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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92화 (92/120)

92화

갑작스러운 질문에 킬리언이 대답 대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로위나가 재촉했다.

“대답해요. 당신 입으로 한 말이니까.”

“기꺼이.”

간단명료한 대답이었으나 그 속에 든 의지는 확고했다. 새파란 눈을 조용히 마주한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고 싶네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킬리언이 뒤에 선 하녀에게 그녀의 시중을 들도록 눈짓했다. 그의 곁을 스치면서 로위나는 결심을 굳혔다.

* * *

다음 날 늦은 오후, 킬리언은 그녀의 호출을 받았다.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중정으로 나오자 로위나는 이미 느긋하게 앉아 화원을 감상하고 있었다.

“로위나.”

다가온 킬리언이 인기척을 내자 힐끔 그를 곁눈질한 로위나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제 많이 생각해 봤어요. 당신이 나에게 왜 이러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제 받은 충격은 아직도 선명했다. 백작 부인의 말은 모조리 사실이었다. 한 사람을 완전히 지워 내고 잊는다는 건 그 사람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았으나 그녀의 가슴 한편에는 아직도 스무 살 시절의 소녀가 존재했다.

첫사랑이었다. 비록 그것이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짓밟았으나 그래도 그녀의 짧은 생을 모조리 잡아 뒤흔들 만큼 강렬한 첫사랑이었다. 파편마저 모조리 휩쓸려 재만 남은 상태에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잔재를 지우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 모든 미련을 놓아야 했다. 가슴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저열함을 인정하고.

로위나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마주 앉은 킬리언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 다음 말을 재촉하지도, 눈치를 주지도 않은 채 그저 눈에 담는 것에 만족한다는 듯.

“난 당신과 다시 어떤 의미로든 엮이고 싶지 않아요.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내리깐 시선을 들어 올린 로위나가 드디어 다시 입을 열었다.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가 어떤 건지는 저번에 말했죠. 결국엔 버려지는 거라고도.”

“버려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정부이기도 하지. 난 최대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당신 발목을 붙잡을 거야.”

“내 옆에 누군가 있다고 해도?”

잠시 뜸을 들인 로위나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 ‘누군가’의 정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다시 로위나를 데려갈 거라고 통보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 킬리언의 눈빛이 사나워진 것도 잠시, 금세 송곳니를 감춘 그가 조용히 대꾸했다.

“상관없어. 그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껴 나를 버리려 할 때도 결국은 당신이 날 놓지 못하도록 만들 테니까.”

“발버둥을 치겠다는 말인가요?”

자신만만한 얼굴에 빙긋 웃은 로위나가 묻자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 해 봐요. 버려지기 싫으면.”

수긍의 대답이 돌아오기 무섭게 로위나가 들고 있던 홍차를 뒤집었다. 답지 않게 놀란 킬리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가왔으나 발이 젖었을 뿐 그녀의 표정은 태연했다.

변함없는 로위나의 표정과 멀쩡한 그녀의 피부를 확인한 킬리언이 뒤늦게 으르렁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당신 각오를 보고 싶어서요.”

놀람과 걱정, 그리고 분노로 빠르게 바뀌는 표정을 구경하듯 올려다본 로위나가 손수건을 발치에 던졌다.

“닦아 줘요. 무릎 꿇고.”

귀를 의심했는지 킬리언이 얼음처럼 굳었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아 앉은 로위나가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대앉았다. 나른하면서도 오만한 자세로 고쳐 앉은 그녀가 손수건을 다시 눈짓했다.

“역시 고결하신 자존심에 하찮은 여자 앞에 무릎 꿇는 건 힘드실까요, 저하?”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무리였나. 석고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킬리언에 로위나가 발등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우려는 때였다.

“내가 괜한 짓을 했네요. 그럼 방금 이야기는…….”

“고작 이런 건가?”

“뭐라고요?”

짧은 실소와 함께 무릎을 꿇은 킬리언이 그녀의 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그가 가볍게 한 손으로 발목을 쥐었다.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발을 치우려는 로위나를 진정시키듯 그녀의 발목에서부터 종아리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두 손으로 주무른 그가 느릿하게 그녀의 가터벨트를 풀었다. 압력에 그대로 눌리는 피부를 손톱으로 약하게 쓸어내리면서 실크 스타킹을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그리고 발목까지 벗겨 냈다.

그대로 발치의 손수건을 들고 식은 홍차를 닦아 내는가 싶었는데 전혀 상상도 못 한 결과가 돌아왔다. 로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쉿.”

이어진 행동에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대신, 제 재킷 안주머니에 넣은 킬리언이 혀로 그녀의 발등을 천천히 핥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뜨겁고 말캉한 감촉에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 척추를 타고 찌르르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그의 혀가 닿은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조심스레 한 손으로는 그녀의 발꿈치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릎 뒤를 받친 킬리언이 매끄러운 발등을 지나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종아리뼈에 입 맞췄다.

