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하객도 격식도 없는 식이었기에 결혼은 빠르고 간단하게 진행됐다. 신랑 신부가 함께 낮은 제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제의 축복을 받고 맹세의 말을 나눈 다음, 마지막으로 혼인 신고서에 각자 사인을 하는 식이었다.
“그럼 두 사람의 혼인이 성립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마지막으로 로위나가 펜을 놓자 기다리던 사제가 엄숙한 얼굴로 통보했다.
“신랑, 신부에게 입 맞추세요.”
눈이 마주친 세드릭이 그녀의 이마와 양 뺨에 번갈아 키스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간지러워 몸을 물리던 로위나가 단단하게 어깨를 감싸는 손에 그대로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던 마지막 키스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생략됐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세드릭이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아직 날 이성으로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세드릭…….”
“이건 언젠가 당신이 날 진정으로 사랑할 때 하죠.”
대답 대신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를 볼 때 미친 듯이 심장이 뛰거나 입이 마르거나 떨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 있을 때면 넓은 느릅나무 밑에서 쉬는 것처럼 편안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어쩌면 시간이 흐른 뒤엔 다르게 변화될지도 모르는 감정이었다.
“그럼 나가 볼까요.”
빙긋 웃은 세드릭이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일어났다.
식이 끝난 건 거의 십여 분만이었다. 해는 여전히 화창했고 선선한 바람이 나무의 잎사귀를 흩어 놓고 가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렸다.
예배당을 나오자마자 로위나가 베일을 벗어 세드릭에게 건넸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세실리아가 절 찾을 테니까요.”
“로위나.”
바로 뒤돌아 멀어지려는 로위나를 붙잡은 세드릭이 덧붙였다.
“그녀에게는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다시 만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로위나를 만나려 했으나 공작에게 가로막혀 어쩔 수 없이 돌아가려던 날, 그를 불러 세운 건 다름 아닌 세실리아 루드빌이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로위나와 만나려 한다면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해 주었고, 덕분에 미행 없이 무사히 로위나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혼인 신고서는 오늘 내가 제출할게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다 멈춰 섰다. 그러더니 세드릭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세드릭. 이거. 데미안에게 전해 주세요.”
“편지군요.”
마음 같아선 껴안고 그 작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충격받을까 싶어 결혼을 비밀로 했기에 데려오지 않기로 합의했다. 세드릭이 데미안을 데려가는 건 혹시 킬리언이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데미안을 잘 부탁해요.”
“당연하죠. 이제 내 아들이기도 한걸요.”
진심을 담아 대답한 세드릭이 잠시 머뭇거리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뭔가를 꺼내려다가 마음을 다잡고는 미소 지었다.
“그럼 어서 가요.”
“네.”
방금 결혼한 사이 같지 않게 조금 어색하게 인사한 로위나가 뒤를 돌아 멀어졌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멀찍이 그들을 지켜보던 남자가 다가왔다. 세드릭이 뒤를 돌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마차를 준비했으니 바로 가시죠.”
* * *
로위나는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세실리아와 함께 의미 없이 백화점을 돌고 점심까지 마치고 나서야 저택으로 향했다.
결혼식을 할 때는 긴장했을 뿐 생각보다 차분했던 심장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몰래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로위나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평소처럼 자리를 비웠어야 할 킬리언이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로위나.”
“왜 여기 왔죠?”
“당신이 보고 싶어서.”
원래라면 뭐 잘못 먹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낯뜨거운 말을 내뱉은 킬리언이 성큼 다가왔다.
“어디 다녀왔습니까?”
“이미 알잖아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한 스스로를 다잡은 로위나가 제자리에서 떳떳하게 반문했다.
“세실리아 양과 함께 공원에 다녀왔어요.”
“단지 그뿐입니까?”
“왜 묻는 거죠?”
추궁하듯 이어진 질문에 날카롭게 대꾸하자 킬리언의 미간이 잠시 좁혀졌다.
“난 더 이상 당신 정부가 아니에요. 당신 소유가 아니니 적당히 해요.”
습관이 되어 버린 두려움을 꼭 참은 로위나가 그를 스쳐 지나 화장대에 앉았다. 목에 걸쳤던 목걸이를 빼고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었다. 태연하게 행동했으나 거울 너머로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에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말없이 로위나를 바라보던 킬리언이 천천히 벽난로 앞 카우치에 앉았다.
