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로위나가 루드빌 저택에 있다고?
세드릭은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이상했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고, 로위나가 오웬의 저택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머문다 해도 편지를 했을 텐데 한마디 연락도 없이 훌쩍 짐을 싸서 그곳에 간 게 불길했다. 왠지 모르게 싸한 예감이 발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영문 모른 채 선 데미안이 굳어 있는 세드릭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 엄마가 어디 있다고?”
“친구 집에 있으신가 봐.”
“우리가 없어서 심심해서 거기 머물기로 했나?”
“그래. 그럴 수도.”
옅게 웃은 세드릭이 데미안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그건 그렇고 일단 씻어야겠다. 지금 너무 꾸질꾸질해. 데미안.”
“정말? 많이 더러워?”
“응. 엄마가 보면 까마귀인가 아들인가 헷갈릴 정도로.”
짓궂게 덧붙인 말에 데미안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럼 안 돼!”
“그래.”
하녀에게 눈짓한 세드릭이 욕실 쪽으로 데미안의 등을 밀었다.
“그럼 씻고 나와. 그리고 같이 엄마를 보러 가자.”
“응.”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하녀와 함께 욕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세드릭이 홱 몸을 돌렸다. 방금 연 문을 다시 열고 막 떠나려던 마차를 불러 세웠다. 마부가 뒤를 돌았다.
“어디로 갈까요?”
“루드빌 저택으로 가 주세요.”
대답한 세드릭이 외투 옷깃을 바로 세웠다. 직접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인지 들어야 했다.
* * *
그러나 세드릭을 기다린 건 다름 아닌 문전 박대였다. 언제 저택에 들락날락했냐는 듯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문지기 또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돌아가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묵고 있는 손님이 내 부인이란 말입니다.”
“그 사정이야 제가 알 바가 아니고, 주인 나리께서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면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돌아가시죠.”
무뚝뚝하게 대답한 문지기가 차갑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머리를 쓸어 올린 세드릭이 화를 참으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낮게 말했다.
“그럼 안으로 가서 내 이름을 대세요. 세드릭 고드웰이라고.”
“그러니까.”
“후회하지 말고 내 말을 전해요. 난 세드릭 고드웰이고, 내 부인을 데리러 왔다고.”
나직하지만 씹어 내뱉는 듯한 말투였다. 얕본 것도 잠시, 무시하면 안 될 듯한 분위기에 뒷머리를 긁은 문지기가 저택으로 몸을 돌렸다.
창살을 움켜쥔 세드릭이 멀어지는 문지기를 노려봤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문지기가 돌아왔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훨씬 공손해진 태도로 문을 열었다.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그럼 들어오시죠.”
“……고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세드릭이 문지기를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처음엔 본채로 가는 줄 알았던 문지기는 별채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연히 손님방이 많은 본채에 갈 줄 알았던 그가 의아해하며 뒤따르는데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자 웬 인영이 쓱 사라졌다.
“나리?”
“…….”
“거기 무언가가 있습니까?”
“아니요. 잘못 본 것 같습니다.”
고개를 저은 세드릭이 다시 문지기를 따라 별채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기대하던 로위나가 아닌 웬 낯선 남자였다.
“세드릭 고드웰 씨죠?”
“……그런데요.”
“반갑습니다. 전 제녹 길리터스라 합니다.”
빙긋 웃은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경계하는 눈으로 내민 손을 잡은 세드릭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이애나는요?”
“고드웰 씨.”
“내 아내는 어디 있죠? 그리고 루드빌 씨는요?”
마치 이 저택의 주인인 양 그를 맞은 남자가 수상했다. 추궁하듯 몰아세우는 사이, 작은 발걸음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자 계단 위에서 한 남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아내라.”
어둠 속에서 다리만 보이던 남자는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계단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 보인 얼굴에 세드릭이 눈에 불을 켰다.
“당신!”
혹시나 싶었던 예상이 끔찍하게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막아서는 제녹을 밀치고 남자에게 다가간 세드릭이 바로 멱살을 잡았다.
“그녀를 어디에 숨겼지?”
“예의를 모르는군.”
쯧, 혀를 찬 킬리언이 제 멱살을 움켜쥔 세드릭을 힘주어 뿌리쳤다.
“예의? 사람을 납치해 놓고 무슨 예의!”
“로위나가 그리 말하던가?”
입매를 뒤튼 킬리언이 세드릭의 생각을 꿰뚫으려는 듯 보라색 눈동자를 노려봤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로위나를 아내라고 서슴없이 지칭하는 것부터 쏴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밀려들었다. 품에 있는 총을 꺼내지 않은 게 그의 최대한의 인내였다.
결국 눈이 뒤집힌 세드릭이 다시 달려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킬리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저하!”
