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비올렛 루드빌은 초봄의 신부였다. 새순이 돋기 시작하고 꽃들이 하나둘 겨우내 숨겨 왔던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할 무렵, 화창한 오전 야외 결혼식이 치러졌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남편이 될 남자와 나란히 선 비올렛의 뒷모습은 아름다운 새신부 그 자체였다. 세드릭과 나란히 하객석에 앉은 로위나는 그녀에게 접근 이유가 어쨌건 간에 그 순간은 그녀의 행복을 바랐다.
“참석하여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 주시고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부족한 것 없이 즐겁게 피로연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재력가의 결합이니만큼 결혼식은 성대한 피로연으로 이어졌다. 강단에 오른 오웬의 짤막한 연설에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세드릭과 시선을 교환한 로위나가 강단에서 내려와 하객들로 둘러싸인 오웬에게 다가갔다. 말을 걸려는데, 때마침 세실리아가 그녀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했다.
“고드웰 부인?”
“아. 세실리아 양.”
“오셨군요. 와 주셔서 감사해요. 고드웰 씨. 고드웰 부인.”
“천만의 말씀을요.”
“초대해 주셔서 저희야말로 감사하지요.”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은 로위나가 슬쩍 그들을 번갈아 보는 오웬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고드웰 부인.”
눈치 빠르게 공기를 읽은 세실리아가 부드럽게 로위나를 소개했다.
“이분은 제 아버지세요. 아버지? 저번에 말씀드렸던 다이애나 고드웰 부인과 그 남편이신 세드릭 고드웰 씨예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구면이던가요?”
그제야 입꼬리를 올린 오웬이 세드릭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
“저번 연회에도 초대해 주셨지요. 이번에도 초대받아 기쁩니다.”
“아아. 그랬군요. 초대장 작성은 아내 몫이라.”
관심은 잠깐이었다. 가면을 쓴 로위나를 보며 잠시 의아해하던 오웬이 이내 고개를 돌려 다른 무리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고지가 코앞이었다. 이대로 대화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멀어지는 오웬의 뒷모습에 초조해진 로위나가 다가가려는데, 세드릭이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내가 이야기할게요. 그러니 잠시 쉬고 있어요.”
“……부탁할게요.”
어제의 일로 어색해진 로위나가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웃어 보인 세드릭이 오웬의 무리 쪽으로 다가갔다.
홀로 남은 로위나가 돌연 목이 말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몇 걸음 앞에 웨이터가 보였다. 웨이터에게 다가가는데, 옆 사람에게 밀쳐져 중심을 잃었다. 털썩 주저앉나 싶을 때 누군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감사합…….”
“다이애나 고드웰?”
“그런……데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휘감았다.
일으켜진 로위나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동시에 얼어붙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절 어떻게 아시죠?”
모골이 송연해진 게 무색하게도 그녀가 악몽에서나 보던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냐고 물었는데요.”
“가면을 쓰셔서요. 더불어 방금 세드릭 고드웰 씨와 함께 있는 걸 보기도 했고요.”
경계 어린 질문에 돌아온 건 맥 빠질 정도로 상식적인 대꾸였다. 민망해진 로위나가 낯을 붉혔다.
“그렇군요. 아까는 잡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담백하게 웃은 남자가 멀어졌다. 찜찜함을 털어 낸 로위나 또한 관심을 거뒀다. 고개를 돌리자 때마침 오웬과 다시 대화를 튼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빙긋 웃은 로위나가 그쪽으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를 멀찍이 바라본 조금 전 남자가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 * *
남자가 향한 곳은 피로연장과 멀찍이 떨어진 어느 사륜마차였다. 마차 안으로 들어오자 의뢰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거두절미하고 연회에서 마주쳤던 여자들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오랜만에 받은 이상한 의뢰였다. 피로연장에 초대된 모든 여자를 관찰하고 보고하라는.
은밀하고 이상한 의뢰를 한 것과 별개로 그의 보고를 듣는 내내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의뢰인이 반응한 건, 그가 마지막으로 마주친 여자에 관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긴 다리를 꼰 채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앉은 킬리언이 창밖을 향했던 고개를 돌렸다.
“……가면뿐 아니라 가발도 하고 있었다고?”
“네. 안쪽 머리칼은 못 봤지만, 확실합니다.”
“이름이.”
“다이애나 고드웰. 세드릭 고드웰의 아내입니다. 최근…….”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공기가 험상궂어지더니 차가운 냉기가 마차 안에 내려앉았다. 급속하게 내려간 온도에 남자가 어깨를 움츠렸다.
로위나를 다시 마주친 건 오웬의 연회에서였다. 만약 또 마주치게 된다면 분명 오웬이 주최한 연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건 없었다.
