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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75화 (75/120)

75화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이후, 세드릭과 로위나를 찾는 초대장은 점차 늘어 갔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사흘 정도 그중 꼭 필요한 곳만 참석하며 인맥을 점차 늘려 갔다.

낮에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로렌을 문병하고 오웬에 대한 정보를 찾는 식이었다.

“내일 저녁, 오웬의 예비 며느리가 초대했어요.”

“정말이에요? 좋은 소식이네요.”

화색 한 세드릭이 로위나가 건넨 초대 카드를 읽다 잠시 미간을 좁혔다.

“여자만 참석이라. 별로 예감이 좋지 않은데요. 꼭 가야 할까요?”

부부 동반 모임만 참여하던 터라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손에서 다시 카드를 가져간 로위나가 빙그레 웃었다.

“오히려 더 잘된 일이죠. 본래 이성이 없는 자리에서 솔직한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그렇지만.”

“어차피 긴 시간도 아닐 거예요. 이런 자리가 흔치 않다는 거 알잖아요.”

“그건 그렇죠.”

크고 성대한 연회를 주최한 것과 달리, 조사해 본 오웬이란 인물은 사실 사교계에 교류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귀족들이 신분 때문에 알게 모르게 밀어내는 것도 있었고 본인도 사업상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굳이 시간 내 교류를 하지 않는 탓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별로 예감이 안 좋아요. 암암리에 뒷세계에서 일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의 며느리가 될 여자라면 방심해서는 안 될 거예요.”

“세드릭.”

머뭇거리는 세드릭을 달래듯 부른 로위나가 덧붙였다.

“분위기가 이상하면 금세 빠져나올게요. 약속해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흔들림 없는 눈빛에 안심하듯 표정을 누그러뜨린 세드릭이 그녀의 손을 슬쩍 잡고는 제 뺨에 갖다 댔다.

“무리하지 말아요. 남편으로서 부탁이에요.”

“‘임시’겠죠.”

“그래도 지금은 남편이니까요.”

눈을 깜박인 세드릭이 다정한 시선으로 로위나를 내려다봤다. 로위나 또한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드릭을 빤히 바라봤다.

다른 이의 눈으로 본 두 사람은 완전히 알콩달콩한 신혼부부였다. 혹시나 어색하지 않도록 두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도 거리를 좁힌다는 게, 어느덧 이 정도의 접촉은 자연스러워졌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 둘은 소나기에 옷깃이 젖듯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공기에 마음을 내려놓다가도 불현듯 치미는 그 밤의 일에 순식간에 불안감이 평온을 덮쳤다.

“……로위나?”

슬그머니 잡힌 손을 뺀 로위나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불쾌했다면.”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낮에 누님을 보고 왔죠? 어서 쉬어요.”

“네. 그럼.”

세드릭을 스쳐 지난 로위나가 계단을 올라 침실로 들어왔다. 방문을 닫자마자 방금 그녀를 덮쳤던 한기가 다시금 손끝부터 파고들어 왔다.

―로위나.

―…….

―로위나…….

분명 가슴을 헤집듯이 절절하고 들끓는 목소리였다. 거칠고 쇳소리가 섞였지만 틀림없는 그의 목소리였다.

“아닐 거야……. 그 남자가 여기 있을 리 없어.”

방문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은 로위나가 귀를 막았다. 아직도 한 팔에 휘감겼던 허리가 욱신욱신하고 어깨에도 댈 듯이 뜨거운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괴물이라도 본 사람처럼 허겁지겁 연회를 빠져나왔었다. 그리고 세드릭 몰래 하녀에게 최근 신문을 모조리 사 오게 했다. 킬리언 데본셔는 무려 타국의 공작이었다. 이 먼 외국에 왔다면 분명 대대적으로 기사가 났을 터였다. 시골의 여학생들도 알 만큼 유명한 사람 아닌가.

그 이유로 에셀우드의 공작이 크로티아에 왔는지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더불어 킬리언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자 로위나는 조금씩 그 밤의 일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었나. 아마 이름을 불린 건 환청을 들었을 터였다.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발버둥 친 끝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확실하지 않은 일이고 로렌의 일로 이미 충분히 힘든 세드릭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비밀로 한 일이었다.

“오웬을 찾고 약을 구해서 로렌이 나으면 돼. 그리고 같이 영지로 돌아가면 끝나.”

스스로를 달래듯 중얼거린 로위나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걸로 끝나는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세드릭과 함께 다시 영지로 돌아가면 다시 차기작을 쓸 생각이었다. 열심히 돈을 모아 데미안과 머물 작은 집 한 채를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마련하고 싶었다.

* * *

“고드웰 부인!”

북적이는 살롱에서 로위나를 찾아낸 주최자가 다가와 인사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잘 지내셨나요?”

“그럼요. 잘 지냈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분들과 인사 나누시고 자리는 편한 자리에 앉으면 돼요. 마실 거나 먹을 거는 테이블에 종을 울리면 하녀가 가져다줄 거예요.”

“옆에 앉아도 될까요?”

로위나가 간단한 안내 후 자리로 돌아가려는 상대를 붙잡았다. 오웬의 예비 며느리가 될 사람이라 초대에 응한 것이었다.

“아직 아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요.”

