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공연은 공교롭게도 육 년여 전과 똑같은 프리마돈나가 주인공이었다. 좌중과 무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박스 석에 앉은 두 사람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반대편 박스 석에선 아예 오페라글라스로 공연을 보는 척 그들을 흘깃흘깃 보고 있었다.
한때는 익숙했던, 이제는 낯설어진 시선이었다. 로위나는 무표정하게 무대를 관람했다.
2막에 접어든 막이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수많은 관객 앞에서 아리아를 열창하던 프리마돈나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증오가 절절히 배인 목소리로 노래를 끝맺었다.
“내 분노가 하늘을 뚫고 파도가 뒤엎듯 내 업화가 몰아치니 내 사랑을 살해한 그대들, 무사하지 못할지어다!”
저주가 끝나자마자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의 타악기가 웅장하고 긴장감 어린 음악으로 극을 몰아쳐 나갔다. 심벌즈, 호른, 오보에가 우르르쾅 내리꽂히는 벼락을 구현하자 몇몇 여자 관객들이 깜짝 놀라 혼절했다. 로위나 또한 갑자기 낙뢰가 내리치는 소리에 놀라 눈을 꼭 감았다.
“로위나.”
흐트러진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 차가운 손이 진정시키듯 귓바퀴를 가볍게 매만졌다. 뱀처럼 차가운 온기에 로위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괜찮아요.”
손을 내린 킬리언이 뭐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이곳에 올 때까지 물어보는 말에 대답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여자였다. 상황이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그의 눈치를 보았던 로위나는 이제 더는 그의 기분을 살피거나 심기를 맞춰주지 않았다. 마주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여자를 보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 시선 끝에 누가 있을지 생각하는 건 그보다 더 힘들었다. 극에만 온전히 집중한 로위나와 달리 그녀의 옆모습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사이 극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광기에 사무쳐 몸을 떨던 프리마돈나가 결혼식 날, 제 연인을 살해한 신랑을 칼로 찔렀다. 연출된 피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물들이고 시체가 된 신랑과 경악한 양측 가족과 하객들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미쳐버린 신부가 피로 새빨개진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유명 극작가와 정상급 여배우가 합작한 극의 초연이었다. 충격적인 장면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 관객들이 말없이 극장을 나갔다.
“나가지.”
일대의 소란이 한창 공연 중인 극장에 몰아닥치는 가운데, 창백해진 로위나를 본 킬리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로위나는 좀 전과 마찬가지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계속 보고 싶어요.”
“불쾌하지 않습니까?”
“불쾌한 건 당신이겠죠.”
킬리언은 무슨 말이냐는 말 대신 굳게 다물린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입술이 열렸다.
“세드릭은 왜 부른 거죠?”
“…….”
“그에게 무슨 짓을 했죠? 다치게 했나요?”
식사 때도 지금도 로위나는 당장이라도 따져 물으려던 걸 참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오늘 로렌은 세드릭이 어디 아프거나 다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놀랐을 뿐 걱정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별일 없었다 한들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킬리언은, 데본셔 공작은 몇 마디 말로 사람을 밑바닥까지 처박는 남자였다.
“병문안을 갔다 했으면서 그자와 만났나?”
“아닌 걸 알잖아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자가 그렇게 소중한가? 떨리는 눈 밑을 보며 킬리언이 입술을 뒤틀었다.
“해쳤다고 하면?”
“그럼 난 루드빌 저택을 나올 거에요. 그리고 두 번 다시 당신과 이렇게 만나지 않을 거고요.”
자극하지 않으려 했으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녀 또한 지킬 필요 없었다. 고집스럽게 시선을 외면하던 로위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눈이 마주친 순간, 킬리언은 내려앉는 심장을 느꼈다. 한 치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얼굴이었다. 더불어 그녀를 잃었을 때 처음 느꼈던 오한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이 목을 조르고 온몸을 꽁꽁 옭아맸다.
미친 듯이 바다를 헤매고 텅 빈 지하 영묘에서 그녀의 관에 누워있던 때를 떠올렸다. 영원할 것 같은 적막, 싸늘한 어둠과 목을 조르던 상실감. 지독한 무기력.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데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졌다.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다른 남자를 입에 올리는 여자의 어깨를 붙들고 추궁하고 싶었다.
정말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가짜 부부행세를 했을 뿐인가? 정말 그게 다인가?
어젯밤, 맹렬하게 그에게 덤벼들던 세드릭 고드웰이 기억났다. 동시에 두려움과 조금 다른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당장에라도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성은 당장 그 남자를 잔인하게 죽이고 이 여자는 끌고 가 성안 가장 깊숙이 가둬놓으라고 속삭였다.
늦지 않았다. 지금에라도. 하지만 정말 죽여버린다면 로위나는.
