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왜 그래요?”
“어떻게 해요. 그분 같아요…….”
“아.”
곤란한 상황이었다. 험담은 아니었으나 본의 아니게 뒤에서 이야기를 한 셈이고, 심지어 그 이야기가 고백에 가까웠으니. 안절부절못하며 로위나를 바라본 세실리아가 독서실 쪽으로 고갯짓했다. 어떻게든 해 달라는 뜻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실리아의 초조함이 옮았는지 독서실에 가까이 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이 떨렸다.
몇 발자국 앞에 있을 남자는 모르긴 몰라도 오웬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인사를 나누는 게 더 자연스러우리라. 결심하고 노크를 하려는 때였다.
“다이애나.”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운 세드릭이 들어왔다. 성큼 다가온 그가 로위나를 끌어안았다.
“세드…… 아니, 여보?”
“오웬 씨께서 누님의 사연을 듣더니 우릴 도와주신대요.”
“정말요?”
조금 더 거리를 좁혀야 할 줄 알았다. 예상외로 빠른 성과에 로위나가 반색했다. 만면에 미소를 띠운 세드릭이 그녀의 이마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걷었다.
“네. 대신 누님이 나을 동안 세실리아 양의 문학 선생님이 되어 달라는군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쉽사리 승낙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챈 세드릭이 조심스레 로위나를 바라봤다.
“다이애나? 무리라면.”
“아니에요.”
그녀가 제안했고, 함께 시작한 일이었다. 로렌의 건강을 위하여 세드릭만 희생할 수는 없었다.
“기꺼이 할게요. 말벗이 별로 없어 적적했는데 잘됐네요.”
* * *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지,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며칠 후 오웬은 그들이 그렇게 바라던 약을 건네주었다. 출처를 묻지 않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조건이었지만, 그건 어떻든 좋았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로렌의 혈색은 몰라보게 좋아졌고 면회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요새는 몸도 가볍고 기분도 괜찮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로렌.”
“전부 로위나와 세드릭 덕분이죠. 고마워요. 날 위해 무슨 일까지 해 줬는지 전부 들었어요.”
눈시울을 붉힌 로렌이 로위나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을 거예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은혜는 제가 입었는걸요. 도움이 되었다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해요.”
두 여자는 조용히 서로를 보며 마주 웃었다. 로위나의 가슴 깊이 따뜻함이 퍼져 나갔다. 아직 완치까지는 시간이 남았다지만 훨씬 호전된 로렌을 보니 그간의 고생이 비로소 보답을 받는 것 같았다.
“데미안은 잘 지내고 있죠?”
“사실 얼마 전에 올라왔어요. 다음에 데리고 올게요.”
“정말요? 약속이에요.”
“그럼요.”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로렌의 흐트러진 옷매를 털어 주었다. 그런 그녀를 따스한 눈으로 보던 로렌이 결심한 듯 결연한 눈으로 말을 꺼냈다.
“갑자기 이런 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로위나.”
“로렌?”
“우리 정말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충분히…….”
“그 말이 아닌 거 알잖아요.”
말을 돌리려는 로위나의 어깨를 잡은 로렌이 부드럽지만 확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 올케가 되고 데미안은 내 귀여운 조카가 되면 정말 소원이 없을 거 같아요.”
“로렌…….”
“꼭 생각해 봐요. 세드릭이 영 싫은 건 아닌 거 같은데, 데미안을 위해서도. 이건 내 부탁이에요.”
대답 대신 로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처럼 부드럽게 거절할 수 있었지만, 점점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꼭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가족이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세드릭은 좋은 사람이었고 훌륭한 남편이자 다정한 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더는 줄 게 없다는 그녀의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이 결정적이었다.
―그럼 내가 다시 채워 줄게요.
―…….
―당신이 비어 있으면 내가 채워 줄게요. 내 감정은 무한하고 절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으니까.
서로 의지하며 소중하게 여기다 보면 어쩌면 메마른 우물에 물이 차오르듯, 조금씩 조금씩.
상념은 짧았다.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에 로렌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오늘 그 저택에 가는 날이죠?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그럼 또 올게요. 오늘부터는 세드릭이 학회 일로 며칠 자리를 비워서 매일 올 수 있을 거예요.”
“이야기는 들었어요. 데미안도 여행 겸 함께 간다죠? 무리하지 말고요.”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병실을 나와 병원 앞에서 삯마차를 잡아탔다. 답답해 창을 열자마자 축축한 바람이 그녀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화창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밤에는 비가 올 모양이었다.
* * *
얼결에 맡게 된 일이었으나 세실리아는 생각보다 더 성실하고 귀여운 학생이었다. 조금 낯을 가렸던 전과 달리 하루하루 가까워지자 그녀를 언니처럼 따랐다.
“저는 결혼하면 부인과 고드웰 씨 같은 부부가 되고 싶어요.”
