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식사는 맛있었다. 식당 전체를 예약했는지 손님은 그들 세 사람뿐이었다. 킬리언은 시종일관 친절하게 두 여자를 대했고, 대부분 짧은 대답뿐인 로위나와 다르게 세실리아는 즐겁게 그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이곳에는 반년 정도 머무르실 생각이신 거네요?”
“아마도요.”
지긋이 웃은 킬리언이 묵묵히 식기를 놀리는 로위나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로위나가 고개를 들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녀에게 달렸다는 듯한 눈빛에 얼굴을 굳힌 로위나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저 잠시 파우더 룸에 다녀올게요.”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파우더 룸에 들어가자마자 다리가 풀렸다. 스툴에 주저앉아 있는데 문득 거울 너머로 긴장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어도 그와 함께 있는 시간 일분일초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순진한 세실리아는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했으나 은밀한 눈짓과 말투, 시선 하나하나도 그녀를 자극했다. 이곳으로 도망쳐온 이후 처음 접한 자극이라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변덕일 거야.”
재회한 순간, 느꼈던 광기 어린 집착은 착각이리라 로위나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여기에 온 것도 그녀를 찾으러가 아닌, 사업상의 목적 때문이 아니었나. 어쩌다 마주쳐버렸으나 이전이라면 그녀의 생각은 고려하지도 않고 끌고 갔을 남자가 처음으로 제 주장을 굽히고 양보하기까지 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의미니 로위나는 그녀 좋을 대로 해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실리아에게 차라리 호감을 가지는 게 좋겠지.”
스스로 내뱉은 말인데 어쩐지 속이 불편했다. 세실리아에 대한 죄책감이리라. 애써 상념을 지워버린 로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파우더 룸의 문을 열었다. 동시에 문 옆 벽에 기대 기다리던 킬리언과 마주쳤다. 놀란 로위나가 눈을 깜박였다.
“왜…… 여기에 있어요?”
“루드빌 양은 속이 안 좋아 먼저 들어가겠다고 해서.”
벽에서 등을 뗀 킬리언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나도 당신도 식사는 다 한 거 같고…… 아닌가?”
“그건 그렇죠.”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런데 세실리아 양 많이 아픈 건 아니죠?”
대답 대신 킬리언이 지긋이 그녀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로위나가 등 뒤로 파우더 룸의 문고리를 잡았다. 어쩌면 자신을 놔줄지도 모른단 희망을 품었으나 그를 믿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글 심산이었다. 그러나 거침없이 자신을 밀어붙이리란 예상과 달리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킬리언이 오히려 되물었다.
“내가 무섭습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그와 시선을 비껴냈다. 인형처럼 차가운 옆모습을 보던 킬리언이 손을 뻗었다. 금발을 매만지려 했으나 주춤하며 피하려는 모습에 그대로 뻗은 손을 거뒀다. 씁쓸한 마음을 내리누른 그가 속삭이듯 도발했다.
“많이 변한 거 같은데,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군요.”
“…….”
“여전히 겁도 많고 경계도 심해.”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어투에 발끈한 로위나가 결국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날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짓씹듯 내뱉은 그녀가 그를 지나쳐 긴 복도를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킬리언 또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바로 루드빌 저택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마차는 빙 돌아 어느 높은 언덕으로 향했다. 오래전 무너진 고성의 성벽이 남아 있는 유적지였다. 굳은 로위나와 달리 태연한 얼굴로 먼저 마차에서 내린 킬리언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려요.”
그 모습에 로위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순히 내릴 리 없었다. 익숙한 길이 아닌 낯선 길로 접어든 마차 때문에 바짝 신경이 곤두선 터였다.
“대체 무슨 속셈이죠? 바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로위나.”
“난 바로 돌아가겠어요. 마차를 다시 돌려주세요.”
손목이 잡혔다. 뿌리치려는데 손등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얼음처럼 굳어버린 로위나의 눈에 제 손등에 입 맞추는 킬리언이 비쳤다.
“뭐 하는!”
기겁하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엉거주춤 안긴 로위나를 올려다본 킬리언이 속삭였다.
“발버둥 쳐 봐. 내릴 때까지 안 놓을 테니까.”
“…….”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는 눈이었다. 눈씨름도 잠시, 애써 이 상황을 모른 체 하고 있는 마부에게 시선이 미치자 로위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전히 당신 마음대로네요.”
“정말 내 마음대로라면 우린 여기에 없겠지.”
“알았으니 놔줘요.”
