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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80화 (80/120)

80화

비가 들이치는 길 위를 두 마리 말이 거침없이 내달렸다. 침묵이 바위처럼 내려앉은 마차 안에서 로위나가 무겁게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부터였죠?”

“예?”

“언제부터 날 미행했고, 지켜봐 왔죠? 언제부터 날 찾아낸 거죠?”

“……비교적 최근입니다.”

머뭇거리던 제녹이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저라고 저하의 심중을 다 아는 것은 아니나, 처음엔 그저 작은 의혹이었죠.”

약간 외국 억양이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 이미 한 남자의 아내라는 말에 넘어갔던 그와 달리, 킬리언은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했다. 동물적인 육감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어느새 마차가 멈춰 있었다. 타운하우스의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제녹이 우산을 든 채 로위나를 배웅했다. 로위나는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홱 몸을 돌렸다.

“부인?”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쫓기듯 들이닥친 여주인 때문에 놀란 하녀가 말을 걸었다. 대답 없이 방으로 올라간 로위나가 허겁지겁 서랍에서 편지지를 찾았다.

친애하는 세드릭에게.

지금 당장

거침없이 휘갈긴 글씨는 서두에서 멈췄다. 누군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 당장? 뭘 어쩌자고?

―로렌 세네스. 그 약을 오웬이 어떤 루트로 내주었다고 생각하지?

킬리언의 말이 떠오르자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로렌. 로렌이 있었다. 당장 끌려가는 건 막았다 해도 로렌의 몸이 낫기 전에 그녀는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무기력하게 굳은 사이, 스르륵 손에서 나온 펜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만약 세드릭에게 솔직하게 방금 일을 털어놓으면 당장 로렌을 데리고 멀리 떠나자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로렌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멀리 도망친다 한들 킬리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도도 없었다. 이미 이곳에 적응한 데미안 또한 걱정됐다.

“부인? 괜찮으세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 있는데, 문밖에서 서성이던 하녀가 노크했다.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아니요. 괜찮아요. 들어와요.”

이를 악문 로위나가 채 다 쓰지 못한 편지지를 구겼다. 그것을 쓰레기통에 넣자마자 들어온 하녀가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어제 떠나기 전, 세드릭 님이 편지를 전해 달라 하셔서요.”

“……고마워요.”

하녀를 내보낸 로위나가 그것을 펼쳐 들었다. 팔랑이며 떨어진 건 바로 말린 꽃잎이었다. 샛노랗고 화사하게 핀 유채꽃 한 송이가 그녀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친애하는 가짜 부인에게.

겨우 일주일 떨어져 있을 뿐이고,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립네요. 당신이 요새 날 피하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도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데미안을 내게 맡겨 줬다는 거에 의미를 둘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잘 돌볼 테니 걱정은 말고요. 혹여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편지해요.

사랑을 담아, 가짜 남편 세드릭.

담백하게 썼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애정과 다정함이 듬뿍 담긴 편지였다. 내용을 눈으로 읽어 내리는 동안 턱 끝까지 차올랐던 불안과 긴장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줄타기를 잘하면 돼.”

킬리언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끌고 공작저로 돌아갈 거 같았으나 차라리 죽겠다며 협박하자 마차를 멈췄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예전에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남자지만 일단 그녀의 말에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는 것만으로 그녀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쥐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고분고분하게 굴다가…… 로렌의 병이 다 나으면 어떻게든 벗어나겠어.”

도망치는 건 더는 소용없었다. 다른 여자를 찾게 그를 설득하든, 아니면 최후의 수단을 고안해 그가 강제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들든 해야 했다.

이전이면 터무니없다며 고려도 하지 않았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랜 시간 고군분투했던 소설이 빛을 보고 성공한 경험이 그녀를 좀 더 뿌리가 단단한 인간으로 밑받침했다.

일단 도망치고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마주하고 당당하게 굴어야 했다.

“시간을 끌어야겠어.”

결심한 로위나가 방문을 열고 나와 하녀를 불렀다.

“……메리.”

“네. 부인.”

“간단하게 짐을 싸는 걸 도와주겠어요?”

“어디 가시는 건가요?”

“네. 한…….”

손가락을 하나둘 접은 로위나가 옅게 미소 지었다.

“내일부터 루드빌 저택에서 닷새 정도 머물 거 같아요.”

“그렇게나요?”

갑작스러운 통보에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부탁 하나 할게요.”

“무슨 부탁이요?”

“비밀로 부탁드려요.”

