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누군가 이름을 부른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렸으나 욕실에는 그녀 혼자였다. 의아해한 로위나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올렸다.
그대로 침실로 돌아가자 쓰다 만 편지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 감시를 피해 세드릭의 타운하우스로 보내려는 편지였다. 생각보다 이곳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걱정할 만한 부분은 숨긴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낼지는 이미 결정했다.
다시 의자에 앉아 펜을 쥐는데 누군가 방문 앞에서 노크했다. 긴장한 로위나가 벌떡 일어나 편지를 서랍 안으로 숨겼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연 사람은 다행히 하녀였다.
“이걸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하녀가 건넨 건 봉투였다. 봉투를 받아 든 로위나의 눈에 내일 저녁 오페라 공연의 귀빈 입장권이 들어왔다. 조용히 일자와 시간을 읽는데 하녀가 덧붙였다.
“입구에서 기다리시겠다고 합니다.”
“……알았어요.”
주어를 생략했으나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럼.”
“저기요.”
공손하게 인사한 하녀가 방을 나가기 전 불러 세운 로위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분께 내일 낮은 지인의 병문안을 다녀오겠다고 전해 주세요.”
낮이건 밤이건 눈치를 보며 이곳에만 박혀 있은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허락하건 안 하건 내일은 로렌의 얼굴을 봐야 했다.
“알겠습니다.”
부드럽게 대답한 하녀가 자리를 비웠다. 혹시나 싶어 자지 않고 기다렸지만 다행히 안 된다는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이튿날 아침, 수행이라는 명목으로 감시역이 붙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제녹이었다. 병원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로위나가 차갑게 운을 뗐다.
“잠깐의 외출인데, 숨 막히네요. 그가 혹시 로렌과의 대화도 보고하라던가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병실 앞에 있을 테니까요.”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잔뜩 날이 선 눈으로 대꾸하던 로위나가 이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제녹 씨. 답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네요.”
“아니요. 이해합니다.”
도리어 면목 없다는 듯 웃은 제녹이 고개를 저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양심의 가책이 욱신욱신 가슴을 찔러 댔다.
짤막한 대화 이후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을 바라보던 로위나가 불쑥 물었다.
“저하께선 이곳에 얼마나 더 있으실 예정이죠? 아무리 비공식으로 왔다지만 길게 외국에 머무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잖아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앞으로…….”
“앞으로?”
뜸을 들이는 말투에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몇 개월 정도 체류할 예정입니다. 본국에서도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원래라면 오늘 바로 떠나도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곳으로 온 목적인 사업은 탄탄대로를 이어 가고 있고 마무리 정도만 남은 상태였다. 로위나와의 시간을 더 할애하기 위해 낮도 밤도 없이 일했던 주인을 떠올리자 마음이 불편했다.
앞으로 어쩌실 거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 또한 그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돌려야지. 억지로 데려갔다가 또다시 도망칠 궁리를 하면 안 되니까.
과연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그가 보는 로위나는 빙벽처럼 견고하고 단단했다. 수십 수백 번을 담금질 당해 단단해지는 칼처럼.
“……그렇군요.”
로위나가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 기간이 끝나면 얌전히 돌아가는 건지 아니면 또다시 납치라도 해서 그녀를 데려갈지 불안했다. 하지만 직접 입으로 묻기 힘들뿐더러 무엇보다 제녹이라고 킬리언의 의사를 다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늦었지만 감사해요.”
“네?”
“데미안이요. 아직 모르시는 거죠?”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제녹은 그동안 그녀를 많이 신경 써 주고 있었다. 사생아인 데미안이 차기 공작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아…….”
갑작스러운 감사에 잠시 말을 잃은 듯 눈만 깜박이던 제녹이 뒤늦게 대꾸했다.
“아닙니다.”
두 사람이 각자 상념에 잠긴 동안, 멈추지 않고 달리던 마차가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했다.
* * *
“다이애나.”
병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로렌이 반색했다.
“요새 많이 바빴어요? 기다렸는데.”
“미안해요. 로렌.”
옅게 웃은 로위나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반가운 인사도 잠시, 상태를 살피러 온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로렌이 낯빛을 바꾸었다.
“로위나. 세드릭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네?”
화들짝 놀란 로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세드릭 씨가 벌써 돌아왔나요?”
“어젯밤 늦게 왔어요. 왜 같이 안 왔냐고 하니까 지금 루드빌 저택에 머물고 있다면서요?”
“로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죠?”
계획이 어그러졌다. 로위나가 쓴웃음을 삼켰다. 차마 그녀의 약 때문에 꼬리를 잡혔고 또 그것 때문에 공작에게 잡혀 있다는 말은 하기 어려웠다.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일은요. 혼자 지내기 적적해서 루드빌 저택에서 머물렀던 건 사실이지만, 로렌이 걱정하는 일은 없었어요.”
