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창문을 열어젖히는 일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방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품을 뒤져 궐련을 찾던 킬리언이 손을 내려놨다. 이제 다시 끊어야 할 차례였다. 뚫어져라 커튼이 처진 창문을 바라보는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로위나가 커튼을 걷었다.
슬립을 입고 창틀에 두 팔을 걸친 그녀를 보는 순간, 지쳤던 온몸에 뜨거운 피가 돌고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멀찍이 있어도 선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달빛 아래 신비롭게 반짝이는 금발과 몽환적인 초록색 눈동자, 희다 못해 투명한 살결과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
킬리언은 텅 빈 그녀의 묘 앞에 서서 하염없이 이 모습을 그리던 때를 생각했다. 무릎 꿇고 앉아 비석을 매만지다 석묘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 누웠던 때를 생각했다. 지하의 영묘는 지독히도 춥고 싸늘했다. 뼛속조차 얼어 버릴 듯 파고든 냉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개미 새끼 하나 얼쩡거리지 않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그는 몇 시간이고 누워 눈을 감았다.
영원과 같은 시간 속에서 깨달음은 순식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자리를 잘 못 봐서…….
―저하.
―저하. 이거 좀 보세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킬리언…….
모든 순간, 그녀가 그의 곁에 있던 모든 순간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그를 덮쳤다. 동시에 독이라도 들이마신 듯 무기력해졌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맞은 편에 세워 놓은 초상화가 말을 걸었다.
―솔직히, 그냥 절 내치고 싶었을 뿐이잖아요.
아니야.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화사하게 웃은 로위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솔직해지세요. 저하. 절 내치신 건 마침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제게 남자가 있을 리 없다는 건 알고 계셨잖아요. 제게 청혼할 생각을 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제 신분이 걸리셨겠죠.
그게 아니야. 목구멍에서 쥐어 짜내듯 온 힘을 다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신분이 걸린 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방해와 반대에 부딪히겠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옆에 두고자 결심한 여자였다.
그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입매를 굳힌 초상화 속의 로위나가 쐐기를 박았다.
―아니면, 한편으로 가슴 깊숙이 두려우셨나요?
―…….
―저한테 더 마음을 주기 싫으셨죠? 제게 휘둘리는 게, 오롯한 사랑을 주어 제가 당신의 심장을 쥐는 게 그렇게 두려우셨어요? 누구에게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여 주느니 좋은 핑계로 삼아 내치는 걸 선택할 만큼?
총탄이 그의 심장을 지나 등 뒤를 뚫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동정하듯 미간을 찌푸린 로위나가 딱하다는 듯 덧붙였다.
―부, 권력, 명예. 저하는 모든 걸 가지셨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군요.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친구도. 저하 옆엔 아무도 없어요.
―…….
―가엾은 사람.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킬리언이 광인처럼 초상화를 노려봤다.
―날 원망하면, 날 데려가지.
대답은 없었다. 한 장면에 박제되어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로위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데려가서 고문을 하건 짓밟건 상관없어. 뭘 하든 좋으니 날 데려가.
귀신이라도 나오길 기대했다. 목이라도 조르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초상화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고, 그는 그게 묘비인 양 멀리 떠날 때면 항상 초상화를 가지고 다녔다.
“……로위나.”
홀린 사람처럼 멀찍이 그녀를 바라보는데, 잠시 생각에 잠긴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던 로위나가 등을 돌렸다. 커튼을 다시 닫고 방 안이 어두워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킬리언 또한 커튼을 닫았다.
다시 긴 밤이 찾아왔다.
* * *
당장이라도 찾아오리라는 걱정과 달리, 로위나는 평화로운 이튿날 아침을 맞이했다.
세실리아의 수업은 계속하기로 했기에 오늘의 일정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내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얼마 전을 생각하면 천지 차이였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할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책을 덮자마자 일어선 세실리아가 홱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뭐라 말을 걸려고 하기가 무섭게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다.
결국 홀로 남겨진 로위나가 책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열린 창을 닫으려고 창가로 다가가는데 중정 쪽에 사람들이 분주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건 이쪽! 일렬도 예쁘게 심어!”
몇 번 얼굴을 봤던 정원사가 꽃들을 옮겨 심는 수습 정원사에게 무언갈 지시하고 있었다. 팬지꽃부터 수선화, 붉은 튤립과 히아신스 등 다채로운 꽃들이 하나둘 심어졌다.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중정으로 나선 로위나가 주변을 둘러보자 모자를 벗은 정원사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바쁘시네요.”
“일인 걸요. 작은 화원을 만들 예정입니다.”
“화원이요?”
“예. 안 그래도 여쭤보려 했는데 이리 나오시니 감사하네요. 마음에 드십니까?”
“이 꽃들이요?”
“예.”
마치 그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저 손님일 뿐인데 조마조마하며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에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에 들긴 하는데, 그게 중요한가요?”
