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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87화 (87/120)

87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농담이 아니에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러니까 설명해요.”

“누님과 똑같은 증상을 앓다가 완치된 사람이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었다. 반가운 소식에 눈물이 핑 돈 로위나가 입을 가렸다.

“정말이에요?”

“네. 중요한 건 그다음인데.”

뜸을 들인 채 경계하듯 주변을 살핀 세드릭이 뒤이어 말을 끝맺었다.

“그 사람이 에셀우드에 있다고 해요. 난 준비되는 대로 떠날 거고요. 데미안도 같이 갈 거예요.”

“정말 잘됐네요! 오, 감사합니다.”

기도하듯 두 손을 꼭 잡은 로위나가 하늘을 한번 쳐다봤다.

“그런데 그것과 결혼이 무슨 상관이에요?”

“최근 늘어난 밀거래를 명목으로 현재 크로티아 인들은 모두 에셀우드에 입국할 수 없어요. 위조 신분증도 철저하게 검사하고요. 하지만 결혼 확인증이 있으면, 그리고 내가 귀화하겠다는 증명서만 있으면 출입국은 허용해 줄 거에요.”

요컨대, 상황이 이전과 반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로위나가 아니라 세드릭이 그녀의 국적을 얻기 위해 결혼이 필요했다.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요. 그럴만한 시간도.”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알아요. 감시가 붙겠죠.”

로위나의 말허리를 끊은 세드릭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오늘은 없네요.”

“아.”

뒤늦은 깨달음에 로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사실이었다. 저택 안에서, 그리고 병원에 갔을 때 따라붙던 시선이 없었다. 세실리아와 동행을 해서였다. 동시에 세실리아의 묘한 말이 떠올랐다.

“혹시 오늘 내가 여기로 올 줄 알았나요?”

“네. 루드빌 저택에 눈과 귀가 한 명 생겼거든요. 오히려 희망이 생겼다고 한 이유가 그거에요.”

말하는 게 세실리아는 아닌 것 같았다. 초록색 눈동자가 이채를 띄자마자 세드릭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나저나 청혼이 초라해서 미안해요. 찬다 해도 할 말이 없네요.”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로렌이 완치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당장 세드릭이 남편이 되고 그녀가 아내가 된다는 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로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이 로위나의 머릿속을 강렬하게 지배했다.

“고마워요. 로위나.”

“고맙긴요.”

나직한 인사에 그녀가 옅게 웃는 때였다. 멀리서 로위나를 부르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세드릭이 마지막으로 로위나의 이마에 입 맞췄다.

“나흘 뒤 이곳, 지금 이 시간에 봐요. 신부님은 내가 데려올 테니까.”

* * *

행운은 뜻밖의 순간,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세드릭이 빠른 걸음으로 가제보를 벗어나고, 세실리아의 손에 이끌려 루드빌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로위나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세드릭이 로렌의 치료법을 알게 되고 로렌이 완치한다면 그녀는 더 이상 킬리언에게 억지로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찾지 못하게 증발하고 말리라.

“세실리아, 루드빌 저택은 오래된 저택인가요?”

덜컹이는 마차 안에서 빗소리만 듣고 있던 세실리아가 로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아버지가 저택을 사실 때, 그 주인이 본채가 지어진 건 백 년이 넘었다 했대요. 그에 비해 별채가 생긴 건 십여 년 전이고요. 그 뒤로 계속 개축하며 쓰고 있죠.”

백 년이 넘은 저택. 그때는 한동안 이 나라에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을 때였다. 그렇다면. 무언가 번뜩이며 로위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오래되고 역사가 있는 저택이면…… 곳곳에 숨겨진 통로라던가 방이 있겠네요?”

“음. 지하로 향하는 통로는 몇 개 알기는 하지만 그건 심부름꾼 꼬마까지 다 아는 거라서요.”

수긍의 대답에 로위나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택에서 일하는 작은 아이까지 다 아는 통로는 이용하기 어렵겠지만, 다른 통로도 분명 있을 터였다.

“오늘 비가 많이 와서 아쉬웠어요. 조만간 한 번 더 가는 건 어때요?”

“그래요. 같이 가요.”

고개를 끄덕인 세실리아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비가 와서인지 날씨가 우중충했다. 저택으로 돌아올 즈음엔 먹구름 때문에 주변이 전부 어둑할 정도였다.

로위나는 늦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고용인들마저 모두 잠에 들 시간에 통로를 찾기 위해 방 곳곳을 탐색했다. 벽난로도 밀어보고 책장 또한 책을 다 빼봤지만 이렇다 할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통로를 찾아놔야 나중에 도망치기 유용한데.”

