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한 킬리언을 급하게 뒤따라온 제녹이 목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었다.
“헉헉…… 저하!”
“없군. 없어.”
“네? 무슨 말씀이시죠?”
“방금 지나쳤던 것 같은데.”
지나친 건 일순간이었다. 인적 드문 대로변에서 한 마차가 지나치는 순간, 킬리언이 뛰어내리듯 마차에서 내렸다. 당황한 제녹이 뒤늦게 말을 세우고 뒤따랐을 때는 그가 한참을 안개 자욱한 밤거리를 달리고 난 후였다.
“무슨 소리십니까?”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쿵쿵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킨 제녹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굴 지나쳤다는…….”
“로위나.”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한 킬리언이 핏기 어린 눈으로 홱 몸을 돌렸다. 뒷걸음질 친 제녹이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전 못 봤습니다. 스쳐 지났다 해도 한순간이었고 어두운데 어떻게…….”
흐려진 말끝을 한 귀로 흘린 킬리언이 마차가 사라진 길 끝을 노려봤다. 마차가 지나가는 순간, 그동안 다 나은 줄 알았던 왼팔이 시큰거리며 고통이 찾아왔다.
발작적인 통증에 미간을 좁힌 것도 잠시, 시꺼먼 밤 중 짐승이 본능적으로 냄새와 촉감을 더듬어 제 짝을 찾듯 반사적으로 로위나를 느꼈다. 실오라기 같은 냄새 하나, 바람 하나도 그냥 스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잔뜩 곤두서 있었다. 어떻게 모든 오감이 예민해질 수 있는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미친 것 같습니까?”
날 선 말에 제녹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사람을 풀어 찾고 있고 오웬 씨 또한 암암리에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하니 곧 찾으실 겁니다.”
“내 인내가 곧 끝날 거 같다 전해요.”
“……예.”
나직하지만 확실한 경고에 제녹이 묵례했다.
혹시나 숨어 있다면 금방 찾으리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로위나 필로네를 찾는 건 예상외로 난항이었다. 연회 초대장을 받은 사람부터 하루 삯을 벌러 일하러 온 사람까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찾았지만 외국인은커녕 외국인의 이름을 가진 여자조차 없었다. 그렇게 한 여자를 찾아 헤매는 동안, 공작의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불면은 길어졌다.
제녹은 차라리 로위나가 정말 그 섬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완전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
* * *
오랜만에 엄마와 만난 데미안은 그간 못했던 응석을 전부 부리려고 작정했는지, 한시도 로위나와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했다.
“어떨 때는 훌쩍 자라 금세 내 품에서 떠날 거 같은데, 요즘은 또 아직 아기구나. 한참 멀었구나 싶어요.”
평화로운 오후였다. 로렌의 상태는 모처럼 괜찮아 보였고 밤에는 따로 연회도 없었다. 책을 다섯 권이나 읽어 달라며 졸라 대던 데미안은 로위나가 세 권째 동화를 덮자마자 마법에 걸린 듯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세드릭은 그 모자 옆에서 마치 가족의 일원처럼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말없이 로위나와 데미안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한탄 같은 말에 불쑥 물었다.
“그래서 좋은 거예요, 싫은 거예요?”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당연히 전자죠.”
밉지 않게 눈을 흘긴 로위나가 제 무릎을 베고 자는 데미안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세드릭이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다행이네요. 아니면 내가 데미안을 몰래 데리고 가출해야 하나 했다니까.”
“내 아들인데 왜 당신이 데리고 나가요?”
“원래 아내가 화나면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잠시 나갔다 오는 거거든요.”
“미혼이면서 정말 아는 것도 많…….”
오랜만에 보는 능청스러움이었다.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린 로위나가 받아치려는데, 돌연 손을 뻗은 세드릭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쉿.”
언제 노크 소리를 냈는지 조용히 들어온 하녀가 데미안이 널브러뜨린 장난감과 책들을 정리하고 다 먹은 찻잔과 찻주전자를 치웠다. 하녀가 주변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다시 나가는 사이, 세드릭은 로위나의 어깨를 휘감고 있었다. 로위나는 그런 그에게 기대어 사이좋은 부부를 연출했다.