“닥치고 말해.”
기겁한 제녹이 다가오려 했으나, 손을 들어 막은 킬리언이 얼얼한 뺨을 매만졌다.
“이걸로 빚은 갚은 셈 치지.”
“뭐?”
“그간 그녀를 돌봐 준 빚.”
다이애나 고드웰. 로위나가 썼던 가명을 떠올리니 치가 떨릴 만큼 화가 끓어올랐다. 그 스스로도 있는 줄도 몰랐던 격렬한 감정이었다. 아무리 가명에 위장된 부부라 하지만 그녀 옆에 버젓이 다른 남자가 머물렀다는 사실에 이가 갈렸다.
예전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었을 테지만 이젠 그런 식으로는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박힌 한마디가 강력한 주박처럼 그를 얽매고 있었다.
―당신이 날 억지로 데려가면, 난 이 방아쇠를 당길 거예요. 당신이 내 주변 사람을 해할 때도요.
첨예한 시선이 줄 타듯 위태롭게 부딪혔다. 정적을 깨뜨린 쪽은 세드릭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 그가 이를 드러냈다.
“개소리 그만하고 그녀를 놔주시죠. 저하.”
경칭을 붙였으나 말투와 표정은 차라리 멸칭에 가까웠다.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는 킬리언을 향해 세드릭이 빈정댔다.
“본국으로 가셔서 그녀와 나는 깨끗이 잊으시고 고결한 여인을 들여 행복하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윽!”
말이 끝나기 무섭게 턱이 쥐어 잡혔다. 방심한 사이 들어온 기습에 당황한 세드릭을 향해 킬리언이 으르렁댔다.
“조금은 입조심하는 게 좋겠어. 학자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놀리는지 인지하고 말이지.”
반짝이는 눈은 육식 동물의 그것에 가까웠다. 뼈도 남김없이 발라 먹어 버릴 듯한 기세에 주춤한 것도 잠시, 정신 차린 세드릭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당신이 버린 여자야. 이제 겨우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을 다시 갖고 놀다 비참하게 버리려…… 크윽!”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세드릭의 멱살이 잡히더니 허리가 굽혀졌다. 뒤이어 명치에 둔탁한 통증이 이어졌다.
“헉.”
갈비뼈까지 이어지는 고통에 세드릭이 숨을 못 쉬는 사이, 손을 턴 킬리언이 제녹에게 눈짓했다.
“밖으로 내보내요.”
“예.”
고개를 숙인 제녹이 부축하듯 세드릭의 팔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그대로 내쫓기듯 별채 밖으로 이끌린 세드릭이 정신을 차린 뒤 제녹의 팔을 뿌리쳤다.
“대체 뭐 하는 짓거리죠? 사람을 억지로 끌고 온 것도 모자라 이런 식을 가둬 두다니!”
“로위나 님은 억지로 끌려온 적이 없습니다.”
“뭐라고요?”
침착한 제녹의 대답에 눈썹을 치켜올린 세드릭이 추궁했다.
“로위나가 그럴 리 없어.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정말입니다. 하녀에게 이미 들으셨을 텐데요. 스스로 짐을 꾸려 이곳에 오셨다고. 제 발로 들어오신 겁니다.”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봤으나 제녹은 담담했다. 그 태연한 모습에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은 세드릭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설령 그렇다 한들 뭔가 협박을 했겠죠. 이를테면.”
말을 멈춘 세드릭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오웬의 저택. 로렌의 약. 그리고 로위나와 공작.
일련의 것들이 하나의 관계성을 가지고 결론으로 나아갔다.
“약이군.”
“…….”
로렌의 약은 다름 아닌 에셀우드에서 나는 약이었다. 그리고 킬리언 데본셔는 에셀우드에서 영향력 있는 공작이었다. 소문으로는 뒷세계에서도 이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수긍 대신 먼 발치에로 서 있는 문지기를 부른 제녹이 그를 밖까지 안내하게 했다. 꿋꿋이 선 세드릭이 제녹의 어깨 너머 별채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있을 남자를.
“하나만 묻죠. 그녀는 별채에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녹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조금은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뜬 세드릭이 통보했다.
“난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로위나를 데려갈 거고요.”
결연한 얼굴에 멈칫한 제녹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동시에 문지기가 세드릭을 재촉했다.
“그럼 가시죠.”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하필 이 시기에 방심하고 자리를 비운 걸까. 무력한 자신이 한심스럽고 이 상황에 화가 치밀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로렌도 안전하고 로위나 또한 벗어날 방법을. 감정을 억누르려 깊게 심호흡한 세드릭이 입 안으로 나직이 이름을 뇌까렸다.
“……로위나.”
별채에서 정문까지의 거리는 멀었다. 터덜터덜 나가려는데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고드웰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