이제 시작이었지만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 숄을 걸친 로위나가 한 손에 램프를 들고 방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에서 일일이 걸린 액자들을 하나둘 들어 벽을 봤다. 하지만 넓은 저택 안을 몇 시간이고 샅샅이 뒤져봐도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만 가득 묻은 채 마지막 복도까지 뒤진 로위나가 벽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무언가가 튀어나온 게 등에 느껴졌다.

“뭐지?”

뒤엔 커다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숨죽인 로위나가 조심스레 태피스트리를 젖혔다. 손으로 더듬더듬 찾아내는데, 벽면 안쪽으로 손잡이 하나가 만져졌다. 심호흡한 로위나가 그것을 잡고 열자 음산한 소리와 함께 작은 통로가 열렸다.

“이건…….”

순간 오래된 퀴퀴한 냄새가 훅 끼쳤다.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됐는지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한 좁은 통로였다. 먼지를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로위나가 천천히 통로에 들어섰다. 여자가 몸을 최대한 웅크려서야 움직일 법한 좁은 통로는 십여 분 정도 따라 들어가자 두 개의 갈래 길로 이어졌다. 잠시 고민하던 로위나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뒤로 한참을 더 깊이 들어가 막다른 길에 도달하자, 통로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안쪽에 문고리가 있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인 로위나가 문을 열고 나오자 푹신한 카페트가 발에 밟혔다. 복도에 깔린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푹신한 종류였다. 더듬더듬 벽을 따라 걷던 로위나의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졌다.

주변을 훑던 로위나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동시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침실이었다. 거대한 침대 위에서 누군가 자고 있었다. 팔꿈치를 들어 최대한 소리를 죽인 로위나가 조심조심 침대로 다가갔다. 천천히 이불을 끌어 내리는데 자고 있던 방 주인이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심장이 멎을 것처럼 놀란 것도 잠시, 보이는 얼굴에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킬리언……?”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찾은 통로가, 아이러니하게도 별채의 그의 침실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충격받아 고개를 가로젓는데, 문득 발꿈치에 무언가가 닿았다. 천천히 뒤를 돈 로위나가 그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굳었다.

“……이건.”

젊은 여자의 초상화였다. 금발에 초록 눈. 언뜻 보자 죽은 태중 약혼녀의 초상화 같았다. 그런가 보다 하며 시선을 돌리려는데 액자가 툭 카페트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초상화 속 여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로위나 데본셔 공작 부인.

초상화 속 인물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연이은 충격에 숨을 크게 들이킨 로위나가 다시 열린 통로 쪽으로 가려는데,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가로챘다.

“…….”

“……로위나.”

쇳소리가 섞인 거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당신이군. 그렇지?”

“…….”

녹슨 경첩처럼 삐거덕거리며 로위나가 뒤를 돌았다. 맹수 바로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몸이 떨리고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마주한 얼굴은 태연했다. 놀란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없었다. 이어진 말에 로위나는 잔뜩 올라간 어깨를 늘어뜨렸다.

“돌아올 줄 알았어. 죽었을 리 없지.”

킬리언은 꿈결이었다. 그녀 또한 환각이라고 보고 있었다.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는 건 오히려 악효과였다.

“맞아요. 나 안 죽었어요.”

대답을 바라는 듯한 침묵에 조용히 운을 뗀 로위나가 그의 손을 가만히 내렸다. 그러나 힘이 조금 빠졌을 뿐 커다란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상하게도 데미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잠이 오지 않을 때 곁에 누우면 자겠다며 투정을 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늦은 밤이었다. 머지않아 그녀는 이 남자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거고, 그럼 데미안도 그녀도 다시는 그를 볼 일 없었다. 생각을 다잡는 사이,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정말 안 죽었나? 살아 있는 건가?”

“살아 있어요……. 그러니 더 자요.”

“로위나.”

심장을 쥐어 짜내듯 애틋한 목소리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말끝을 로위나는 애써 외면했다.

“난 가봐야 해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뭐가요.”

“전부. 전부 다.”

이전과 같은 말이었으나 억양도 그 의미도 달랐다. 로위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떼어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남자인데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에 떠는 어린아이 같았다. 제 아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매달리는 모습에 차마 매정하게 굴 수 없었다.

어차피 머지않았으니까. 마음을 가다듬은 로위나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땀으로 젖은 단정한 이마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내려 그의 손을 감겼다.

“알았으니 그만 자요. 늦었어요.”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

“…….”

“바다에 몇 시간이고 있었지.”

“……왜요.”

“당신이 날 끌어당길 줄 알았으니까.”

떨리는 손이 축축했다. 로위나는 그 감각을 부정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조용히 손을 거뒀다.

머지않아 고른 숨소리만이 침실을 메웠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통로를 통해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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