“다행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정원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기 무섭게 환하게 웃은 정원사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전부 부인을 위한 거랍니다.”
“네?”
“어이! 거기! 그쪽에 두면 안 된다니까!”
뜬금없는 소리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다른 쪽으로 몸을 돌린 정원사가 멀어졌다. 하나둘 조화롭게 심어지는 꽃들을 보며 잠시 휴식을 즐긴 로위나가 무심코 별채를 올려다봤다. 사람이 지내는가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장식장에 인형을 가져다 놓듯 그저 눈에 닿는 곳에 그녀가 있길 바란 걸까 싶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와 얼굴을 더 마주하거나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와 마주하면 모든 힘을 소비한 것처럼 기진맥진하고, 기력이 전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란한 얼굴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 침실 문을 여는데, 침대 위에 못 보던 상자가 놓여 있었다. 고급스럽게 묶인 리본을 푸니 드레스와 구두가 들어 있었다. 누구의 선물인지는 그 위에 놓인 카드를 집은 순간 알았다.
오늘 밤 저녁 식사 함께하죠.
단정하면서 유려하게 쓰인 흘림체는 다름 아닌 킬리언의 것이었다. 방심한 사이, 예상치도 못한 기습을 받은 느낌이었다. 얼어붙어 있는데 정적을 깨고 문밖으로 하녀들의 목소리가 로위나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있지. 아가씨가 요새 많이 우울해 보이지 않아?”
“얘는, 몰라서 물어? 별채 손님을 짝사랑하셨잖아. 누가 봐도 첫사랑에 빠진 소녀던데. 그런데 이 방 손님이 왔잖아.”
“아…… 그래서 우울하신 거구나.”
“안됐지 뭐야.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대화를 듣는 순간, 동시에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며 의문이 풀렸다. 세실리아도 그러고 보니 금발이었다. 어떻게 보면 킬리언의 죽은 태중 약혼녀와 닮지 않았나.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한다면…… 어쩌면 이게 묘안이 될지도 몰랐다. 세실리아에게도, 그녀에게도 좋은 묘안.
결심한 로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어머나!”
방문을 활짝 열자 복도를 청소하던 두 하녀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마주 봤다. 대화를 들었을까 두려워하며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에게 로위나가 빙긋 웃어 보였다.
“세실리아 양이 혹시 어디 계신지 아나요?”
“아, 아가씨요?”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세 사람을 태운 사륜마차가 빠르게 루드빌 저택을 빠져나갔다. 세실리아는 한껏 차려입은 모습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설레는 모습에 로위나는 빙긋 웃었다.
“제, 제가 이런 자리에 있어도 되나요? 방해가 아닌지…….”
“그럼요. 오히려 승낙해 줘서 고마워요. 그렇죠, 저하?”
끝의 물음은 마주 앉아 창가를 보는 킬리언에게 향하고 있었다.
로위나는 냉담한 눈으로 고개를 돌린 킬리언과 당당하게 마주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나. 초대에 응했고, 그가 선물한 드레스와 구두를 신었다.
다만, 카드에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하자는 말은 없었으니 그 자리에 세실리아가 낀다 한들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팽팽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이어진 침묵에 로위나가 마른침을 삼키는데, 의외로 킬리언이 순순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요.”
대치를 예상하던 것과 달리 맥이 빠질 만큼 호락호락한 수긍이었다. 오히려 당황한 로위나가 시선을 피하자 킬리언이 조용히 입매를 늘렸다.
그의 초대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깜찍한 수였다. 이런 장난도 칠 수 있는 여자란 걸 전혀 몰랐기에 놀라웠다.
“혹시……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어색해진 분위기에 눈치를 보던 세실리아가 슬쩍 킬리언에게 말을 걸었다.
“굴을 좋아합니다.”
“…….”
들으란 듯한 대답에 로위나가 창문에게서 시선을 떼어 그를 바라봤다. 세실리아를 향해 웃은 킬리언이 덧붙였다.
“특히 바닷가에서 먹는 굴을 제일 좋아하죠.”
“어머! 저는 그렇게 먹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정말 맛있을 거 같아요.”
“그럼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더 맛있죠.”
다름 아닌, 로프스 섬에서의 식사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애써 잊어버린 과거를 들추는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로위나가 입을 말아 물었다. 느긋한 태도로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킬리언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뭘 좋아하지?”
“굴 빼고 전부요.”
“아.”
알 만하다는 얼굴로 창가에 턱을 괸 킬리언이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손수 굴을 발라 그녀의 입술에 넣어 주던 때를 떠올렸다. 두툼한 입술을 벌리며 그가 주는 대로 굴을 먹었던.
“저는 케이크를 좋아해요. 과일도요.”
야릇한 분위기에 마차 안이 덥게 느껴질 즈음, 끼어든 세실리아가 조잘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