위장은 하녀가 나간 뒤에야 풀렸다. 긴장된 숨을 내뱉은 로위나가 제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을 내렸다.
“깜짝 놀랐네요.”
“그러니까요.”
집 안에서까지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곳은 시골 영지도 아니고, 하녀는 충성심 높은 영지의 하녀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어떻게 그녀의 조카라고 속였지만, 둘의 사이를 부부라고 못 박은 이상 자연스럽게 보여야 했다. 그나마 타운하우스의 하녀들은 밤이면 퇴근하기 때문에 같은 침실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연기해야 하죠?”
어색하게 웃은 로위나가 괜스레 곤히 자는 데미안의 옆얼굴을 내려다봤다.
“곧 끝날 거예요. ‘연기’는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으로 어색해진 공기 속에서 세드릭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로위나.”
“…….”
“이젠 날 어떻게 생각해요? 농담이 아니고 진심으로.”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든 로위나가 열기 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드릭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은 사람이요.”
“…….”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요.”
“그게 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든 세드릭의 손이 유혹하듯 깍지를 꼈다. 속수무책으로 손을 내준 로위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그녀의 손바닥을 뒤집어 제게 가져온 세드릭이 그대로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말캉하고 따뜻한 감촉에 놀란 로위나가 그에게서 손을 빼냈다.
“불쾌한가요?”
“……아니요.”
불쾌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들뜨거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거나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편안하고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데미안과 있을 때 데미안이 행복해 보여 좋았고, 그녀에게도 뙤약볕 아래 그늘이 되어 주어 고마운 사람이었다.
“세드릭. 난.”
그녀는 이런 쪽으로 눈치가 그다지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녀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세드릭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올곧게 자신의 마음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유감스러운 첫 만남으로 그를 밀어낸 것도 얼마 가지 않았고, 조금씩 조금씩 넉살 좋게 거리를 좁혀 오는 남자에게 로위나는 제 옆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로렌과 같은 자리였다. 그가 원하는 자리는 내줄 수가 없었다.
“누님, 로렌에게 미안해서예요?”
“……아니에요.”
“그럼. 내가 남자로 느껴지지 않나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요.”
“당신은 어쩌면 데미안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거예요. 내게도 좋은 남편이 되어 줄 테고요. 난 당신의 그늘에서 편안하게 살 수도 있겠죠.”
“그럼 잡으면 되잖아요. 내게 흔들리지 않나요?”
흐려진 목소리에 로위나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래. 흔들리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었다. 남자로서의 그가 아닌, 남편으로서의 그가. 어릴 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손에 자랐던 자신이었다. 다정한 남편을 만나 귀여운 아이를 낳고 싶었다.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누리고 싶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바로 그녀가 그려 온 꿈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아니 그랬기에 로위나는 세드릭이 내밀어 준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럼 당신이 너무 가엾어요.”
“……어째서.”
“그거 알아요? 세상엔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고 쏟을 수 있는 감정의 총량이 있대요.”
“…….”
“그것이 사랑이건, 증오건.”
그녀는 그 감정을 모두 단 한 사람에게 쏟아부었다. 그 감정의 이름을 채 알지도 못했을 때 이미 카펫 위에 쏟아 버린 찻물처럼 그녀의 모든 감정과 열기를 전부 망설임 없이 쏟아 버렸다.
“난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게 됐어요. 당신은 당신 자체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니까.”
그녀는 이제 텅 빈 찻주전자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줄 수 없기에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는 사랑받아 마땅한 좋은 남자니까.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어 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데미안을 깨우려던 때였다. 커다란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럼 내가 다시 채워 줄게요.”
벼락이 꽂힌 듯 신선한 충격이 그녀를 일깨웠다. 옅게 미소를 띤 세드릭이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이 비어 있으면 내가 채워 줄게요. 내 감정은 무한하고 절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으니까.”
“세드릭…….”
“그러니까 천천히 잘 생각해 봐요. 이렇게 좋은 남자 다신 없을 거니까.”
“하지만.”
“잘 자요. 내일은 아침부터 같이 비올렛 양의 결혼식에 가야 하니까.”
로위나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세드릭이 멀어졌다. 고개를 돌린 로위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