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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79화 (79/120)

79화

“죽었다니, 말도 안 되지. 살아 있을 줄 알았습니다.”

“…….”

유령이라도 본 듯 넋을 잃은 로위나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늦게 따라 나온 세실리아가 헐떡이며 다가왔다.

“부인!”

순식간에 바뀐 로위나의 안색에 세실리아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생기 어린 뺨도 창백해졌고 이지가 담긴 눈동자도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별채의 손님이 있었다. 외국의 공작이자 아버님의 사업상 협력자가 된.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때, 주저앉은 로위나의 어깨 위로 새카만 재킷이 내려앉았다.

“저하?”

“아무래도 숙녀분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거 같습니다.”

“제가 모실게요.”

“아니요. 내가 모시죠.”

세실리아가 손을 뻗기 무섭게 조심스레 로위나를 안아 든 킬리언이 성큼 문으로 다가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녹이 바깥에서 문을 열자, 언제부터 그 자리에 서 있던 건지 비를 흠뻑 맞은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두 사람이 탄 마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숨죽여 서 있었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느낌이었다. 그녀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 * *

충격에 젖어 인형처럼 안겨 있던 로위나가 몸부림친 건 마차 문이 닫히고 마차가 막 출발할 무렵이었다. 버둥거리는 바람에 가발이 떨어져 숨겨져 있던 금발이 드러났다.

“이거 놔요!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

마차 문이라도 열고 당장 뛰쳐나갈 기색에 킬리언이 그녀의 허리를 안고 제 옆에 앉혔다. 동시에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떨리는 손으로 흥분으로 달아오른 뺨을 만졌다. 그리고 머리칼 한 올까지 샅샅이 살필 기세로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픈 데는 없습니까?”

“뭐라고요?”

“불편하거나 다치거나.”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분노로 달아올랐던 것도 잠시, 이어진 질문에 맥이 풀린 로위나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상황인데 공포는 깨끗이 사라지고 의문이 자리 잡았다. 그가 왜 이러는지 궁금했다. 당장 자신을 속였다며 목을 조를 것 같던 남자가 상상조차 못 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건 질문이 아닌 요구였다.

“당장 날 놔줘요.”

“…….”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신과 나는 사실 오 년도 전에 끝난 사이잖아요. 당신이 날 다시 찾아왔을 때부터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 놔요!”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양팔이 붙잡혔다. 놓으라고 몸부림쳤으나 반항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 친 킬리언이 핏발 선 눈으로 추궁했다.

“끝나? 누가? 죽음으로 날 기만하고?”

목소리엔 고통이 배여 있었다. 그리움마저도 느껴졌다. 잘못 들었으리라. 어떻게 오웬의 저택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재회하자마자 그녀를 납치하듯 마차에 구겨 넣은 남자였다. 끝끝내 로위나가 입을 꾹 다물고 외면하자, 인내심이 닳은 킬리언이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자신을 보게 했다.

“말해요. 로프스 섬에서 어떻게 도망쳤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로렌 세네스 자작 부인과 세드릭 고드웰과는 무슨 사이인지.”

“난 할 말 없어요. 날 놔줘요.”

“로위나 필로네!”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인 킬리언이 손에 힘을 줬다. 말로 하진 않았으나 주변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 느껴졌다. 로위나가 시선을 피하기 위해 꿋꿋이 내리깔았던 눈을 치떴다.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에요. 내리누르고 짓밟고 자신이 갖지 못하면 스스로의 손으로 망가뜨려야 하죠. 반성도 없고 죄책감도 없어.”

“내 말에 대답해.”

젖 먹던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친 로위나가 그의 목깃을 잡았다.

“당신이 먼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죠. 대체 왜 날 찾아온 거죠? 그렇게 비참하게 버렸으면서?”

지금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전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만큼 들이닥친 빗줄기가 마차의 창에 솨아아 부딪혔다. 첨예하게 부딪친 두 쌍의 시선이 허공에서 위태롭게 줄다리기했다.

“지난 5년간 당신을 잊고 잘 살고 있었는데.”

“다시 말해 봐.”

음산하게 말한 킬리언이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았다. 안도, 희열, 그리움, 애틋함이 파도처럼 휩쓸려 간 자리에 뒤늦게 분노가 밀려들었다.

죽음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아들을 데리고 도망친 여자였다. 그간 잠 못 이루던 밤을 생각했다. 여러 의미로 유일하게 그를 자극하는 여자였다. 분노도 증오도 사랑도.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면 가녀린 목을 꺾을 수 있었다.

광기 어린 눈빛을 맞닥뜨리며 로위나가 짓씹듯이 대꾸했다.

“얼마든지 말하죠. 당신을 까맣게 잊었어요. 이곳에 와서도…… 아!”

그녀의 왼 가슴에 손을 얹었다. 코가 옆으로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고개를 숙인 그가 속삭였다.

“그럼 설명해 봐.”

“…….”

“왜 심장은 이렇게 빨리 뛰고 있지?”

대답 대신 로위나는 이를 악물었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여파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해 봤자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으로 들릴 터였다. 이 이상 흥분해 봤자 그녀에게 불리했다. 그에게 더는 휘둘릴 수 없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로위나가 또박또박 반문했다.

“난 도망친 게 아니에요.”