요염하게 드러났던 목덜미 위로 금사처럼 반짝이는 머리칼이 내려앉고, 비스크 인형처럼 하얗고 매끈한 피부 위로 화장 솜이 얹혔다.
천천히 화장을 지워 낸 로위나의 민낯은 청초하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지워 낸 로위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틀어 그를 바라봤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요?”
“당신이 날 봐줄 때까지.”
“그럼 지금 봐줬으니 나가면 되겠네요.”
“거짓말.”
비스듬히 웃은 킬리언이 천천히 일어나 로위나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평소의 차가운 온기와 달리 열기가 어린 체온에 놀란 로위나가 거울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굳은 것도 잠시, 손바닥에 배인 땀을 몰래 드레스 자락에 닦아 낸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용건이 뭐예요? 또 구애라고 하지는…….”
“당신이 한 말 생각해 봤는데.”
“……내가 한 말?”
“소중하다면 바닥을 기어 다니고, 비참해져도 좋은 거라는 말.”
손끝을 세운 킬리언이 은밀하게 긴장한 피부를 눌렀다.
“비참해지는 건 어렵겠지만, 당신 정부는 되어 줄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말이에요.”
혹시 오늘 일을 안 건가? 떨리는 숨을 삼킨 로위나가 반사적으로 입 안을 깨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야. 그 이상 나가면 나 또한 참기가 어렵겠지.”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었으나 싸한 한기가 그의 숨결이 미치는 정수리를 통해 척추를 찌르르 지났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한 로위나가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니 나가 줘요.”
“아니.”
단번에 거절한 킬리언이 그녀의 어깨를 눌렀던 두 손을 거뒀다.
“잠옷은 갈아입지 말아요.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게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아름다운 선율이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흘러들어 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로위나가 그가 내민 손을 무시하고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자 대여섯 명의 작은 악단이 꽃이 흐드러지게 핀 중정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곡이었다.
“선물입니다.”
멍하니 악단을 내려다보는 로위나의 뒤로 다가온 킬리언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감싸듯 난간을 짚었다.
가만히 연주를 듣던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다고 내가 흔들릴 거 같아요? 다시 당신에게 돌아가리라 생각해요?”
세드릭과 결혼한 걸 킬리언이 알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접었다. 만약 알았다면 중간에 세드릭을 쏴 죽여서라도 멈췄을 남자니까. 이렇게 평정을 유지한 채 행동할 리도 없었다. 따지는 말에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품 안의 로위나를 내려다보던 킬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왜 이런 일은 하는 건데요?”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였으나 이미 마음은 정해졌고, 그녀는 이제 정식으로 결혼한 몸이었다.
“연주는 고맙게 들었다고, 다시 돌아가라고 해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로위나를 껴안은 킬리언이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뭘 원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럼 뭔데요.”
“정부의 아양이라 생각해요.”
말문이 턱 막히는 대답이었다. 그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를 정부라 자칭하는 것도 그렇고 마치 매달리듯 차마 힘도 주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손도. 긴장한 듯 느릿한 목소리도.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려다 로위나는 올라간 어깨를 늘어뜨렸다.
낯설었다. 먼 외국에서 재회하고 난 뒤, 모든 게 낯설었다. 처음 얼마간은 예전의 그 오만한 인간 그대로라 생각했으나 요즘은 자신이 알던 킬리언 데본셔가 맞는지, 아니면 그와 똑같은 껍데기를 뒤집어쓴 또 다른 누군가인지 헷갈렸다.
“그거 알아요?”
“…….”
“정부는 마지막에 버려져요. 왜냐면 그저 일탈 상대이기 때문이죠. 장난감이고 놀이 상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까요.”
심장을 잘근잘근 밟는 듯한 목소리였다. 총구는 그를 향해 있었으나 한편으론 과거의 자신을 향해 있기도 했다. 대답 대신 파고들 듯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킬리언을 향해 로위나가 또렷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릴 때 나는 그걸 몰랐어요. 그리고 철이 없었죠. 당신의 집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고 당신의 돈으로 부귀를 누렸는데, 스스로를 당신의 정부가 아닌 연인이라 여겼으니까.”
“……로위나.”
“어떻게 보면 무지하고 세상 물정 몰랐던 내게도 원인이 있었던 거였죠. 순진한 것도 죄가 되는데 난 자기 주제도 모를 만큼 멍청했으니까.”
“내가 나쁜 놈이었던 거지, 당신 잘못이 아니었어.”
결국 듣다 못 한 킬리언이 고개를 들고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