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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73화 (73/120)

73화

“다이애나.”

“세드릭.”

좌석에 앉아 있는 얼굴을 보자마자 반색한 로위나가 그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올라탔다.

“웬일이에요? 지금 바쁠 시간 아닌가?”

“오늘은 내 아내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중요한 자리니까요.”

빙긋 웃은 세드릭이 로위나의 손등에 입 맞췄다. 장갑 위였지만 어째서인지 간질간질한 느낌에 슥 손을 뺀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숨겼다.

“초대받은 연회를 말하는 거군요. 아직 시간 많은데.”

“그 전에 갈 곳이 있어요.”

그게 뭐냐고 물을 틈도 없이 세드릭이 마부석 쪽 유리창을 두 번 두드렸다. 바로 마차가 출발했다.

얼마 안 가 마차가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의상실 앞이었다. 마차 문을 열자마자 가게 밖에서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오랜만입니다. 샤일로 부인.”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세드릭과 여자가 가벼운 포옹을 했다. 문화 차이인지 두 사람의 거침없는 스킨십에 놀란 로위나가 가볍게 굳어 있자 눈매를 휜 샤일로 부인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부인 앞에서 무례를 저질렀군요. 그렇죠?”

“아.”

그제야 로위나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세드릭이 그녀에게 지인을 소개했다.

“소개를 빼먹었네요. 다이애나. 이쪽은 내 오랜 지인인 샤일로 부인이에요. 샤일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고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죠.”

“어머, 그렇게까지 띄워 줄 필요 없어요.”

수줍은 듯 손사래를 친 샤일로 부인이 싱긋 웃었다.

“샤일로 부인. 이쪽은.”

“난 평민이고, 부인도 평민이시라니 격식은 생략하고 인사할게요. 난 샤일로 이슬리테에요. 방금 세드릭이 말한 듯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죠. 외국에서 인연이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친분을 이어 가고 있네요.”

뒤이은 소개를 거부한 샤일로가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예전이라면 이런 거침없는 모습에 주춤했을 테지만, 이미 로렌으로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로위나가 빙긋 웃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런 큰 의상실의 주인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부인.”

“저야말로 영광이죠. 소설 정말 인상 깊게 잘 읽었어요. 더불어 사연은 대략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탐색하듯 그녀의 위아래를 훑은 것도 잠시, 마찬가지로 당당한 태도에 조금 감탄한 듯 입꼬리를 올린 샤일로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럼 들어오세요. 모든 준비는 다 해 놓았답니다.”

“준비……?”

로위나가 고개를 들어 세드릭을 올려다봤다. 어깨를 으쓱한 세드릭이 슬쩍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들어가죠. 부인.”

* * *

샤일로 부인이 말한 ‘준비’란 화려한 색의 드레스와 장신구, 구두까지 총망라한 집합체였다.

“새카만 머리칼과 초록 눈동자에 어울리는 색으로만 준비해 봤어요.”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옷들을 하나하나 옷걸이에 건 샤일로가 그중 세 가지를 추렸다.

“녹색의 새틴 드레스와 검은색의 클래식한 드레스, 그리고 새빨간 드레스가 가장 어울릴 거 같네요.”

과연 의상실 주인의 안목답게 그녀가 고른 것들은 하나같이 로위나와 어울렸다. 오랜만에 접한 사치품에 놀란 것도 잠시, 로위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감사하지만 얼굴은 어차피 가릴 건데 굳이 아름다운 드레스가 필요할까요?”

“다이애나.”

한 걸음 물러서서 두 여자를 지켜보던 세드릭이 나서서 로위나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전신 거울을 향하게 했다. 얼결에 거울을 마주한 로위나가 두 눈을 깜박이자 고개를 숙인 세드릭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굳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어요.”

“…….”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름다움이란 아우라처럼 풍기는 거죠. 외모가 아닌,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 분위기에 따라서. 난 그걸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느꼈고요.”

차분하지만 열기가 어린 시선이었다. 하얀 목덜미를 타고 올라간 제비꽃 같은 눈동자가 이어 단정한 옆얼굴로 향했다.

“이것들은 그저 당신을 조금 더 빛내 줄 도구에 불과해요. 그래서 당신 발치에 바치고 싶은 거고요.”

가감 없는 말에 로위나의 뺨이 확 붉어졌다. 손을 거둔 세드릭이 권유했다.

“그럼 하나씩 입어 볼까요?”

* * *

신분을 가리되 많은 사람 앞에 서야 하는 로위나에게 절묘하게도, 그들이 초대받은 연회는 다름 아닌 가면무도회였다.

한 시간 동안 본인을 소개하며 자유롭게 교류하다가 자정이 되기 전, 불이 꺼졌다.

불이 꺼진 십 분 사이 어둠 속에서 남녀가 서로의 파트너를 찾고, 자정이 되어 불이 켜지는 순간 상대의 가면을 벗기고, 그 남녀는 입을 맞춰야 했다.

이 자정의 이벤트를 노리고 참여한 손님들이 있을 만큼 꽤 인기 있는 크로티아 사교계 특유의 전통이었다.

“고드웰 씨!”

