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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89화 (89/120)

89화

“누님만은 초대하고 싶었는데 바깥바람을 쐬기엔 아직 좋지 않다고 의사가 그래서요. 더군다나 내일은 면회가 금지된 날이고…….”

“충분히 이해한단다. 그런데 여자에게 결혼식은 정말 중요한 날인데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해도 되는 거니?”

“지금은 제가 계속 조르고 졸라서 일단 약식으로 하는 거고, 나중에 정식으로 다시 치를 거예요. 하루도 기다리기 힘들어서요. 그때는 꼭 완치돼서 맨 앞자리에 앉아 주세요.”

“그래, 당연하지. 너무 기쁘다.”

로렌의 눈시울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데미안은? 이 사실을 아니?”

“아직이요. 충격받을까 봐 일단은 비밀로 하려고요.”

주름진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준 세드릭이 친애의 의미로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인사를 끝으로 뒤를 돈 세드릭이 병실을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데미안이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 공원 가는 거지?”

“응.”

“신난다! 여기 와서 제대로 나가 본 적 없어.”

가슴을 찌르는 말에 멈춰 선 세드릭이 무릎을 접어 앉았다. 어리둥절한 두 눈과 마주한 그가 작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다. 데미안.”

“뭐가?”

“어른들 사정에 네가 휘둘리는 거.”

“그거야 이미 통달했는걸.”

“……그런 어려운 단어도 알아?”

“이래 봬도 나 소설가의 아들이야.”

에헴, 하며 두 손을 허리춤에 얹은 데미안이 장난스레 코를 높이 치켜올렸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 세드릭이 데미안을 가볍게 끌어안고 일어섰다. 이윽고 두 사람이 탄 마차가 공원을 향해 멀어졌다. 작아지는 마차를 지켜보던 어두운 그림자가 스르르 사라졌다.

* * *

세드릭이 공원으로 향한 건 내일 있을 식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공원 기슭의 작은 예배당을 골라 대여했다. 대개 허락받지 못한 젊은 연인이 식을 올리는 장소로, 물어물어 찾아낸 성직자 또한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예배당의 문을 열자 나이 지긋한 남자가 그들을 반겼다.

“세드릭 고드웰 씨?”

“맞습니다. 신부님.”

옅게 웃은 세드릭이 사제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의 손을 잡아 손등에 이마를 댔다.

“식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멀거니 두 사람을 보는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린 세드릭이 잠시 몸을 숙였다.

“데미안. 잠시 주변에서 놀고 있을래?”

“왜?”

“잠시 신부님과 나눌 이야기가 있거든. 잠깐이면 되니까 이 주변에서 가져온 공이라도 차고 있어. 멀리 가면 안 돼. 알았지?”

“응!”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근질거리는 몸을 풀 듯 쌩하니 예배당을 나갔다. 창문 너머로 근처에 머무는 모습을 확인한 세드릭이 신부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내일 있을 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데미안이 찬 공이 수풀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멀리 가지 말랬는데…… 괜찮겠지?”

잠시 고민하던 데미안이 천천히 수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지에서 나와 나무가 무성한 그늘로 발을 내딛는 순간, 어둠 속에서 기회를 노리던 그림자가 눈을 번뜩였다. 그림자가 아이를 향해 손을 뻗는 때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데미안이 불현듯 멈춰서 뒤를 돌았다. 그리고 멀찍이 선 남자를 보곤 눈을 비볐다.

“……유령……, 아저씨?”

“데미안.”

“어떻게 여기에…….”

“데미안.”

오직 한 단어만 할 수 있는 듯 이름만 반복해서 부르던 킬리언이 성큼 다가와 가만히 서 있는 데미안을 품에 안고 들어 올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긴 데미안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아, 아저씨?”

“데미안…….”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은 킬리언이 작고 따뜻한 아이의 체온을 만끽했다. 자기보다 한참 큰 어른이 마치 매달리는 것처럼 자신을 껴안자 데미안은 잠시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숨이 막히고 답답했지만 왠지 당장 밀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

진심을 다해 토해 낸 말에 어쩐지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아저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껴진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애틋함이었다. 그전에는 이 감정이 뭔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데미안은 조용히 안겨 울음을 참았다.

“어디 아픈 곳은? 다친 데는?”

한참 후에야 데미안을 놓아준 킬리언이 저와 똑 닮은 얼굴을 몇 번이고 손으로 쓸었다.

배가 뒤집혀 로위나와 데미안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들에게 미안하게도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건 오롯이 로위나뿐이었다.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늘 하나를 찾기 위해 망망대해를 헤매고 다니는 미친 사람처럼 바다를 누볐다.

그렇게 반쯤 미쳐 잊고 있던 아들을 다시 보자 미안함과 동시에 훌쩍 자란 데미안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의 하나뿐인 자식. 단 하나뿐인 아들. 로위나가 낳아 준 그의 보물.

“없어요……, 아저씨는요? 얼굴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이목구비는 그대로였지만 살이 빠진 듯 한층 초췌해진 얼굴에 데미안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혹시 어디 아파요? 로렌 아줌마처럼?”