“정말이죠? 이제 데미안도 세드릭도 돌아왔으니 타운하우스로 돌아가는 거죠?”
“……그럼요.”
차분하게 대답하던 로위나가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레 로렌이 기침하며 허리를 고꾸라뜨렸다. 그녀를 붙잡아 침대에 눕힌 로위나가 의사를 부르러 종을 울렸다. 로위나의 팔을 잡은 로렌이 깊게 심호흡했다.
“괜찮아요. 이제 그리 심하지 않으니까. 바꾼 약 덕분인가 봐요.”
그녀의 말처럼 전과 같은 발작은 없었지만 색색 들이마시는 숨이 가빠 보였다. 걱정 어린 얼굴로 로위나가 로렌의 등을 쓸었다. 그러는 사이 호출을 받고 온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더 있다간 방해가 될 거 같아 로위나가 가방을 들었다.
“이만 돌아갈게요.”
“미안해요. 기껏 와 줬는데.”
“아니에요. 그리고…….”
무용지물이 된 가방 안 편지를 매만지던 로위나가 말끝을 흐렸다.
“난 잘 지내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세드릭 씨에게 전해 주세요. 곧 연락하겠다고도요.”
“알았어요.”
로렌이 대답하기 무섭게 다시 한번 기침이 밀려들었다. 의사가 안정제 주사를 꺼냈다. 수선해진 병실을 나온 로위나가 기다리고 있던 제녹과 마주했다.
“벌써 가십니까?”
“네. 저택으로 가죠.”
고개를 까딱한 로위나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세실리아가 로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근히 그녀를 피했던 것과 달리 오늘은 싹싹한 태도였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잠시 지인의 병문안에요.”
“그랬구나.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요. 이제 하려고요.”
“그럼 같이해요. 마침 저도 배고팠거든요.”
팔짱을 낀 세실리아가 로위나를 다이닝 룸으로 이끌었다. 구김살 없는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얼결에 그녀와 함께 식사를 들게 된 로위나가 세실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인이라 하시면 로렌 님을 말하시는 거죠?”
“아. 네.”
“이야기는 아버지께 들었는데, 상태는 어떠세요?”
“덕분에 회복 중이세요.”
“그거 정말 잘됐네요.”
이야기는 끊김 없이 이어졌으나 어딘가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얹힐 거 같은 느낌을 누르며 나이프를 든 로위나가 시계를 흘깃 봤다.
“무슨 약속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아. 저녁에 공연을 하나 보기로 해서요.”
누구와 함께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저번엔 공연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도 했고 말해 봤자 세실리아가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예감에서였다. 잠시 얼굴을 굳힌 세실리아가 식기를 내려놨다.
“제가 너무 시간을 뺏었군요.”
“아니에요.”
“공연을 보신 뒤엔 식사도 하실 테니 음식은 이만 치울게요.”
통보하듯 말한 세실리아가 뒤에 서 있던 하녀에게 그릇을 치우라 지시했다. 절반도 먹지 않은 그릇이 하나둘 치워지고, 로위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서먹서먹하게 인사하고 다이닝 룸을 나가려는데 오래전 잊고 있던 단어 하나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맞다. 미스 필로네.”
“…….”
어차피 변장이 들켰을 때부터 정체가 탄로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저 그 시기가 온 것뿐이었다. 로위나가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더 폭탄 같은 말이 쏟아졌다.
“혹시 어제 고드웰 씨가 찾아오셨던 건 아시나요?”
“뭐라고요?”
얼어붙은 로위나가 등을 돌린 채로 고개를 틀었다. 굳은 옆얼굴을 바라보며 세실리아가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역시 모르셨군요.”
“자세히 말해 봐요.”
“정확한 건 저도 몰라요. 그냥 별채로 잠깐 들어가셨다 떠나시는 뒷모습만 봤을 뿐이니까요.”
별채라면, 킬리언이 머무는 곳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가 조용히 보내주진 않았으리라는 점이었다. 주변 사람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으로 그녀는 이곳 루드빌 저택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걸 깨뜨렸다면. 아랫입술을 깨문 로위나가 빠르게 다이닝 룸을 나가려는데, 세실리아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혹시 괜찮으면 내일 요 앞 공원으로 산책 가지 않으실래요?”
“산책이요?”
“네. 요 며칠 날씨도 정말 좋고 저택에만 있기엔 아깝잖아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어진 침묵에 눈을 가늘게 뜬 세실리아가 추궁하듯 물었다.
“아니면, 뭐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 좋네요. 가죠.”
지금은 세실리아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더불어 세실리아에겐 미안한 것도 있고, 종일 저택에 있기에 갑갑한 것도 사실이었다.
로위나의 승낙에 화사하게 웃은 세실리아가 대화를 끝맺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마차를 준비시킬게요. 공연 잘 보고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