연구와 논문에만 빠져 살았던 학자이지만 세드릭은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존재였다. 불이 꺼지기 전까진 자유로운 교류가 허락되기에 로위나는 세드릭과 함께 관심의 대상이었다.

“어머. 작가님이시라고요?”

“다이애나라면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후원하는 평론가 한 명이 인상 깊게 읽었다더군요.”

“나는 그 책 읽었어요. 조카가 재밌게 읽기에 슬쩍 봤더니 그날 밤을 새웠답니다. 호호.”

가면 너머로 호기심과 질투, 그리고 호감의 시선들이 로위나를 훑었다. 이 나라에서 그리 드물지는 않은 검은 머리카락, 미색의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다른 이들에 비하면 평범하다 못해 묻힐 정도였으나, 우아하면서도 단순한 선을 그리는 새파란 드레스와 길고 곧게 뻗은 팔다리가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액세서리 또한 다채로운 빛깔을 띠는 오팔로 장식해 로위나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세드릭 고드웰 씨의 부인이시라고요.”

학자 ‘세드릭 고드웰’의 부인이라 호기심을 가진 것도 잠시, 사려 깊고 부드러운 로위나의 화술에 사람들이 점점 빠져들 즈음 멀찌감치 그녀를 바라보던 숙녀 한 명이 끼어들었다. 짧게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고드웰 씨가 결혼을 하신 줄은 몰랐네요. 워낙 여기저기 여행을 하시는 분이라 늦게 하실 줄 알았지요.”

“맞아요. 결혼이란 제도에 대해서도 그다지 호의적이진 않으셨던 거 같은데.”

새빨갛게 염색한 깃을 단 쥘부채를 흔들며 숙녀가 눈웃음을 쳤다.

“저는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답니다. 눈이 하늘에 있는 분이거나 아니면, 그 반대거나. 화상을 입은 분이실 줄은……. 물론, 그 미모를 뛰어넘는 매력이 있으실 테지만요.”

칭찬처럼 말했지만, 명백히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깃든 말이었다. 익숙하고 유치한 견제에 로위나가 뭐라 말하려는데, 한발 앞서 로위나의 허리를 감싸 안은 세드릭이 대신 대꾸했다.

“제 눈이라면 저 우주까지 닿지요. 지금 모습도 하늘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랍니다. 식을 올리기도 전에 바로 혼인 신고부터 했을 정도니까요.”

빙긋 웃고 있었으나 그에게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무안을 당한 여자가 탁 소리 나게 부채를 접었다.

“……그렇군요. 그럼 이따 자정 이벤트에서 틀림없이 서로를 찾아내시겠지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청첩장을 드릴 테니 꼭 참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기꺼이요.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입술을 씰룩인 여자가 홱 몸을 돌려 멀어졌다.

“잠시 이리 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일련의 상황에 당황한 로위나가 그를 휴게실로 이끌었다. 사람들을 피해 들어간 휴게실은 원래 객실로 쓰이는 공간이라 분리된 공간이었다. 그들 외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로위나가 허리춤에 두 손을 얹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한 사람의 인맥도 절실한 상황인데.”

“방금 그 여자는 우리 상황에 도움도 안 될뿐더러 잘못 엮이면 오히려 훼방을 놓을 사람이에요.”

“그렇다 해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요.”

“로위나.”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기세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세드릭이 그녀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나도 여기 놀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럼.”

“지금 표정 되게 굳어 있는 거 알아요?”

반박하려는 로위나의 입에 검지를 갖다 댄 세드릭이 차분하게 벽난로 위의 거울을 눈짓했다.

“……로렌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잖아요.”

느릿하게 일어난 로위나가 세드릭이 눈짓한 거울로 다가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가면 너머로도 근심이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놀란 로위나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데, 세드릭이 부드럽게 그녀를 타일렀다.

“많이 긴장하고 걱정되는 상황인 거 알지만, 그럴수록 더 돌아가야 하는 법이에요. 너무 조급하게 굴다간 오히려 더 최악의 상황을 맞닥트릴 수도 있으니까.”

누구보다 더 초조하고 간절할 사람은 그녀가 아닌 동생인 세드릭이었다. 차분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말에 로위나가 긴장된 어깨를 풀었다.

“미안해요. 당신이 이렇게 근사한 선물을 줬는데 하나도 활용을 못 했네요.”

“그 점은 걱정 말아요. 누더기를 입어도 여기서 당신보다 빛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민망하니 실없는 소리 좀 그만해요.”

가식이건 진심이건 수두룩하게 들었던 찬사였다. 하지만 세드릭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부 진심처럼 들려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진정됐어요.”

숨을 가다듬은 로위나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조금 전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밝아 보였다.

“당신을 여러 사람에게 소개했으니 이제 따로 행동해야 해요. 우리 계획대로요.”

“자정에 전원 가면을 벗어야 한다니 그전에 나와야겠군요.”

그녀는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다고는 했으나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걸 알 리는 만무했다.

“로위나.”

서슴없이 허리를 만졌던 좀 전과 달리, 톡 그녀의 손등을 건드린 세드릭이 뒤를 돌아 자신을 보게 했다.

“자정이 되면 왼쪽 발코니로 와요. 커튼 밖에 숨어 있으면 내가 찾아갈게요. 알았죠?”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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