“……계속해요.”
“……최근 세드릭 고드웰의 큰 누님인 로렌 세네스 자작 부인의 유전병이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했고 그 때문에 부부가 수도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가면. 가발. 갑자기 나타난 부부. 유전병. 병원. 오웬.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단어들이 한데 얽히고 섞였다 다시 해체되길 반복했다. 분명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엔.
“이전 기록과 로렌 세네스의 유전병에 대해 조사해요. 그럼 이 돈의 두 배를 주죠.”
생각을 마친 킬리언이 품을 뒤져 약속했던 수표를 건넸다. 기쁘게 대가를 받은 남자가 마차에서 뛰듯이 내렸다.
남자가 떠나자마자 마부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녹이 빈자리를 채웠다. 어쩐지 달라진 공기에 슬쩍 킬리언의 눈치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있긴 하죠.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모르겠지만.”
말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표정은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고 기쁜 것처럼도 보였다.
“오웬과 거래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유가?”
“쓸모가 꽤 많아질 것 같거든.”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킬리언이 선잠을 청했다. 채찍 소리와 함께 투레질한 말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로위나와 세드릭의 목표는 순탄하게 이어졌다. 로위나가 오웬의 주변 사람들과 친해져 결혼식에 초대받은 것부터 시작해, 세드릭이 오웬의 취미인 체스로 접근한 게 성공적이었다.
“체스 선생을 마침 구하고 싶었는데, 내가 인복은 있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저야말로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으니 제 복이지요.”
“그런가? 하하하! 연구만 잘하시는 줄 알았는데 말도 달변가시로군.”
너스레를 떤 오웬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체스 말을 옮기고 상대편 말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일주일에 이틀. 두 시간씩.
이 자리는 다름 아닌 세드릭이 제안한 자리였다. 자신이 체스를 가르쳐 주는 대신, 루드빌 저택 개인 서재에 있는 귀한 책들을 빌려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물론 이는 그저 조건에 불과했다. 은밀히 하고 있는 뒷세계의 사업을 통해 로렌의 약을 구해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가까워질 필요가 있으니까. 오늘이 그 첫 수업 날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위나가 부드럽게 인사했다.
“오늘 저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부인도 작가이시니 당연히 흥미가 있으시겠죠. 서재는 세실리아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 세실리아?”
“그럼요. 아버님. 같이 가시죠. 부인.”
오웬의 눈짓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세실리아가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일어나 응접실을 나가며 로위나는 마지막으로 세드릭과 시선을 교환했다.
세실리아를 따라간 서재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마치 작은 도서관 같았다. 방금 있던 응접실의 두 배 정도 되는 넓이에 천장은 평범한 천장의 두 배 정도의 높이였다. 사면을 메운 책꽂이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이곳에는 온갖 분류의 책이 많아요. 사다리는 저기 있고요. 소설책은 이쪽에 있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아버님이 아무래도 무역업을 하시니까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고서와 진귀한 책을 모으셨거든요.”
세실리아의 눈빛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웬이 불법으로 밀항과 밀수를 주도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준 로위나가 책 하나에 손을 뻗었다. 그것을 펼쳐 읽는데 세실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신기하네요.”
“네?”
“현재 아버님이 접대하시는 귀빈께서도 같은 책을 고르셨거든요.”
“……그래요?”
구석에 있어 눈에 띄지 않는 책이었다. 별 이상한 우연도 있다 생각하며 로위나가 고개를 들었다.
“귀빈이라면 저번에 말씀하신 그분인가요?”
“아. 네…….”
뺨을 붉힌 세실리아가 시선을 피했다. 수줍어하는 모습에 로위나가 빙긋 웃었다.
“전에는 좀 부담스러워하시는 것 같더니 오늘은 반응이 다르시네요.”
“그게…….”
몸을 비비 꼰 세실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마 전부터 별채에 머무르시게 됐거든요.”
“어머.”
발그레한 뺨을 본 로위나가 가만히 미소했다.
“저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몸이라, 사실 마주칠 일은 없지만…… 저녁이면 같이 식사하시거든요.”
“호감이 있으신 거군요.”
세실리아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열정적인 눈으로 물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부인?”
“물론이죠.”
“남편분과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신 거예요?”
“아. 그게…….”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한 로위나가 대답을 쥐어 짜내는 사이,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로위나와 세실리아가 거의 동시에 얼어붙었다. 소리가 난 쪽은 다름 아닌 서재에 딸린 작은 독서실이었다. 조금 넓은 고해실처럼 마련된 공간이라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볼 수 없었다.
로위나가 누구냐고 눈으로 묻기 무섭게 세실리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