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숨 막힐 정도로 살벌한 공기가 넓은 방 안을 휘감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은 네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결국 기다리다 못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대체 언제 오는 건가! 날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맞습니다. 기껏 귀한 시간을 내어 이 자리에 왔거늘, 아무리 난다긴다한들 여긴 크로티아요! 이곳의 주인들에게 예의는 기본으로 차려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지금 오는 건 공작의 대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본인이 직접 오지 않는 것도 무례지요!”
“자자. 그러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보지요. 먼 나라에서 왔으니 여독도 쌓였을 거고 그러다 보면 늦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불같이 화를 내는 남자들은 대부분 크로티아의 뒷세계를 장악한 조직의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었다. 귀족 출신인 그들과 달리 유일하게 평민 출신인 오웬이 동업자들을 진정시켰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상대를 경계하느라 일부러 답신을 늦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게 복수라는 거요? 이 치졸한!”
“그 말이 아니라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거지요. 이제 저쪽이나 이쪽이나 무례를 당한 건 매한가지니 말입니다.”
“허어!”
생각지도 못한 무례에 다들 씩씩대는 가운데, 시간이 자정을 향해 갔다. 자정을 알리는 뻐꾸기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벌떡 일어난 남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때였다.
“크헉!”
문이 크게 흔들리더니 신음이 들렸다. 소리의 주인공은 문밖을 지키고 있던 호위들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방 안이 얼어붙은 사이,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처음 뵙습니다.”
방에 발을 디딘 건 모자를 눌러쓴 남자였다. 피 묻은 검은 가죽 장갑을 벗은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인사가 늦었군요.”
“이, 이 무슨!”
경악스러운 소란에 얼어붙은 무리 중 한 명이 목에 핏대를 세우려는데, 남자의 뒤로 우르르 들이닥친 수하들이 한순간에 그들의 호위를 제압하고 방 안을 에워쌌다.
겁을 집어먹은 남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결국 총대를 멘 오웬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무례?”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모자라, 호위를 쓰러뜨리시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례? 위협?”
하하! 낮게 웃은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발걸음에 사람들이 움찔한 가운데, 측근으로 보이는 이가 주인의 의자를 뒤로 끌었다. 벌떡 일어난 사람들 앞에서 유유히 의자에 앉은 남자가 모자를 벗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데, 데본셔 공작?”
“직접 올 줄은…….”
훤칠한 장신의 키. 새카만 흑발에 얼어붙을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 냉담한 눈매와 단단히 다물린 입술까지. 확실한 킬리언 막시밀언 데본셔, 록포드의 공작이었다. 입을 떡 벌린 남자들을 슥 훑어본 킬리언이 제녹을 향해 손을 까딱했다.
“귀하들과의 첫 만남을 기념해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무슨…….”
제녹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건 네 개의 상자였다. 오웬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앞에 각각 하나의 상자가 놓였다.
“뭐 이런 걸 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하하.”
뭔가를 눈치챈 듯 말이 없는 오웬과 달리 금세 긴장을 푼 남자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아 허허 웃었다.
“보석이나 이런 겁니까?”
“금도 좋지요. 에셀우드의 것이 우리나라의 것보다 더 순도가 높지 않습니까.”
“난 현금이 더 좋습니다. 하하하.”
“열어 보시지요.”
그 어떤 질문에도 빙긋 웃을 뿐 대답하지 않은 킬리언이 상자를 눈짓했다. 기대에 차 상자를 열기 시작한 남자들이 곧이어 의자에서 나뒹굴어졌다.
“으아악!”
“히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들이 사색이 되어 벽으로 뒷걸음질 쳤다.
“배에 내리자마자 쥐새끼들이 무섭게 달라붙더군요. 그래서 귀하들을 위해 준비한 건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상자에 들어 있던 건 다름 아닌 사람의 안구였다. 협상에 앞서 동향과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몰래 심어 두었던 첩자들의 눈을 마주하자 공포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깍지 낀 킬리언이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다른 부위를 준비하겠습니다. 아직 살려는 두었거든요. 이걸 준비하느라 늦었습니다.”
“…….”
“충분한 대답이 되었겠지요?”
입매를 늘린 킬리언이 유일하게 마주 앉은 오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가 그 자리를 보존할 수 있던 건 첩자를 붙이지 않았고, 그 덕에 ‘선물’을 받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렇군요.”
등줄기를 타고 오한이 지나갔다. 가까스로 대꾸한 오웬이 바지에 땀이 밴 손바닥을 문질렀다.
