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두 사람의 예상대로 세드릭과 로위나가 떨어지자 그들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대부분 기회를 노려 다가온 이성이었지만, 공개적인 장소인 만큼 무례한 사람은 없었다. 신사들이 막 취하기 시작한 무렵이라 로위나는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밀매라…… 꽤 무서운 소설을 쓰시려나 보군요. 잘은 모르지만 에스딕 항구 쪽 부랑자들이 일용직으로 쓰인다고는 들었습니다.”
“이쪽에서 정보라면 오웬이 제일 아닙니까? 평민 출신이라 쥐새끼마냥 여기저기 엿듣고 다니는 데 소질 있는 건지. 하하.”
에스딕 항구. 오웬이라는 남자. 겉으로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인 것처럼 웃으면서 로위나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웬이란 분은 이 연회를 주최하신 분 아닌가요? 이 근사한 저택의 주인이시기도 하고요.”
“그렇지요. 겉으로는 번듯한 방직상을 운영하는 척하면서 뒷골목에서 온갖 더러운 돈을 만지고 다녔다지요.”
“아무리 이리 성공한 척 으스대면 뭐 합니까. 출신이 출신인데. 쯧쯔.”
열등감을 갖고 있었는지 로위나가 관심을 갖자마자 두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취기 섞인 객기에 질투까지 섞이자 주변 사람들이 슬슬 그들 쪽을 힐긋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두 분 너무 취하신 것 같네요. 조금 쉬다 오시는 좋겠습니다. 그럼.”
“아니. 부인. 조금 더…….”
원하는 이야기는 전부 들었으니 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팔을 뻗는 남자를 피해 자리를 벗어난 로위나가 조급하게 왼쪽 발코니를 찾았다.
그러나 두 개의 분리된 발코니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는데, 확 검은 장막이 내려앉듯 저택이 순식간에 새카매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쩌렁쩌렁한 주최자의 목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신사 숙녀 여러분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손과 온기로 파트너를 찾아 주시면 됩니다!”
웅성거림과 함께 기대와 흥분 어린 곳곳의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넓은 연회장을 감싼 열기에 로위나는 목덜미부터 화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벽을 더듬어 발코니를 찾다 제일 가까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코니라 해 봤자 바깥과 연결된 발코니가 아닌, 밖으로 낸 퇴창으로 두꺼운 커튼까지 쳐져 있어 안과 다를 바 없이 컴컴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또 한 장의 커튼으로 밖의 공간과 구분이 된다는 점 정도였다.
“아직 안 오셨네.”
혼잣말한 로위나가 커튼을 닫고 간이 의자에 앉아 쉬려는데, 홱 누군가 바깥쪽에서 커튼을 열었다. 동시에 거나한 술 냄새가 발코니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도망치면 안 되지.”
방금 전 대화를 나누었던 남자 중 한 명이었다. 인파를 헤치고 그녀를 뒤쫓은 건지 어둠 속에서도 뜨거운 입김과 욕망이 느껴졌다.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할 틈도 없이 로위나를 더 안쪽으로 몰아넣은 남자가 등 뒤로 커튼을 닫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소리 지를 거예요.”
“얼마든지 소리 질러. 남편을 두고 부정을 저지른 아내로 다음날 쫙 소문이 돌길 원한다면. 흐흐…….”
“놔요!”
크게 말했으나 바쁘게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에 묻혔다. 로위나의 팔을 콱 잡은 남자가 두꺼운 손으로 그녀의 가슴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퍽.
“으윽!”
짧은 비명이 들리더니 둔탁한 몸이 바닥에 널브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발로 걷어차인 남자가 씩씩대며 벌떡 일어났다.
“웬 놈……!”
달려들려는 때, 이마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푹 꺼지고 꼬리를 만 남자 줄행랑을 쳤다. 혹시 세드릭일까 싶어 로위나가 반가운 얼굴로 끼어든 인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에요?”
“…….”
“발코니가 두 개나 있어서 걱정했어요. 혹시 당신을 못 찾을까 봐.”
목소리가 작아 못 들은 건가 싶어 목청을 조금 높였으나 인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지도,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가면을 쓴 남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편할 정도로 뚫어져라 보는 눈길에 로위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니군요. 그렇죠?”
조금 전처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망해진 로위나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방금 구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그대로 남자를 스쳐 지나가 발코니를 나가려는 때였다.
“……아!”
등 뒤에서 강한 힘이 커튼 너머로 어깨를 휘감고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망토처럼 두꺼운 천에 휩싸인 로위나가 놀란 숨을 들이켰다. 심장 박동이 귓가에 쿵쿵 울리고 온몸의 피가 뜨겁게 혈관을 돌았다. 잘게 떨리는 손이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더듬고는 속박했다.