잇새로 나온 목소리에 킬리언이 언제 그녀를 속박했냐는 듯 손을 풀었다. 이어 잡아주려는 듯 내민 손을 무시한 로위나가 혼자 마차에서 내려왔다. 땅을 밟는 순간 보이는 풍경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다양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인 수도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언덕이었다. 깜깜한 가운데 곳곳에 불이 밝혀진 가스등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넓은 수도가 마치 작은 마을처럼 느껴졌다. 낮에는 로렌의 문병을, 저녁엔 로렌의 약을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알지 못했던 장소였다.
“이런 곳이…….”
넋을 잃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이, 그녀의 손을 잡은 킬리언이 로위나를 성벽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풍화되어 깎여나간 섬돌에 앉았다.
홀린 듯이 수도를 보는 로위나의 옆모습을 그는 눈에 아로새기듯 응시했다. 삼 년이었다. 재회한 후를 제외하고, 삼 년이란 시간을 가장 가까운 곁에 두었던 여자였다. 온갖 휴양지와 별장, 공연장과 레스토랑에 데려갔으나 정작 연인들이 많이 간다는 이런 곳에 한 번도 데려온 적이 없었다. 그는 공작이었고 그런 곳에 갈 이유도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불만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꿈에나 그릴 보석과 드레스를 걸치고 모두 선망하는 곳에 데려가도 언제부턴가 좋아하는 기색도 없어지는 그녀에게. 이런 소박하고 별거 없는 장소에 쉬이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커다란 다이아몬드보다 경취를 더 좋아하는 여자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상황이 많이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로위나.”
애틋하게 이름을 부르자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도 그는 온 세상이 들썩이는 느낌이었다. 킬리언은 지난 시간, 입에만 맴돌았던 말을 결국 혀에 올렸다.
“미안합니다. 늦었지만 사과하죠.”
“…….”
처음 듣는 사과였다.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이기도 했다. 로위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모든 게 변했고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도,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되물었다.
“무엇이요?”
“과거에 당신을 잔인하게 내쳤던 것.”
“그리고요.”
“재회해서도 내 마음대로 휘둘렀던 것. 사과하지 않았던 것.”
덤덤하게 대꾸했지만, 표정은 어둡고 목소리는 낮았다. 진심이었다. 목 끝까지 올라온 무언가에 로위나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난 많이 아팠어요. 오래도록 고통스러웠고 어떨 땐 죽고 싶었어요.”
그러지 않게 그녀를 붙잡아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 남자의 아들이었다. 데미안은 그런 존재였다. 혼자가 아니란 걸 느끼게 해 주고, 무너지려 할 때마다 순진무구한 눈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떨리는 로위나의 손을 내려다본 킬리언이 느릿하게 덧붙였다.
“날 많이 원망했겠지.”
“…….”
“지금도 그렇겠고.”
“정말 내게 미안하다면.”
홱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외면했던 새파란 눈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그럼 날 놔줘요.”
대답 대신 킬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은 로위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거봐요. 결국 당신 이기심이잖아요. 당신은 결국 당신 자신이 가장 중요한 거예요.”
결국 평행선이었다. 잠시 잇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좁혔던 게 무색하게도 되풀이된 대화에 로위나가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뜬금없는 이야기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언젠가 당신이 물었지. 가족 이야기를 해 달라고.”
그토록 졸랐으나 묵살당한 요구였다. 이 남자의 모든 걸 알고 싶고 가장 가까이 있고 싶었던 때. 입술을 꾹 다문 로위나를 향해 킬리언이 낮고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난 부모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초상화로밖에는.”
언젠가 집사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가 직접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꿋꿋이 외면하면서도 로위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철이 들어보니 집사와 하인들 뿐이었고 내 곁엔 어린 상속자의 재산을 어떻게든 뜯어내려는 알지도 못하는 친인척들뿐이었지.”
“…….”
그녀와 같았다. 고아가 된 자신 곁에는 외삼촌인 제레미가 있어 주었다는 게 달랐다.
“처음 배신을 당한 상대는 유모였어.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다 어찌 보면 날 버리고 친정으로 가버린 친모 대신 내게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고.”
덤덤했으나 오래되어 딱지가 앉은 깊은 상처가 느껴졌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로위나의 옆모습을 덧그리듯 바라보며 킬리언이 느릿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유모가 잠을 자지 못해 뒤척이던 내게 차 한잔을 내밀더군. 금세 잠이 올 거라고 말이야.”
“……설마.”
삐거덕거리듯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