약혼녀가 바다에 삼켜진 이후, 이전과 달리 공작이 조금 흐트러졌다던 사실은 거짓이었다. 혹시 몰라 방심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이었다.
표정 관리를 하는 사이, 재킷을 뒤진 킬리언이 궐련을 입에 물었다. 옆에 선 제녹이 재빨리 필터 끝에 불을 붙였다. 길게 연기를 내뿜은 킬리언이 궐련을 테이블 위에 짓이겨 껐다.
“나는 날 믿지 않는 사람과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그게 궐련 한 개비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녹이 무언가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건!”
거의 공시에 벌떡 일어난 남자들이 테이블로 다가갔다.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워 그들마저도 발품을 팔아야 하는 약과 방직물이었다. 재료와 원단도 한정된 환경에서만 나오는 데다 숙련된 기술자가 없이는 가공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쉽게 되었습니다.”
침을 흘리는 남자들 앞에서 물건을 거둔 제녹이 킬리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만 돌아가도록 할까요?”
“아니! 그건 안 될세!”
다급하게 말한 남자들이 그간 내심 무시해 왔던 오웬을 바라봤다. 다시 총대를 메 달라는 듯한 눈빛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오웬이 차분히 운을 뗐다.
“누구나 처음엔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씀, 송구스럽지만 우리로선 저하께서 외국인이시니 어느 정도 경계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기회를 달라는 말이군요.”
“……예.”
굴욕적이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들이 내민 물품은 그들에게 있어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줄 물건이었다.
“그럼 드리죠.”
그게 별 대수냐는 듯 끄덕인 킬리언이 제녹에게 무언의 눈짓을 했다. 뒤이어 그가 들고 온 건 웬 초상화였다. 하나의 흠집마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꼼꼼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의아한 눈길이 초상화에 꽂힌 가운데, 하인이 조심스레 천을 벗겨 냈다.
꽁꽁 감춰졌던 초상화에는 미모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에 놀란 사람들이 굳은 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킬리언이 나가기 전 용건을 꺼냈다.
“은밀하게 찾되 누구든 이 여자를 찾는 즉시, 내게 연락해요. 머리카락 하나 건들지 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보며 오웬은 깨달았다.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가 어느 정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사실이었다.
이 먼 곳까지 온 게 거래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한 여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집착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럼 이만 파하죠…….”
먼저 움직이는 편이 유리했다. 얼어붙은 동업자들을 흘깃 곁눈질한 오웬 또한 바쁘게 자리를 떴다.
다른 멍청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초상화 속 여자는 다름 아닌 죽었다는 약혼녀였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지만 먼 곳까지 찾아다닐 정도면, 만에 하나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라고 해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오웬이 대뜸 떠오른 생각에 허겁지겁 킬리언의 뒤를 쫓았다. 주인에 이어 마차에 따라 타려던 제녹을 붙잡았다.
“이보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내 좋은 생각이 있어 한 가지 초대장을 드릴까 하고.”
빙긋 웃은 오웬이 새카맣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마차 안을 흘깃 곁눈질했다.
* * *
기껏 데미안을 뒤로하고 수도에 올라왔건만 로위나는 점점 로렌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상태가 조금씩 나빠지자 환자의 면회가 허락되는 건 오직 하루에 한 시간뿐이었다.
약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며 로위나와 세드릭은 교대해 가며 로렌을 찾았다. 날을 거듭할수록 야위어 가는 얼굴에 로위나는 찢어질 듯 아픈 가슴을 겨우 추슬렀다.
“데미안도 아직 아픈데, 여기 계속 있으면 어떻게 해.”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어요. 로렌이 다 나아서 같이 내려가면 훨씬 좋아할 거예요.”
힘없는 로렌의 손을 꼭 붙잡은 로위나가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니 어서 나아야죠.”
“그렇네요. 계속 마음 쓰이게 해서 미안해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눈물을 삼킨 로위나가 애써 웃음 지었다. 로렌의 웃는 얼굴을 보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엄마가 생각났다. 일이 바빠 제대로 안겨 본 적도 없었지만, 만약 엄마가 그녀를 보고 웃는다면 딱 이런 미소일 것 같았다. 사랑스럽고 안타깝고 또 미안하고 고마운 표정.
두 여자가 서로를 향해 애정 어린 미소를 주고받는 가운데, 면회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또 올게요.”
“그래요. 어서 돌아가요. 오늘 비가 온다고 했어요.”
콜록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로렌이 로위나의 등을 떠밀었다.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마차가 그녀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