“……뭐?”

“당신에게 아무것도 약속한 게 없으니까요.”

5년 전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순간이었다. 그 또한 기억하는지 눈썹을 꿈틀댔다.

“내가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내 입으로 말한 적 있나요? 공작 부인이 되겠다고 내 입으로 말한 적이 있어요?”

없었다. 단 한 번도. 새삼스레 떠오른 사실에 킬리언이 그대로 굳었다. 틈을 파고들려는데 통보가 로위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시답잖은 말장난은 그만하지. 우리는 에셀우드로 돌아갈 겁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죠.”

“다시 시작해? 누구 마음대로?”

날카롭게 말한 로위나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 맞은편에 앉았다. 당장이라도 마차 문을 열고 싶지만 한창 대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이대로 납치당할 수 없었다. 다시 그 지옥으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데미안. 세드릭. 로렌. 머릿속에 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데미안은 지금 세드릭과 함께 있었다. 끝까지 쫓아와 자신을 괴롭히는 이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킬리언이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생각지도 못한 흉기에 경악한 로위나가 얼어붙은 사이, 그가 그녀의 손에 방아쇠를 쥐여 줬다.

“지금 무슨…… 뭐, 뭐 하는 거예요?”

“쏴요.”

킬리언이 총구를 제 왼 가슴에 겨냥하게 했다. 가파르게 뛰는 제 심장 박동을 들으며 그토록 그리워했던 체취를 들이켰다. 다시는 맡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미쳐 버릴 것 같았던 나날이었다.

“당신이 벗어날 방법은 지금 날 죽이는 것뿐이니까.”

“누가.”

헛웃음을 터뜨린 로위나가 빙긋 웃었다.

“누가 당신을 죽여 준대요?”

“무슨…… 로위나!”

그의 손을 뿌리친 로위나가 총구를 자신의 머리로 돌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굳은 것도 잠시, 킬리언이 손을 뻗는 순간 매섭게 소리쳤다.

“내게 손대지 말아요! 실수라도 방아쇠를 당기면 바로 죽겠죠.”

“……내려놔.”

“당신이 날 억지로 데려가면, 난 이 방아쇠를 당길 거예요. 당신이 내 주변 사람을 해할 때도요.”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은 모험이었다. 장난감에 불과한 그녀가 제 목숨을 걸고 협박한다 한들 그가 들어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킬리언을 마주하며 로위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다. 이대로 끌려가 살아 있는 것만도 못한 삶을 살거나, 아니면 죽음이라도 제 손으로 결정하거나. 데미안이 끝끝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세드릭이 있고 로렌이 있으니 잘해 줄 터였다.

“당장 마차를 세워요. 셋 셀 동안.”

“…….”

“하나.”

수를 세는 목소리가 떨렸다. 좀 전보다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로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둘.”

방아쇠를 조금씩 당기기 시작했다. 셋, 이라고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 그녀를 덮친 손이 총을 빼앗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내놔요!”

“진정해요. 마차는 멈췄으니까.”

무겁게 한숨을 내쉰 킬리언이 총을 제 품에 넣었다.

“못 본 사이에 도박을 배운 모양이지.”

“그 총을 빼앗았다 해서…….”

“나가요.”

마차 문이 열렸다. 동시에 본 밖은 어느새 빗줄기가 한층 약해져 있었다. 속으로 신에게 감사를 고한 로위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대로 빠르게 도망치려는데, 팔이 잡혔다.

“지금은 보내 주지만 잠시 유예를 줄 뿐이라는 거 명심해요.”

“그게 무슨…….”

“로렌 세네스. 그 약을 오웬이 어떤 루트로 내주었다고 생각하지?”

로위나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에 굳었던 입매를 푼 킬리언이 그녀의 뺨을 쓸었다.

“내일부터 루드빌 저택에서 머물러요. 그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이니까.”

그가 외투를 채 걸치지 못하고 나온 그녀의 어깨 위에 제 재킷을 걸치고 우산을 건넸다. 그리고 따라 나온 제녹에게 지시했다.

“모셔다드리도록.”

“예.”

바로 다른 마차에 올라타는 로위나와 제녹을 보며 킬리언은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흥분을 내리눌렀다. 잊어? 그를?

순간 정말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으나 잠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희열과 기쁨을 넘어 분노와 배신감에 죽일 수도 있겠다는 예상은 산산이 빗나갔다. 그는 더 이상 로위나를 강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쥐어짜 내듯 아프고, 도망치듯 마차에서 내린 모습에 누군가 심장을 베어 내는 느낌이었다. 하물며 스스로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의욕이 꺾일 만큼 그는 난생처음 무기력해졌다.

“……돌이키면 돼.”

이제 더는 일방적인 관계로 남고 싶지 않았다. 세드릭 고드웰이란 놈에게 웃어 주었던 것처럼, 그에게 웃어 주길. 그녀의 의지로 함께 공작성에 돌아가길 바랐다.

그를 꼭 닮은 아들을 사랑하니, 그도 사랑해야 했다. 첫 만남 때 기차에서처럼. 서로에게 첫눈에 사랑에 빠졌던 그 날처럼.

너무 늦어 버렸지만, 돌이킬 수 있었다. 돌이켜야 했다. 모든 걸 걸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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