“……난 유령인데 아플 리가.”

피식 웃은 킬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데미안이 불쑥 물었다.

“아저씨, 유령 아니죠?”

“…….”

“혹시…….”

말끝이 떨렸다. 왼 가슴에 손을 얹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멀찍이 데미안을 부르는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돌아가야 하나, 하지만 아저씨는? 갈팡질팡하는 데미안의 뺨을 커다란 손이 매만졌다.

“돌아가.”

“아저씨는요?”

“데리러 올게. 지금은 아니야.”

제 아이였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가슴 안에선 살기가 들끓고 있었다.

감히 데미안의 이름을 부르는 건 얼마 전 로위나의 곁에 있겠다던 남자였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이젠 데미안마저 제 아들인 양 서슴없이 부르는 모습에 당장이라도 총을 빼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순진하게 올려다보는 눈망울 앞에선 아니었다.

분노는 앞으로의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가 하려는 건 흔적도 없이 무너진 폐허 속에서 다시 차근차근 뼈대를 잡고 집을 짓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아저씨……?”

킬리언이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데미안을 찾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째서인지 두 사람을 마주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에 데미안이 다시 킬리언을 불렀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에 옅게 입꼬리를 올린 킬리언이 아들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이게 뭐예요?”

“펜던트.”

고개를 갸웃한 데미안이 천천히 펜던트를 열었다. 동시에 보인 작은 초상화에 입을 벌렸다.

“이건…….”

겉으로는 평범한 모양이지만 후계자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였다. 성인이 되기 전 선대의 어릴 때 초상화를 몸에 지니면 무사할 수 있다는 오래된 미신에서 시작된.

새카만 흑발에 새파란 눈동자. 단정한 이목구비에 무표정한 얼굴.

자신과 똑 닮았지만 전혀 분위기가 다른 소년에 의아해하던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들의 얼굴을 눈에 아로새기듯 일 분 일 초까지 데미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킬리언이 나직이 설명했다.

“나중에 전부 말해 줄게.”

“…….”

대답 대신 소중하게 펜던트를 외투 주머니에 넣은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흑발을 쓰다듬은 킬리언이 조심스레 데미안의 등을 밀었다. 엉거주춤 떠밀려 몇 걸음 나가자 한참 데미안을 찾고 있던 세드릭이 뛰듯이 다가왔다.

“데미안! 찾았잖아. 멀리 가지 말라고 했는데.”

“미안……, 공이 멀리 가서…….”

쭈뼛대며 데미안이 등을 돌렸지만 언제 누가 서 있었냐는 듯 아무도 없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텅 빈 숲을 바라보는데 세드릭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 여기 있는데 무슨 소리야?”

“뭐? 분명 저기로…….”

마찬가지로 놀란 데미안이 다시 뒤를 돌자 세드릭의 손에 공이 들려 있었다.

“아니야. 저기로 굴러갔단 말이야.”

“그럼 여기 쓰여 있는 이름은 누구 건데.”

“뭐?”

세드릭이 가리킨 공에는 확실히 삐뚤빼뚤한 글씨로 데미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상하다…….”

유령 아저씨가 그사이 공을 세드릭 형에게 주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굳은 데미안의 얼굴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세드릭이 말랑한 뺨을 길게 늘였다.

“이상하긴 뭐가. 뭔가 착각한 모양이지. 이제 가자.”

“으응.”

* * *

세드릭이 말한 날은 금방 다가왔다. 암묵적으로 협력하게 된 세실리아와 함께 로위나는 긴장된 얼굴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려 공원 안쪽으로 어느 정도 들어가자 로위나는 세실리아의 팔짱을 풀었다.

“잠시 혼자 공원을 둘러봐도 될까요?”

“어머, 왜요?”

“그냥 조용히 혼자 걷고 싶어서요.”

마침 사람도 없는 데다 날씨도 좋았다. 로위나의 뜬금없는 부탁에 잠시 고민하듯 말이 없던 세실리아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나도 마침 볼일이 있으니 한 사십 분 후에 약속 장소에서 보죠.”

“네. 그렇게 해요.”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돌린 로위나가 빠른 걸음으로 기슭을 향했다. 오솔길 옆으로 빼곡하게 자리한 나무 때문에 길을 헤맨 것도 잠시,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낡은 예배당이 눈에 들어왔다.

백금발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단정한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세드릭이 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드릭!”

“로위나.”

뛰듯이 다가가자 상기된 얼굴의 세드릭이 그녀를 반겼다.

“늦진 않았죠? 생각보다 마차가 느려서.”

“괜찮아요.”

“사제님은요?”

“안에 계세요.”

“그럼 어서…….”

“로위나.”

당장이라도 예배당 문을 열려는 기세에 로위나의 손을 붙잡은 세드릭이 그녀의 머리 위로 무언가를 씌웠다. 하얗고 투명한 신부의 베일이었다.

“당장은 이렇게밖에 못하지만…….”

“…….”

“나중엔 웨딩드레스를 입고 정식으로 식을 치러요.”

사르륵, 베일을 걷어 올린 세드릭이 놀라 굳은 로위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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