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로위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다채로운 꽃향기였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니 방 안 곳곳에 만개한 꽃이 화병에 꽂혀 있었다.
놀라서 눈만 크게 뜬 로위나에게 마지막 화병을 창가에 두고 있던 하녀가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잘 주무셨나요?”
“이게 대체 뭐죠?”
“아, 이 꽃은 중정 화단에 있던 꽃과 같은 꽃이랍니다. 예쁘죠?”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에요. 누가…….”
“아.”
화사하게 웃은 하녀가 대답했다.
“별채의 손님이요.”
“네?”
“손님께서 좋아하는 꽃이라고 전부 심어 놓았던 건데 모르셨어요?”
되돌아온 질문에 말문이 막힌 로위나가 로브를 걸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활짝 열자 얼마 전 완성된 화단이 그녀를 반겼다. 아찔한 향기가 후각과 동시에 시각을 사로잡았다.
하늘거리는 나비들과 높고 새파란 하늘, 펼쳐진 화원까지. 그야말로 꽃밭에서 잠들어 꽃밭에서 일어난 느낌이었다. 마치 어젯밤의 일은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꿈이었던가? 아니. 아니야. 되돌아가는 길에 가 본 적 없는 갈림길로 가니 밖으로 향하는 뒷문과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을 가다듬은 로위나가 다시 창문을 닫으려는 때였다.
중정의 티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앉아 한적하게 늦은 브런치를 즐기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로위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킬리언?”
작은 혼잣말이었는데 그걸 들었는지 남자가 돌아봤다.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바쁘다 못해 몸이 두 개라도 아쉬울 사람 아닌가. 얼어붙은 로위나를 향해 그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려와.
혹시 어제 그의 방을 찾은 걸 들켰나 싶었으나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잔뜩 불편한 얼굴로 마주 앉은 로위나를 향해 킬리언이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로위나는 하녀가 할 일을 대신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남의 시중을 받는 덴 익숙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한 적 없는 남자였다.
이상하다 못해 기괴한 모습에 그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뭐 잘못 드셨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이러시는 거요. 이 화원이나 방의 꽃들도 그렇고.”
“그러면 안 되나?”
“……네?”
찻잔을 기울이던 킬리언이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난 당신에게 구애하는 중이야. 잘 보여서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게 뭐가 잘못됐나?”
구애. 환심.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놀란 로위나가 잠시 숨을 골랐다.
“잘못됐어요. 이래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 이 상황만 해도 그래요. 날 억지로 이곳에 가둬 두고 뭐 하는 거예요? 왜 저하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죠?”
숨을 최대한 참아 가며 말했지만 격양된 말끝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날 부르지 마.”
스콘에 잼을 바른 킬리언이 그녀의 입가에 그것을 내밀었다. 로위나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무안하게 다시 그릇에 내려놓은 킬리언이 두 손을 깍지 껴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난 당신을 원해. 당신이 내 곁에 있으면 좋겠어.”
“……용서해 달라고 했잖아요. 날 먼저 자유롭게 해 주고 용서를 비는 건 어때요?”
“물론 용서도 빌 거야. 그러니 내게 기회를 줘.”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뭐예요? 대체 뭐 때문에 내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죠?”
직설적인 물음에 새파란 눈동자가 지긋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어진 침묵에 숨이 막힐 것 같을 즈음 그가 대답했다.
“당신이 소중하니까.”
로위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모습에 킬리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한 적은 있으나 단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제 감정을 제대로 입 밖에 꺼낸 적은 없었다.
“…….”
“……로위나.”
돌아온 침묵이 낯설고 초조했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묵묵부답인 상대에게 뭐라 다시 말하려는데, 나직한 웃음이 귀에 파고들었다.
“하하.”
허탈하고 어이가 없다는 웃음소리였다. 얼어붙은 킬리언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로위나가 진저리를 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해요. 아직 기만할 게 더 남았나요?”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해.”
로위나는 몰래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수란스러운 마음이 싫었다. 전부 정리했는데도 예기치 않게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동요시키는 게 싫었다. 어젯밤이 떠오르려는 순간, 로위나는 고개를 저어 기억을 지워 냈다.
“당신이 소중하다는 게 뭔지는 알아요? 절대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여기 있는 거지.”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군요.”
로위나가 코웃음 치는 사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조용히 일어난 킬리언이 테이블 양옆을 짚고는 숨결이 닿을 정도로 상체를 숙였다.
“난 거짓말쟁이가 맞아. 로위나.”
등줄기가 뻣뻣해진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뒤쫓을 것 같은 눈으로 킬리언이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 목숨이라도 걸지.”
“…….”
“난 당신을 다른 여자에 비추어 본 적 없어. 당신은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으니까.”
이전 아내도, 죽은 태중 약혼녀도 전부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반박하려다 로위나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태중 약혼녀의 이야기를 전해 준 건 다름 아닌 죽은 서섹스 남작이었다. 그는 그녀를 음해하고 내쫓기게 만든 주모자였다.