자잘한 입맞춤이 이어질 때마다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쥔 로위나가 숨을 참았다. 전신의 신경과 근육이 절로 제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아 다리를 핥는 남자에게 향했다. 내리깐 긴 속눈썹과 부드럽지만 힘이 들어간 손이 보였다.

“그, 그만…….”

긴장한 피부를 느낀 킬리언이 쓴맛이 도는 홍차의 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너무 놀란 나머지 무릎 위에서 파르르 떨리는 손이 보였다.

그 위에서 경악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로위나의 뺨은 창백했다. 숨이 부족하다 못해 질식할 정도였다.

“그만해요.”

놀란 나머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은 환청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묵은 숨을 토해 내듯 온 힘을 다해 말한 로위나가 뒤늦게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러나 힘이 빠져 미약한 저항이었다. 다시 내려와 꼼꼼히 그녀의 작은 발가락 위에도 하나하나 입을 맞춘 킬리언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하고 있잖아.”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어쨌건 홍차를 닦아 주는 거니까.”

목적이 같지 않냐는 듯 얄밉게 고개를 갸웃한 킬리언이 다시 그녀의 스타킹을 들었다. 빼앗듯 그의 손에서 그것을 낚아챈 로위나가 뺨을 붉히며 일어났다.

“분명히 말하는데, 이렇게 제멋대로에 심술궂은 정부는 필요 없어요!”

“아까 말했잖아. 버림받지 않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다 칠 거라고.”

그대로 등을 돌려 멀어지려는데 그녀의 어깨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꽉 끌어안지 못하고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싼 킬리언이 속삭였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건데.”

“…….”

“그래서, 당신이 본 내 각오는 어땠지?”

각오. 방금 그녀가 내뱉은 단어였다. 그의 손을 뿌리치려다 가만히 선 로위나가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좀 전엔 돌발적인 행동에 휩쓸려 버렸지만 그녀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됐다. 아무 미련도 남지 않을 만큼 그를 가지고 놀다 세드릭이 로렌의 약을 구해 돌아오는 순간, 가차 없이 킬리언을 버리리라는 결심.

“좋아요.”

몸을 돌린 로위나가 검지를 세워 그의 가슴을 눌렀다.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지만 당신 장단에 맞춰 주죠.”

“로위나.”

“대신.”

킬리언의 말을 끊은 로위나가 또박또박 조건을 붙였다.

“기한은 일주일이에요. 당신이 날 흔들지 못한다면, 그래서 내가 당신을 끝끝내 버린다면 그땐 받아들여요.”

“…….”

“그게 아니면 제안은 없던 걸로 해요. 기회도 사라지죠.”

꾹꾹 내리누르는 듯 흔들림 없는 말에 킬리언이 그녀를 안았던 손을 풀었다. 손등 위로 힘줄이 돋고 입매는 뻣뻣하게 굳었다.

정부로 받아 주는 대신 그녀가 버린다면 순순히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절대 안 된다고 맞받아치려는 순간, 그는 새카만 망망대해를 기약 없이 헤매던 때를 떠올렸다.

되찾는다면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게 꽁꽁 묶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을 작정이었다. 데미안을 인질로 삼아 적선하듯 한 달에 몇 번을 보여 주는 대가로 영원히 그의 여자로 살게끔 만들 생각이었는데.

떨어진 가면 위로 새파랗게 질려 그를 올려다보던 초록 눈동자를 보는 순간 모든 다짐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사라진 자리엔 그토록 외면하려 했던 진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차츰차츰 맹독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는 더 이상 눈앞의 여자를 함부로 대할 수도, 그의 입맛대로 휘두를 수도 없었다.

애원과 협박으로 이곳에 묶어놨으나 말을 섞는 건 물론이고 그를 마주 보려고도 하지 않는 로위나를 보는 건 그 또한 고역이었다.

분노와 기만일지언정 그를 똑바로 노려보는 지금의 그녀가 훨씬 나았다.

비록 그 일주일이 뜻하는 바를 그가 알고 있다 하더라도.

“……싫다면?”

“그럼 어쩔 수 없죠.”

어깃장을 부리듯 잇새로 새어 나온 대답에 어깨를 으쓱한 로위나가 손을 치웠다.

“다 없었던 일로…… 왜 이래요?”

다시 뒤돌아 멀어지려는 때,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힘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거 놔요!”

“좋아.”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는데 나직한 말이 그녀를 멈추게 만들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요.”

그녀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놓인 기회를 놓칠 생각도 없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를 다시 제게로 돌려놓는 거다.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뒷일은 뒤에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킬리언은 오랜만에 접한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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