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마시자마자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더니 의식을 잃었다더군. 친척 중 하나의 사주로 차에 독을 넣었다는 게 밝혀졌고.”
“…….”
“죽다 살아났지. 집사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아마 그대로 죽었을 테지.”
무거운 이야기였다. 남의 입에서 듣는 것과 본인의 입에서 듣는 건 천지 차이였다. 충격받은 로위나가 입술을 벙긋거리는 사이,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뭇잎 하나가 그녀의 머리칼에 내려앉았다. 자연스레 그것을 털어준 킬리언이 고해하듯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털어놨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믿는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특히 여자를.”
하물며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한때의 욕망이고 호기심이라 여겼다. 한철 지나면 지는 꽃처럼 그녀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들이 그저 잠시 머무를 바람과 같다고 치부했다. 그게 끔찍한 오산인 줄도 모르고.
이야기엔 결론도 결말도 없었다. 그가 고해처럼 털어놓은 무거운 과거에 로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영겁과 같은 시간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침묵 속에서 할 말을 골몰하던 로위나가 결국 정적을 갈랐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돌아가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킬리언의 눈은 기회를 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배신당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던 어린 시절의 그가 언뜻 데미안과 겹쳐 보여 더는 보기 힘들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이 강압적으로만 굴던 남자였다. 무슨 생각인지 개심한 것처럼 굴지만 아마 잠시일 터였다. 진심이라 해도 받아주지 않겠지만. 도망치듯 일어난 로위나가 마차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 * *
오웬은 엉망진창 우는 얼굴로 돌아온 딸을 보고 기겁했다.
“세실리아!”
“아버지!”
“무슨 일이냐. 응?”
뛰어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세실리아가 말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오웬이 몇 번이고 어르고 달랜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여태 갖지 못한 게 없었어요. 아버지가 다 쥐여주셨으니까요…….”
“그랬지. 그러나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고도 알려주었잖니.”
“하지만 이건 너무 가혹해요!”
눈물 젖은 눈으로 아버지의 품에서 나온 세실리아가 울분을 토해냈다.
“데본셔 저하가 잘하면 저와 결혼하실지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비록 그날 연회에 그분을 찾지 못했어도, 그래도!”
“오, 아가.”
그제야 세실리아의 속을 읽어낸 오웬이 고개를 저으며 딸을 다시 끌어안았다.
“로위나 님과 둘이 식사하러 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렇지?”
“셋이 같이 갔어요. 저하와 함께요…… 하지만 절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어요.”
“무시하셨다는 말이냐?”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 수 있어요. 제게 한 번도 관심을 주지 않으셨다는 걸요.”
아무리 경험이 적고 눈치가 조금 부족해도 알 수 있었다.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으나 그의 시선은 꼿꼿이 그를 외면하는 로위나에게 향해있다는 걸.
“안 된다. 세실리아.”
“아버지!”
무겁게 한숨을 내쉰 오웬이 세실리아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전엔 내가 잘못 판단했었단다. 그분은 네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고 옆에 있다간 네가 다칠 거다.”
재력과 능력에 사윗감으로 감히 눈독을 들였던 것도 잠시였다. 겉으로 보기에야 배부른 사자처럼 조용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지만 사업으로 가까이하면 할수록 진저리나게 잔인한 모습들이 보였다.
자신도 돈에 있어 지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킬리언 데본셔가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혀를 내두르다 못해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아무리 고결한 신분이라 해도 외국의 세력이 발을 딛는 것에 결사하여 반대했던 보수적인 두 사람을 떠올렸다.
―공작? 그럼 다입니까? 무역이니 협력이니 말만 번지르르해도 결국 우리나라에서 이익을 뽑아먹을 생각 아닙니까! 그런 자를 어떻게 신용하고 함께 손을 잡습니까.
―맞소. 당신들은 불과 백여 년 전 그쪽 나라에서 여길 침공했던 게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오?
기겁했던 첫 만남, 마련된 자리에도 얼굴도 비치지 않았던 두 사람은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나름 영향력 있던 사람들임에도 실종 후 닷새가 넘어가자 지금은 진행되는 듯했던 수사조차 어영부영 마무리됐다. 조금이라도 제게 방해가 되거나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판단하는 상대는 가차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런 남자가 집착하는 여자가 바로 로위나 필로네였다.
“아니에요! 저도 사실 조금 무서워했지만, 오늘 보니 얼마나 기품있고 우아하신데요! 아버진 그분을 몰라요.”
“세실리아!”
자라는 내내 유순하고 순종적이었던 세실리아가 처음으로 보인 반기에 정색한 오웬이 낮게 경고했다.
