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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91화 (91/120)

91화

“당신에게 다른 일을 소개해 줄 수도 있었지. 공장이나 하녀일 같은 것.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왜요?”

“당신을 가지고 싶었고, 난 마침 돈이 있으니까.”

“…….”

“그러니 날 원망해. 어린 당신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고 한 가지만을 보여 줬던 날 미워해.”

담담하지만 진솔한 고해였다.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침묵이 흐르고, 시선을 피한 로위나가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데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는 과거인 채 고이게 내버려 두고 앞으로 흘러가야 했다.

“난 더는 당신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모두 잊어버리고 새 출발 하고 싶어요.”

“그러기엔 당신이 품은 원망이 너무 깊잖아.”

“당신을 완전히 잊었다고 저번에…….”

“아니잖아.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건 잊은 게 아니야. 도망치는 거지.”

끝까지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로위나를 향해 킬리언이 속삭였다.

“난 당신에게 버림받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테니까, 당신은 그런 나를 보며 비웃고 가지고 놀면 돼.”

* * *

일주일이 순식간에 흘렀다. 세드릭이 무사히 에셀우드에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로위나는 걱정을 한시름 내려놓았다.

그러나 평화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했던 말이 진심이었는지 킬리언은 시시때때로 그녀의 일상에 파고들었다. 사흘에 한 번씩 갓 핀 꽃들을 그녀의 방에 장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매일 저녁 그녀를 식사에 초대했다.

낮에 세실리아와 밖을 나갈 때만이 그녀가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유일한 때였다.

“다리가 아프네요. 난 잠시 여기 앉아서 쉬어야겠어요.”

“그럴래요? 난 조금 더 걷고 올게요. 속이 답답해서.”

“그러세요. 전 시간이 늦어지면 먼저 갈게요.”

세실리아가 시중을 드는 하녀 한 명과 함께 카페테리아의 의자에 앉았다.

차양 아래에서 느긋하게 부채질하는 세실리아를 뒤로한 로위나가 다른 하녀 한 명과 함께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긴 때였다. 양산을 들고 호숫가를 산책하던 귀부인 한 명이 그녀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혹시…… 로위나?”

부르는 말에 엉겁결에 멈춰 선 로위나가 뒤를 돌았다. 동시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레이첼 백작 부인?”

“역시 맞았군요.”

반가움, 걱정 등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로위나를 본 백작 부인이 옅게 웃었다.

길가에 서서 대화하기엔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람이 드문 벤치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소문이요?”

“금발의 초록 눈을 가진 미녀가 데본셔 공작과 만난다는 이야기요.”

그게 그녀를 본 순간 깜짝 놀랐으나 이내 수긍한 이유였다. 도리어 놀란 로위나가 눈을 깜박이자 백작 부인이 이야기를 털어놨다.

“걱정 말아요. 에셀우드엔 아직 소문이 닿지 않았으니까. 나도 여기로 여행 온 뒤에야 들은 소문인걸요. 혹시나 싶었는데…….”

“백작 부인…….”

사교계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대해 주고 아껴 주었던 사람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그만큼 의지하기도 했다. 킬리언에게 벗어난 건 후회하지 않지만 그사이 더 늙어 버린 백작 부인의 얼굴을 보니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로위나의 손을 백작 부인이 꼭 잡았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군요. 그렇죠?”

대답 대신 로위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으로 폭탄 같은 말이 떨어졌다.

“혹시 같이 있었던 도련님이 당신 아들인가요?”

화들짝 놀란 로위나가 고개를 홱 들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전에 정처 없이 떨리는 동공으로 진실을 알아챈 백작 부인이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가엾어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사실을 안 건 어림짐작도, 뒷조사도 아닌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눈치와 직감이었다. 당황해 밀어내려 했으나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에 로위나는 몸의 힘을 풀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백작 부인이 부드럽게 안부를 물었다.

“늦었지만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이도 잘 있는 거죠?”

“네. 지금은 여기 없지만요.”

“여기 없다뇨?”

“그게…….”

비밀로 할까 싶은 갈등은 잠깐이었다. 이곳으로 도망칠 때 뒤를 봐주고 마무리를 해 줬던 외삼촌 제레미는 간간이 연락하고 있었지만, 요새 외국에서 차기작 집필과 강의를 준비하고 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로렌의 요청으로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벌써 두어 달 전이었다.