도망쳐.
머릿속의 본능이 경고했다. 벗어나야 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뭔가에 칭칭 얽매인 듯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로위나.”
“…….”
“로위나…….”
거칠고 쉰 목소리. 쇳소리가 섞인 듣기 힘든 목소리. 그녀가 알던 매끄럽고 고저 없는 어조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킬리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로위나는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깔깔대는 숙녀의 웃음소리와 낮고 부드러운 속삭임, 분주한 발소리마저도 멀고 먼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느낌을 그녀는 느낀 적 있었다.
한 남자와 관련해서.
“찾았잖아.”
“…….”
“이제 날 죽여도 좋으니 돌아와.”
“…….”
“내 목을 졸라도 좋고, 총으로 쏴도 괜찮아. 유령으로라도 내게 돌아와.”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가슴을 쥐어 짜내는 듯 애절했다. 커튼 너머, 어깨에 닿은 뜨거운 이마엔 무게가 없었다.
로위나는 귀를 막았다.
아니야. 휘둘려서는 안 돼. 이 남자가 여기 있을 리 없어. 이런 목소리로 날 부를 리가 없어. 이건 환상일 거야. 술을 마셔서 그런 거야.
환상이건 현실이건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깊은 우물에 빠진 것처럼, 연회장 안이 온통 아득한 심해인 것처럼 느껴졌다. 부력이 그녀를 가로막은 것처럼 손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불이 켜짐과 동시에 그녀를 찾는 세드릭이 보였다. 번쩍하며 벼락이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린 로위나가 허리를 감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젖 먹던 힘을 다해 남자를 밀쳐 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드릭을 찾아 뛰어갔다. 뒤를 도는 순간, 돌이라도 되어 버릴 것처럼.
* * *
오웬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랜만에 공을 들여 연 연회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부와 성공을 질투하는 꼴불견들이야 있었지만 손님들은 모두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자정의 이벤트가 가히 그 하이라이트였으리라.
가족들과 함께 현관홀 앞에 서서 손님들을 모두 배웅하던 오웬이 한 사람을 눈으로 찾았다. 그리고 한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뛰어가듯 다가갔다.
“여기 계셨군요.”
“오웬 씨.”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찾고 있던 제녹이 오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하는 어디 계십니까?”
“저도 찾고 있었습니다만…….”
난감한 얼굴로 제녹이 말끝을 흐리는 사이, 킬리언을 발견한 오웬이 반색하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저하!”
밝은 얼굴로 킬리언에게 인사한 오웬이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익명으로 오셔서 소개해 드리지 못한 게 한이군요.”
처음 만났던 날, 그들을 뒤쫓아 간 오웬이 제녹을 통해 제안한 게 바로 이 연회였다. 수도의 귀족들과 유명 인사를 전부 초대했으니 이 안에 어쩌면 찾으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명목하였다.
그리고 다른 속내는…….
오웬의 시선이 분주하게 킬리언의 등 뒤를 훑었다. 그의 사랑스러운 딸이 보이지 않았다. 초상화 속 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부러울 것 없이 키워 미인이라는 칭찬을 언제나 들어왔던 딸아이였다. 그녀가 만약 공작의 눈에 든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연회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싹싹하게 물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술은 무표정했다.
“혹 찾고 있던 분을 찾으신 건지요, 아니면 또 다른 인연을……?”
뭔가 잘못된 걸까. 마른침을 삼킨 오웬이 조심스레 묻는 때였다.
“초대 명단.”
가면을 벗어 던진 킬리언이 충혈된 눈으로 명령했다.
“오늘 연회의 초대 명단을 가져와요. 임시로 고용한 도우미도, 하녀들도 모두 집합시키고. 지금 당장.”
불복종은 용납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기세에 눌려 어깨를 움츠린 오웬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을 내려다본 킬리언이 잠시 닿았던 온기를 만끽하듯 입을 맞췄다. 다가온 제녹이 의아하게 보든 말든 어깨를 들썩인 킬리언이 미친 사람처럼 크게 웃었다.
로위나. 그토록 찾아 헤매 겨우 실타래나마 손에 넣었다. 그동안 믿지 않았던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만나 얼빠지게 놓치고 말았지만 그 온기는, 떨림은 분명 틀림없는 로위나였다.
순식간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금세 다시 움켜쥐어야 했다.
설령 그게 유령이건, 살아 있는 사람이건.
“저하.”
부르는 목소리에 웃음을 그친 킬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제녹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 무표정한 뺨 위로 흐르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지만, 아마 착각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