묘안을 떠올리기 전까지 공연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이는 하녀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로위나가 옷가지를 챙겼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킬리언의 품에 안겨 떠났던 게 무색하게 로위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루드빌 저택으로 돌아왔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세실리아는 곧 표정을 바꿔 그녀를 환영했다.

“다시 오셔서 정말 기뻐요.”

“다시 와서요?”

“네. 어째선지…… 다신 못 뵐 거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로위나의 두 손을 잡은 세실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통증에 로위나가 미간을 찌푸리자 세실리아가 손을 거뒀다.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아니에요.”

“여기서 머무르시는 거죠?”

킬리언이 어떻게 말을 했는지, 로위나가 결심하고 이곳으로 오기 전, 루드빌 저택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그녀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세실리아가 바로 물었다.

“그나저나 공…… 아니 별채의 손님과는 무슨 관계세요?”

입에 담는 것도 조심스러운 듯 킬리언을 돌려 말했지만, 묻는 바는 명확했다.

어차피 가면과 가발이 떨어져 이제 와 정체를 다시 숨기기엔 늦어 버렸다. 작게 심호흡한 로위나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 로위나 필로네에요.”

“…….”

입술을 악문 세실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얼마나 날 비웃었을까.”

“세실리…….”

중얼거림을 들은 로위나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불렀지만, 홱 몸을 돌린 세실리아가 하인을 불러 세웠다.

“거기. 부인, 아니 로위나 님의 짐을 받아. 그리고 방을 안내해 드려.”

“알겠습니다. 아가씨.”

고개를 숙인 하인이 자연스레 로위나의 짐을 넘겨받았다.

“가시죠.”

“아……, 네.”

무언가 오해가 생긴 듯했다. 바로 변명하고 싶었으나, 세실리아가 자리를 떠 버리는 바람에 로위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다행히 저녁까지 킬리언과 맞닥뜨릴 일은 없었다. 별채와 본채 사이엔 넓은 중정이 있어 긴 회랑을 가로질러 가야 하기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제가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필요한 건 무엇이든 하녀를 통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닙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급격하게 공손해진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오웬에게 로위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세실리아 양이 보이지 않네요.”

“아. 몸이 안 좋다고 하여 방에서 식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던 오웬이 느릿하게 대꾸했다.

“많이 아픈가요?”

“아니요. 그냥 좀 어지러운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눈을 내리깐 로위나가 조용히 식기를 잡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웬은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완전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이었다. 데본셔 공작이 별채에 머물겠다고 말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잘하면 세실리아와 엮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풀었던 가슴이 눈앞에 앉은 여자의 정체를 듣는 순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사고로 죽었다 알려진 약혼녀이십니다. 곧 공작 부인이 되실 분이지요.

―그, 그럼 대체 왜 정체를 숨기고 다른 남자와…….

―그 이상 묻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더는 궁금해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귀하를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충고 고맙습니다.

제녹이란 남자의 조언을 떠올리며 오웬은 다시 떠오르려는 상념을 고개를 저어 없앴다.

“그럼 제가 뭐라 불러야…….”

“그냥 로위나라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랫것들에겐 단단히 입단속 해 놓았으니 계시는 동안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네?”

“아니에요.”

머뭇거리며 뭐라 물으려던 로위나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이곳에 강제로 머무르게 해 놓고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치지 않은 킬리언이 수상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는 편을 택했다. 어차피 좋으나 싫으나 마주칠 테니까.

* * *

별채의 문이 열린 건 늦은 밤이었다. 고용인들도 소수를 제외하곤 모두 잠이 든 시각에, 기다리던 오웬이 돌아온 킬리언을 맞았다.

“부…… 아니 로위나 님은 식사는 잘하셨습니다. 방도 마음에 들어 하셨고요.”

“그런가요? 수고했습니다.”

피곤한 얼굴로 장갑을 벗은 킬리언이 고개를 까딱했다. 의외로 담담한 모습에 의아해하던 오웬이 침실로 향하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이런 말씀, 외람되지만 한 가지 여쭤도 될까요?”

거침없이 방으로 향하던 킬리언이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돈 그를 향해 오웬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왜 방을 별채로 잡으라 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게 집착하고 먼 이곳까지 찾아 나설 정도면 일 분 일 초라도 곁에 두는 시간을 늘리려 할 텐데 담백하니 당황스러웠다.

“겁이 많은 토끼를 사냥하는 법 압니까?”

“토끼를요?”

“덫과 미끼를 두고 절대 초조해하지 않으면 됩니다.”

담백하고 명료한 대답이었다. 무언가 깨달은 오웬이 눈을 반짝이는데, 다시 걸음을 옮긴 킬리언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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