“그거 영광이네요.”
“두 사람은 밖에서 봐도 서로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게 보이거든요. 정말 멋있고 보기 좋아요.”
반짝이는 눈동자에 그 나이대 아가씨의 천진난만함과 순진함이 가득 묻어났다. 그녀 또한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부러움 반 그리움 반으로 세실리아를 바라보던 로위나가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고마워요. 세실리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벌써 가시게요?”
책을 덮고 일어나려는 로위나를 붙잡은 세실리아가 덧붙였다.
“오늘은 식사하고 가세요. 네?”
“그런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오늘 고드웰 씨도 학회에 가서 없으시다면서요. 그리고…….”
“그리고?”
중요한 말이 생략된 거 같았다. 다시 앉은 로위나가 눈으로 추궁하자 망설이던 세실리아가 솔직하게 털어놨다.
“오늘 아버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저랑…… 그분밖에 없어요.”
“아하. 그러니까 어색하니 자리를 채워 달라 이 말이군요?”
“그게…….”
짓궂은 말에 뺨을 붉힌 세실리아가 시선을 피했다. 피식 웃은 로위나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저녁 식사쯤이야.”
모르는 남자와 함께 식사하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으나 어차피 세실리아 쪽 손님이었고 그녀는 그저 앉아서 얌전히 식사만 하고 자리를 비우면 될 일이었다.
서재 못지않게 루드빌 저택의 식사실은 넓고 식사도 다채로웠다. 상석을 비워 두고 두 사람은 그 양옆으로 마주 앉았다.
“별채 손님은?”
세실리아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시중들던 하녀가 공손히 입을 열었다.
“방금 인편이 왔는데, 먼저 식사하시라고 하십니다. 조금 늦게 올 거 같으시다고요.”
“그래?”
살짝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린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상황을 피한 로위나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머지않아 하나둘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식기를 든 로위나가 시무룩해진 세실리아 대신 모처럼 대화를 주도했다.
“그나저나, 그분이 어느 면에서 그렇게 좋으신 거예요?”
“일단…… 얼굴이요.”
“얼굴.”
의외로 솔직한 대답에 로위나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황해하는 세실리아를 보며 로위나가 변명했다.
“미안해요. 귀여우셔서…… 후후.”
“계속 웃으시면 이 이야기는 더 안 할 거예요.”
“아니에요. 계속해 줘요. 응? 그중에서 어떤 부분이 제일 매력적인데요?”
거침없이 물었으나 돌아온 다음 대답에 로위나의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보조개가 있어요.”
“보조……개?”
“네. 씩 웃을 때면 파이는데 얼마나 매력적인지 몰라요. 잘 안 웃으시긴 하지만…….”
보조개를 가진 남자. 그녀가 아는 이라곤 단 한 명뿐이었다. 아니. 우연의 일치일 게 분명했다.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편 로위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로위나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세실리아가 슬쩍 상체를 숙였다. 귀를 가까이 대라는 몸짓에 장단을 맞춘 로위나가 되물었다.
“신기하게?”
뒤에 선 하녀들을 의식하듯 손을 들어 올려 입을 가린 세실리아가 속삭였다.
“왼쪽에만 패여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로위나는 얼어붙었다. 낮부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거센 바람이 창틀을 흔들었다.
“외국분……이신가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에 입술마저 떨렸다. 몸을 바로 한 세실리아가 로위나의 모습에 조금 의아한 얼굴로 대꾸했다.
“네. 저번엔 보는 눈이 있어서 솔직하게 말씀 못 드렸지…… 부인?”
세실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로위나가 도망치듯 긴 식탁을 돌아 식사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부인?”
당황한 세실리아의 말이 따라붙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투도 챙기지 않은 로위나는 바로 현관을 향해 뛰었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침대 아래에 몰래 돈을 숨겨 놨었다. 그 비상금을 챙겨 데미안과 함께 이 도시를 벗어나야 했다. 어디 먼 외국으로 가서…….
“우산을 놓고 오셨군요. 부인.”
“아, 감사합니…….”
놀란 하녀들을 지나 현관으로 간 로위나에게 누군가 우산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며 고개를 든 순간,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로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오랫동안 두려워하며 피하려 하던 일이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신……, 당신이…….”
틀림없는 그였다. 잔머리 한 올 없이 쓸어 올린 머리카락, 새파란 눈동자와 곧은 콧대. 그리고 붉고 얇은 입술. 어째서인지 눈 밑이 거뭇하고 조금 야위었지만 형형한 눈빛과 그녀의 턱을 움켜쥔 손아귀의 힘 모두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였다.
“로위나.”
“어,어떻게…….”
“킬리언이라고 불러야지.”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눈빛은 오싹할 정도로 집착이 서려 있었다. 한편으론 심장을 저며 내는 듯 애틋했으나 로위나는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