의 준비야 늘 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최고의 복수는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절망을 안겨 주는 거였다.
그토록 사랑하고 원하는 여자가 자신을 저주하고 증오한다면. 죽은 남편을 끌어안고 살며 제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면. 그의 몫이 오롯이 원망과 미움뿐이며 그 어떤 가능성도 없어진다면.
세드릭 고드웰의 죽음은 로위나 필로네에 대한 징벌도 되지만 킬리언 데본셔에게 절망을 안겨 줄 유일한 단추였다.
“……뭐. 알겠어요.”
희번덕거리는 눈을 보고 어깨를 움츠린 세실리아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 * *
이튿날, 로위나는 익숙하게 상자를 열다 제 눈을 의심했다. 상자 안에 든 드레스와 모자, 구두를 신고 나오자 킬리언이 마차 문을 열었다.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발을 내딛는 대신 로위나는 제 옷차림을 눈으로 가리켰다.
“이게 뭐죠?”
“어색한가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다름 아닌, 그녀가 스무 살 때 수도에서 올라오던 날 입고 있던 옷이었다.
산골짜기 소녀 로위나 필로네에서 데본셔 공작의 정부로 탈바꿈하던 날, 그대로 그가 버린 줄 알았는데 바로 어제 입었던 옷 같았다.
감회가 새로운 한편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빚쟁이들에게 돈을 갚으려 전당포에 거의 모든 짐을 맡겼으나 쫓겨 다니는 와중에도 이 한 벌만큼은 남겼을 정도로 정말 좋아하던 옷이었다. 직접 키운 암탉의 달걀을 팔고 새끼 때부터 돌봐 온 염소의 우유를 팔아 마련한 옷이었으니까. 길거리를 헤매다 해어지고 찢겼을 텐데 수선을 했는지 멀쩡했고 신기하게도 몸매도 그때와 다를 게 없어 딱 맞았다.
“이게 왜 여기에.”
“보관해 놨습니다.”
로위나의 말을 끊은 킬리언이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대꾸했다. 미간을 좁힌 로위나가 추궁했다.
“……어째서?”
돌아온 질문에 킬리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음을 무시한 게 아니라 그 또한 어제까지만 해도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째서 그의 눈엔 그저 넝마로밖에 안 보이는 옷을 긴 시간 따로 보관해 왔는지. 그동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었으나 왜 이제 생각나 그녀에게 주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
“만약 스무 살의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게 할까.”
기차 안에서의 만남이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고생하는 로위나에게 바로 손을 내밀어 주고 천천히 다가갔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부질없고 쓸데없는 가정이었다. 원래의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가정이기도 했다.
“오늘은 이렇게 하기로 하죠.”
옅게 웃은 킬리언이 부드럽게 제안했다.
“우리는 오늘 두 번째 만남인 겁니다.”
“……두 번째.”
“기차에서 한눈에 반해 바로 다음 날 당신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거죠.”
이어진 말에 로위나의 등이 뻣뻣해졌다.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놀라움, 분노, 슬픔. 가장 큰 건 바로 그녀 또한 오랜 시간 가슴에 감춰 온 의문이었다.
만약 다르게 만났더라면, 다르게 관계를 만들었더라면.
스러진 그녀의 사랑과 별개로 몇 번이고 곱씹었던 의문이자 호기심이었다. 정적이 흐르고, 대답을 기다리는 킬리언을 향해 로위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킬리언이 정중하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발 받침을 디뎌 마차 안에 올라탔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엔 그 전과는 조금 다른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로위나는 창을 열고 빠르게 지나치는 거리와 행인을 바라봤다. 그대로 고급스러운 카페나 식당에 데려가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마차는 소박한 서민 거리에서 멈춰 섰다. 의아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로위나에게 마차 문을 연 킬리언이 손을 내밀었다.
“나가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가 보면 알아요.”
잠시 머뭇거리며 그의 손을 잡지 못하자 팔을 뻗은 킬리언이 오랜만에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주말을 맞아 한창 사람들이 북적이는 여관이었다. 숙박업 표시에 뺨을 붉힌 로위나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여기를 왜 데려온 거죠?”
홧홧해진 얼굴에 킬리언이 삐딱하게 입매를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네?”
“두 번째 만남인데 설마…….”
가늘어진 눈이 심술궂게 반짝였다. 기가 막힌 로위나가 뭐라 쏘아붙이려는 때였다. 여관 문이 덜컹 열리더니 에이프런을 입은 직원이 말을 걸었다.
“혹시 예약하셨나요?”
당황한 로위나가 아니라고 대꾸하려는데, 문득 열린 문틈으로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