세드릭도 로렌의 약을 구하러 출국했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위나는 누군가에게 그녀의 상황을 털어놓고 위로와 조언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레이첼 백작 부인은 끝까지 그녀의 편에 서 주었던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실 수 있나요?”

결심한 로위나가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결연한 눈에 놀라 잠시 침묵하던 백작 부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굳힌 로위나가 따라온 하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먼저 들어가세요. 세실리아 양에게도 먼저 들어가시라 전하고.”

“예?”

“다시 말해야 하나요?”

“하지만…… 숙녀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위험한 게 아니라 감시할 수 없어서겠지. 세드릭과 결혼할 때는 세실리아의 도움으로 어떻게 떼어 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쓴웃음을 삼킨 로위나가 백작 부인 쪽으로 눈짓했다.

“오늘 저녁 초대를 받아서요.”

“누구신지 알고요.”

하녀의 말에 백작 부인의 시중을 들던 하녀가 끼어들었다.

“무례하군요. 이분은 레이첼 백작 부인이시고, 알디르 후작 부인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말조심하세요.”

강경한 반응에 잠시 어물거리던 하녀가 결국 터덜터덜 자리를 떠났다. 백작 부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죠.”

* * *

백작 부인의 숙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차를 탈 필요도 없이 공원을 빠져나오자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식사를 하며 처음 운을 떼는 게 어렵지,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술술 나왔다. 저녁 식사를 하며 로위나는 모든 걸 털어놨다.

킬리언과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버려졌었는지, 어떻게 재회해서 어떻게 도망쳤는지.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다시 붙잡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긴 이야기가 끝나자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진지하게 로위나의 이야기를 들은 백작 부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깊고 무거운 이야기였네요.”

“전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뭐가 문제에요?”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끝끝내 제 목줄을 잡아채니까요.”

“어차피 곧 도망칠 거잖아요. 아직 결혼반지는 없어도 이제 유부녀고요. 법은 당사자가 아닌 한, 공작 저하라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구구절절 들어맞는 소리였다. 가만히 백작 부인의 말을 듣던 로위나가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변한 그가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거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안에서 무언가가 끝나지 않았어요.”

“난 완전히 그를 지워 냈어요.”

발끈한 로위나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얼굴로 백작 부인이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요. 당신은 그러지 못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 자신도 아니잖아요.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쉽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난 살면서 여러 경우를 다 봐 왔으니까.”

흥분한 로위나의 말을 가차 없이 끊어 버린 백작 부인이 불쑥 충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로위나. 당신이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었으니 나도 말하죠. 내 남편에게 정부가 몇이라고 생각해요?”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놀란 숨을 들이켠 로위나가 백작 부인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사교계에서 금실 좋기로 유명한 부부였다.

“사생아는?”

“백작 부인…….”

얼어붙은 로위나를 안심시키듯 웃은 백작 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세 명이 되었을 때 세길 멈췄어요. 어차피 상속권은 내가 낳은 장자가 가져갈 테고 백작 부인이라는 내 견고한 자리는 유지될 테니까.”

말을 잊은 로위나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요?”

“마음속에서 완전히 그를 놓았으니까요.”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듯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로위나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빙긋 웃은 백작 부인이 말을 이어 나갔다.

“한 사람을 완전히 지운다는 건 그런 거예요. 그 사람이 뭘 하건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는 거죠. 분노도, 슬픔도, 심지어는 관심도.”

“전…….”

촌철살인의 말에 로위나가 말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옳았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오한과 함께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킬리언이 제게 매달리면서도 그토록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아직 그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건 영향을 미친다는 걸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생각에 잠긴 로위나를 향해 빽작 부인이 쐐기를 박아넣었다.

“가끔은 관점을 바꿔 보는 게 정답일 때도 있는 법이에요, 로위나. 당신을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 * *

백작 부인의 말은 많은 생각을 안겨 줬다. 로위나는 저택으로 돌아와서도 그녀의 제안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차가 현관에 도착하고 마부가 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오롯이 그 생각뿐이었다.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내밀어진 손을 잡고 내리는데 익숙한 체취가 그녀의 상념을 깨뜨렸다.

“로위나.”

“……저하.”

문을 열고 하인처럼 그녀를 에스코트한 이는 다름 아닌 킬리언이었다. 꽤 늦은 시간인데도 내내 기다렸는지 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제 손을 빼낸 로위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 말 진심인가요? 내 정부라도 되겠다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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