눈을 내리깐 로위나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초상화는 다름 아닌 그녀의 초상화였다. 지금 마음이 수란스러운 건 처음 깨달은 그 사실에 혼란스러워서였다.
그뿐이었다. 생각보다 그가 그녀를 그리워했고 잊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에. 어쩌면 킬리언이 그녀에게 조금쯤은 진심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힌 로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나 덧붙이죠.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건, 사랑한다는 건 비참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
“그 사람을 위해 바닥을 기어도 괜찮고 진창을 뒹굴어도 상관없는 거예요.”
테이블을 짚은 손에 힘줄이 올라왔다. 그것을 흘깃 곁눈질한 로위나가 차분하게 결론 내렸다.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하늘 위에 있네요. 늘 그래 왔듯 높은 자리에서 오만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어요. 마치.”
“마치?”
“아끼는 애완동물을 보는 것처럼.”
또 같은 표정이었다. 어젯밤 오페라 극장에서처럼. 경직된 얼굴. 굳게 다물린 입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반응. 마치 치명상을 입었지만 죽을 때까지 티 내지 않으려 하는 자존심 센 얼굴.
그대로 뒤를 돌아 멀어지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지?”
내가 어떻게 해야 용서하고 다시 봐줄 거지? 문득 그렇게 애원하는 것 같아 로위나는 멈춰 섰다.
“글쎄요.”
마음속 바다가 미약하게 잔물결이 일었다 다시 잔잔해졌다. 짓궂은 심술이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움직였다.
“로위나.”
“이번엔 당신이 내 정부라도 돼 보실래요?”
쏟아지던 경멸과 비웃음. 찬사 뒤에 쏟아진 오물 같은 모욕. 선택지가 없어 잡은 손이었으나 그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외면하고 무시하던 시선을 떠올리자 겨우 끌어올린 입꼬리가 경직됐다. 선택의 대가였으니 당연히 치러야 할 형벌이었으나 그런 모욕을 받게 내버려 둔 건 바로 이 남자였다.
목줄에 메인 채 개처럼 끌려다니던 날들이었다. 오롯이 그녀 쪽에서 매달리며 간구하던 나날들. 로위나는 애써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입술을 달싹였다.
“…….”
“그러면 아마 당신 진심을 믿을 수도 있겠네요.”
대답 대신 킬리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요요히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감정에 로위나는 더 상대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 * *
로렌에게 꽃다발을 안겨 준 데미안이 활짝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 빨리 나으세요! 형이랑 또 올게요.”
“그래. 와 줘서 고맙구나.”
빙긋 웃은 로렌이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은 잠시였다. 세드릭이 잠시 데미안을 먼저 병실에서 내보내자마자 로렌의 표정은 휙 변했다.
“세드릭.”
미안함, 죄책감, 걱정. 세 가지가 뒤얽힌 눈빛으로 그녀가 다독이듯 말했다.
“나 때문에 그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돼.”
“누님.”
“잘은 모르지만, 로위나가 안 좋은 상황에 처한 거지?”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지금 따로 온 것도 그렇고, 다른 길이라면 모를까 데미안을 다시 그곳으로 데려간다니.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고서야…….”
“누님.”
힘 있게 로렌을 부른 세드릭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로위나는 지금 세실리아 양의 수업 때문에 바빠서 같이 못 온 거예요. 데미안이 저와 같이 에셀우드로 가는 건 그저 여행을 좋아해서고요. 혹시 바다를 무서워하거나 가고 싶지 않아 한다면 억지로 데려가지 않겠죠.”
“세드릭…….”
“정말이에요. 누님. 날 믿어요.”
“……알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로렌이 밭은기침을 토해 냈다. 사색이 된 세드릭이 의사를 부르려는데 로렌이 그를 붙잡았다.
“괜찮아. 이 정도 기침이야 늘 있었어. 그보다 내게 한 가지 더 할 말이 있지 않니?”
예리한 질문이었다. 정곡을 찔려 잠시 머뭇거리던 세드릭이 본론을 꺼냈다.
“한 가지 전해 드릴 희소식이 있어요.”
“말해.”
“내일 로위나와 식을 올려요. 하객도 웨딩드레스도 턱시도도 없는 결혼식이지만요.”
“역시 그랬구나.”
화색이 된 로렌이 기침으로 힘겨운 와중에서도 밝게 웃었다. 그 모습에 세드릭 또한 미소를 띠었다.
“예상하셨어요?”
“어쩐지 그럴 거 같다고 생각했거든. 저번에 봤을 때 로위나가…….”
늘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세드릭에 대해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했을 때 희망을 엿봤다. 막냇동생이 혹시나 기세등등해질까 싶어 다음 말을 꾹 삼킨 로렌이 세드릭의 뺨을 매만졌다.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손길을 받은 세드릭이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