“대답해요. 당신 뺨이 부은 것도 관계있는 거죠?”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뜨거워지던 머리를 식혔다. 깊은 심해에서 수면 위로 끌어올려지듯 한 가지 깨달음이 킬리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지금 그를 들끓게 하는 강렬한 감정은 바로 질투. 질투였다.
“알아주다니 고맙군.”
비아냥인 줄 알고 로위나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난 멍청이가 아니야.”
“무슨 뜻이죠?”
“쓸만한 인질을 내 손으로 해하진 않는다는 말이지.”
사실인가 가늠하듯 로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불신과 경계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맹세라도 할까.”
“당신의 맹세는 믿지 않아요. 나도 멍청이가 아니거든요.”
“…….”
“마찬가지로 당신 사과도요.”
냉엄하게 꽂힌 말에 킬리언이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진심으로 반성하지도 내게 미안해하지도 않아요. 끝까지 자기 욕심이 우선이고 나는 당신 물건이나 마찬가지죠.”
싸늘하게 말을 끝맺은 로위나가 다시 시선을 극으로 돌렸다. 몇 장면이 지나가고 듬성듬성 빈 관객석 앞에서 배우들이 열연을 하고 있었다.
극엔 반전이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은 사실 살아 있었다. 결혼식 날 남편을 살해한 죄로 단두대에 오른 여자가 좌중 속에서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연인을 발견한다.
처형을 구경나온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인파 속에서 연인이 반미치광이가 되어 뭐라뭐라 크게 소리치며 그녀를 향해 달려갔으나 소리도 걸음도 구경꾼들로 가로막혔다. 여자가 환하게 웃는 찰나, 시퍼런 칼날이 내려오며 무대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육중한 커튼이 닫혔다.
숨죽이고 극을 바라보던 남은 관객들이 막이 내린 비극에 뒤늦게 우레와 같은 박수 세례를 퍼부었다.
커튼콜이 이어졌다. 극작가와 함께 주연 배우들이 남아준 관객들을 향해 깊게 절을 했다.
길게 이어진 갈채 속에서 박수 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 * *
“좀 전만 해도 화창했는데 갑자기 흐려졌네요. 안 그래요?”
상념에 잠겼던 로위나가 뒤늦게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 생각도요.”
“그런 것치고 꽤 깊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의심 가득한 눈빛이 로위나에게 향했다. 날카롭게도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젯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킬리언은 공연이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오히려 기꺼웠는데도 어제를 기점으로 뭔가 그가 변하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시선을 피한 로위나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말씀대로 곧 비가 오려나 봐요. 으스스하네요. 슬슬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말을 끝맺기 무섭게 하나둘 빗줄기가 떨어졌다.
“그렇네요. 일단 비부터 피하죠.”
웬일인지 수긍한 세실리아가 그녀를 가제보로 이끌었다. 네 개의 기둥이 둥근 지붕을 떠받치는 아담한 휴식 공간이었다.
무성해진 녹음 속에서 말없이 비를 바라보고 있던 것도 잠시, 벤치에 앉아 있던 세실리아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시 기다리세요. 내가 마차를 불러올 테니까.”
“같이 가요.”
“아니에요. 기다리세요.”
따라나서려는 로위나를 단호하게 거절한 세실리아가 양산을 우산 대신 펼쳐 들고 멀어졌다.
혼자 남은 로위나가 조용히 내리는 비를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 가제보 안으로 들어왔다. 뒤를 도는 순간 애틋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로위나.”
“…….”
“로위나.”
“…세드릭?”
설마 했던 얼굴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입을 막은 로위나가 굳은 채로 눈을 크게 떴다. 한 걸음 다가온 세드릭이 손을 뻗어 로위나를 품에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세드릭.”
포근하고 안정적인 품에 로위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안긴 채로 한참 말이 없자 세드릭이 포옹을 풀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그보다 데미안은요?”
“잘 지내요. 당신이 친구 집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렇군요.”
안도한 로위나가 뒤늦게 그의 곳곳을 살폈다.
“엊그제 밤, 저택에 왔다고 들었어요. 뭔 일이 있었죠? 그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건.”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친 곳이 없음을 확인한 로위나가 올라갔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대답한 세드릭이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뭐가요?”
“내가 자리를 비워서 당신이 그 남자에게 끌려가듯 한 거요.”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킬리언은 재해나 마찬가지였다. 예측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이어 물었다.
“고마운 건요?”
“이렇게 잘 지내줘서 고마워요.”
눈물이 핑 돌았다. 로위나가 말을 잊은 가운데, 그녀의 두 뺨을 잡아 올린 세드릭이 나직이 운을 뗐다.
“그리고 엊그제 일 말인데. 그 남자 덕분에 오히려 희망이 생겼어요. 묘안도 있구요.”
“……묘안이요?”
지그시 웃은 세드릭이 속삭였다.
“우리 결혼해요.”
“네?”
귀를 의심한 로위나가 입을 떡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