“아니라면 아닌 거 다. 두 사람의 일엔 더는 관심 갖지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마. 알았느냐?”
“몰라요! 미워요!”
평소처럼 조르고 애원하면 받아들여 주리라 기대했던 아버지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 채 소리친 세실리아가 방을 나섰다. 붙잡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저택의 중정으로 나가 눈물을 닦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아버지. 저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냉랭하게 쏘아붙인 세실리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끈한 세실리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저 혼자 있고 싶다니… 누구죠?”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낯선 남자의 모습에 놀란 세실리아가 뒷걸음질 쳤다. 얼굴 한쪽에 화상을 입은 기분 나쁜 인상의 남자였다. 모자를 벗어든 남자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새로 온 막일꾼 톰입니다. 인사드립니다. 아가씨.”
“……그렇군요.”
처음 보는 얼굴이라 하나 아랫것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게 불편했다. 큼큼, 헛기침을 한 세실리아가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옆을 스쳐 지나는데 팔이 잡혔다.
“이게 무슨!”
기겁한 세실리아가 팔을 뿌리치려는데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붙잡은 남자가 대뜸 물었다.
“혹 방금 울고 계신 게 별채의 손님 때문이셨습니까?”
“그렇다면?”
얼어붙은 세실리아가 되묻자 남자가 씨익 웃었다.
“그럼 제가 도움을 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네가? 무슨 수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찮은 막일꾼 따위가 그녀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원래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소리건만 약해진 마음에 작은 희망 하나가 자리잡았다.
“……그러고 보니 억양이 에셀우드 쪽 같구나.”
“네. 아주 잘 보셨습니다.”
더욱 환하게 웃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일꾼치고는 기품도 느껴져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게 도움을 준다는 거지? 만약 돕는다 하면 뭘 요구할 줄 알고?”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모든 일이 끝나고 제 작은 부탁을 들어주시면 되니까요.”
“그 말을 어떻게.”
반박하려던 찰나 마주한 서늘한 눈빛에 세실리아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 순간이었으나 마치 그녀를 짓누를 듯 싸한 눈빛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가시기도 전에 히죽 웃은 남자가 속삭이듯 대꾸했다.
“저도 명예는 압니다. 한때 반쪽이나마 귀족이었거든요.”
숨겨둔 사생아였지만. 속으로 마지막 말을 삼킨 톰이 세실리아의 어깨너머, 별채를 노려봤다.
그의 아비는 멍청하다 못해 아둔한 자였다. 충성을 다해 몸과 마음을 바쳤는데 돌아온 게 싸늘한 죽음이지 않았나. 비록 아무도 몰래 숨겨져 온 자식이었으나 그래도 아비는 아비고 아들은 아들이었다.
아비의 복수는 아들의 몫이었다.
* * *
데미안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신나게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금 심술이 난 세드릭이 불쑥 물었다.
“그렇게 신나?”
“응! 이제 엄마 볼 수 있잖아!”
“나랑 재밌게 지냈으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히히 웃은 데미안이 선물 상자를 꼭 안았다. 그동안 심부름이나 안마 같은 착한 일을 할 때마다 세드릭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서 산 작은 팔찌였다.
“형, 엄마가 이거 보면 좋아할까?”
“그럼.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처럼 여길걸.”
“엄마 어서 보고 싶어.”
“나도.”
작게 대꾸한 세드릭 또한 창밖을 응시하며 품에 소중하게 간직한 반지 케이스를 매만졌다.
데미안을 데려간 건 다름 아닌 그녀에게 혼자 있을 시간과 그의 청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누구의 개입도, 방해도 없이 오롯이 그녀의 판단과 마음으로 제게 오는 걸 보고 싶었다.
“형, 근데 품에 뭘 만지는 거야?”
“형이 네 엄마에게 줄 선물.”
“봐도 돼?”
“나중에.”
“치사해.”
“뭐?”
“속 좁아.”
“이 녀석이.”
짐짓 화난 척 미간을 좁힌 세드릭이 데미안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푸하하, 웃음을 터뜨린 데미안이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가 타운하우스에 도착했음을 알리자마자 마차에서 뛰어내린 데미안이 바로 타운하우스의 문을 두드렸다.
“이, 일찍 오셨네요?”
놀란 하녀가 문을 열기 무섭게 엄마를 찾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나 왔어요!”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고 싶은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함을 눈치챈 데미안과 세드릭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하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녀가 왜 없지? 외출 중입니까?”
“그게…… 루드빌 저택에 계십니다.”
“……뭐라고요?”
대답하기 무섭게 공기가 싸늘히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