부드럽고 예의 바른 부탁에 잠시 눈을 깜박이던 비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럼요.”

가면을 쓰고 다니는 여작가. 처음엔 놀랐지만, 화상을 입은 사람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건 이 나라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남편은 이름 있는 학자니 가까이 지내 나쁠 건 없었다. 그래서 초대한 것이기도 했다.

“그럼 갈까요?”

로위나에게 팔짱을 낀 비올렛이 원래 자신의 테이블로 그녀를 이끌었다.

“이쪽은 다이애나 고드웰 부인이에요. 수도에 오신 지는 얼마 안 되셨어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부인.”

“소설 읽었어요. 이렇게 보게 되어 너무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비올렛과 마찬가지로 호의적인 부인들과 인사를 나눈 로위나가 빈자리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비올렛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앳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흑발로 변장했지만, 원래 그녀처럼 탐스러운 금발을 가진 아가씨였다.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모습에 의아해하는데 비올렛이 한발 앞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 세실. 너무 침울해하지 말아요.”

“비올렛…….”

세실. 이름을 듣는 순간 로위나의 머릿속에서 번쩍이며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세실리아 루드빌.”

“맞아요. 제 예비 시누이죠. 아는 사이세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이름에 귀가 밝은 비올렛이 로위나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전에 연회에서 언뜻 뵌 거 같아서요.”

역시 맞았다. 그늘진 얼굴의 여자는 오웬 루드빌의 고명딸이자 금지옥엽 자랐다던 아가씨였다.

“저를요……?”

뜻밖의 말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세실이 비올렛을 따라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와 똑같은 금발이었으나 눈동자 색은 초록색이 아닌 푸른 벽안이었다.

“반가워요. 세실리아 양.”

역시 오길 잘한 일이었다. 예비 며느리뿐만 아니라 오웬의 딸을 볼 수 있다니.

“저번 연회, 꽃꽂이를 직접 담당하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예뻤어요.”

“아. 감사합니다…….”

화사하게 웃은 로위나가 부드럽게 말하자 얼결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비올렛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요?”

“네. 아버지를 실망시켰잖아요.”

“그냥 인연이 아니었던 것뿐이에요. 세실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누군가 묻자 비올렛이 순순히 털어놨다.

“아버님께서 주최하신 연회에서 귀빈이 계셨나 봐요. 세실과 맺어 주려 하셨던 거 같은데, 미처 찾지 못했던 거죠.”

“귀빈이요?”

“누군지는 저도 몰라요. 중요한 분이라는 것 외엔.”

귀빈. 가만히 듣고 있던 로위나의 심장이 돌연 빠르게 뛰었다. 아닐 거야. 테이블 아래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그녀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외국……분이신가요?”

“호호, 설마요! 그리 아끼시는 막내딸인데 먼 외국분한테 시집보내려 하실까요.”

끼어든 다른 부인이 손사래를 쳤다. 잠시 놀란 듯 말이 없던 비올렛이 뒤늦게 맞장구를 쳤다.

“그건 그렇죠.”

“그런가요. 혹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그래. 우연이라도 그렇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리 없었다. 모두 공연한 걱정이고 우려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로위나가 굳었던 표정을 폈다.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결혼 생활에 대해 조언을 좀 듣고 싶네요. 제 선배이시잖아요?”

자연스레 화제를 돌린 비올렛이 하녀를 불러 차를 새로 내오게 했다.

* * *

모임 내내 웃으며 응대하려 애쓴 보람이 있었는지, 로위나는 비올렛과 세실리아와 어느 정도 친해졌다. 곧 있을 비올렛의 결혼식에도 초대받을 정도였다.

“남편분과 꼭 와 주세요. 약속하실 거죠?”

“그럼요. 감사해요.”

“감사하긴요. 축하해 줄 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걸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세드릭이 있는 타운하우스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찜찜함을 지워 내려 노력했다.

로렌이 병상에 누워 있는 걸 빼고는 모든 게 다 잘되어 가고 있었다. 반년 전, 필사적인 탈출도 성공했고 먼 외국에서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잘 정착하고 힘들게 출간한 소설도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답답하게 쳐진 마차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머지않아 마차가 멈춰 서고 타운하우스에 도착했다.

“다녀왔…….”

문을 여는데 갑자기 작은 몸이 달려와 폭 안겼다. 놀라 굳은 사이, 그녀의 품에서 얼굴을 쏙 든 아이가 활짝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엄마!”

“……데미안?”

못 본 지 좀 되어 그리웠지만 이렇게 올라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눈을 크게 뜬 로위나가 저벅저벅 데미안의 등 뒤로 걸어오는 남자를 쳐다봤다.

“선물이에요.”

“세드릭.”

“요새 기운이 없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엄마?”

굳어 버린 로위나를 올려다본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괜히 올라왔어? 엄만 나 안 보고 싶었어…… 으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저앉은 로위나가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데미안을 보는 순간 모든 불안과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기쁨과 행복이 자리 잡았다.

“안 보고 싶었긴…… 그럴 리가.”

“엄마…….”

“어서 와. 데미안. 보고 싶었어.”

물기 어린 눈으로 아이의 얼굴을 꼼꼼히 살핀 로위나가 말랑말랑한 양 뺨에 입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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