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로위나. 거두절미하고 말할게요. 누님의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아요. 열이 많이 올라서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듣기도 해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의사 말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더군요. 하지만 난 누님이 금세 일어나리라 믿어요. 또 편지할게요. ―세드릭 고드웰
어제 늦은 밤에 온 전보였다. 기다리던 편지가 반가운 것도 잠시, 심각한 내용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꾹꾹 내려 쓴 글씨는 차마 티를 내진 않았지만 로렌을 보러 오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으나 데미안이 걸렸다. 부상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한들 아직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상태로 먼 길을 가는 건 말도 안 될뿐더러 수도로 올라간다면 혹시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도 있었다.
“미안해요…….”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사람이 크게 다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다는 게 그녀의 가슴을 옭아맸다. 눈물을 터뜨린 로위나가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편지를 품에 안는 때였다.
“엄마.”
소리도 없이 들어온 데미안이 그녀를 불렀다.
“데미안……?”
미처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고개를 든 로위나가 다가온 아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역시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굳은 로위나가 황급하게 편지를 숨겼다. 그 모습에 데미안이 손을 내밀었다.
“데미안, 이건.”
“편지 보여 줘. 여기 일하는 아줌마 아저씨들도 표정이 안 좋고. 역시 로렌 아주머니나 세드릭 형에게 뭔 일이 생긴 거지?”
이미 들켜 버렸으니 더는 숨길 수 없는 문제였다. 적당히 넘어가려 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에 결국 로위나가 백기를 들었다.
“사실 로렌 아주머니가 많이 아프셔. 그것 때문에 세드릭 씨가 올라간 거야.”
“많이 아픈 거면…… 얼마나?”
“…….”
“죽을 수도 있어?”
간신히 외면하고 있던 말에 로위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에 뜻을 읽어 낸 데미안이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로렌 아줌마에게 가. 엄마.”
“데미안?”
“당장 가서 손잡아 줘. 그러고 싶잖아. 아줌마도 엄마를 보고 싶어 할 거야.”
“데미안. 넌 아직 보살핌이 필요해. 널 두고 갈 수는 없어.”
“엄마.”
가고 싶은 마음이야 가득했지만 머뭇거리는 로위나를 향해 데미안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난 아기가 아니야. 그리고 만약 엄마가 끝까지 로렌 아줌마한테 안 가면 난 엄마한테 정말 실망할 거 같아.”
“가면 언제 내려올지 몰라. 아주머니 상태에 따라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괜찮아. 여기 아줌마 아저씨들 다 좋아. 다 나으면 내가 올라가면 되고.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가. 응?”
엄마를 안심시키듯 웃은 데미안이 로위나의 손을 꼭 잡았다. 로위나는 어느새 부쩍 자란 아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다녀오세요.”
주저앉은 로위나의 뺨에 쪽 입 맞춘 데미안이 다정하게 덧붙였다.
“로렌 아줌마한테 사랑한다고 어서 나으시라고 말해 줘. 엄마.”
* * *
등을 떠민 데미안을 한참 동안 안은 로위나는 그날 바로 수도로 향했다.
사람이 많은 수도에 올라가는 것이니만큼 변장은 필수였다. 혹시 몰라 준비해 둔 검은 머리 가발을 쓰고 모자까지 깊게 눌러쓰니 몰라볼 정도였다.
마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 표를 예매한 뒤, 가장 구석의 외진 자리를 찾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드물어 조금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이틀을 꼬박 철로를 따라 달리고 나서야 기차는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의 기차역은 한적했던 시골과 다르게 활기가 넘쳤다. 기차역을 벗어나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세드릭이 다가왔다. 사람들의 귀를 의식했는지 그가 그녀의 가명을 불렀다.
“다이애나!”
“세드릭.”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로위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해쓱해진 얼굴에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그래요? 누님 집에 머물면서 살이 많이 찌는 바람에 안 그래도 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됐네요.”
가슴 아파하는 로위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능청스레 대꾸한 세드릭이 그녀를 마차로 이끌었다. 병원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세드릭이 먼저 안부를 전했다.
“데미안은 잘 지내고 있죠? 전보를 보고 놀랐어요. 종종 철이 들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엄마인 저도 놀랐어요. 못난 엄마 때문에 일찍 철이 든 건 아닐까 싶고.”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에야 한숨 돌린 로위나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로렌은 어때요? 좀 괜찮아지고 있나요?”
“사실 이틀 전만 해도 노심초사했는데 새로 먹는 약이 맞는지 그래도 어제부터는 조금 나아졌어요.”
“다행이네요!”
기대하던 밝은 소식에 눈물을 글썽인 로위나가 신에게 감사했다.
“정말 잘못되시는 줄 알고 좋아지시길 얼마나 기도하고 간절히 바랐는지 몰라요. 그럼 이제 문제 없는 거죠?”
절실함을 담은 로위나의 눈에 세드릭이 말없이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세드릭……?”
반듯한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본 로위나가 입술을 달싹이려는 때, 절묘하게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네요. 일단 내리죠.”
로위나의 말허리를 끊은 세드릭이 마차 문을 열었다.
“다이애나!”
일 인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로위나는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풍채 좋고 통통했던 로렌의 얼굴은 한층 마르고 여위어 있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그녀는 등을 세울 기력도 없어 보였다.
“로렌…….”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자 로렌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손의 온기에 로위나는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았다.
“왜 울어요. 속상하게.”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데미안이 다친 거 들었어요. 다이애나의 초상화가 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이도 아프니 못 올 상황이었다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고마워요.”
힘없이 웃는 로렌의 이마에 입 맞춘 로위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병실에 우리밖에 없으니 그냥 로위나라고 불러 줘요.”
“그럴게요.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잘 지냈죠? 데미안은 어때요?”
“많이 나았어요. 상처에 흉도 안 졌고요.”
“정말 다행이에요.”
평화로운 재회도 잠시, 쿨럭이기 시작한 로렌이 미친 듯이 기침했다. 당황한 로위나가 로렌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등을 두들겼지만 기침은 멎지 않았다. 손수건을 내려다본 로위나가 사색이 되어 뒤에 서 있던 세드릭을 불렀다.
“세드릭! 간호사를 불러 줘요! 피가!”
사색이 된 세드릭이 뒤돌아 병실을 뛰어나갔다.
* * *
간호사와 의사가 달려와 응급조치를 취한 뒤에야 로렌의 발작이 멎었다. 진이 빠진 로렌이 기절하듯 눈을 붙이고 나서야 세드릭과 로위나는 병원을 나왔다.
타고 왔던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타운하우스에 도착해서야 로위나가 무겁게 운을 뗐다.
“로렌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가요?”
“……모릅니다.”
“예……?”
“이름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라고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사례가 없었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입을 가린 로위나가 더듬거렸다.
“세상에. 그, 그럼 어떻게 하죠? 원인은요? 치료법은 있는 건가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늘진 얼굴로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알아보니 오래전 가족 중에 같은 증상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는데, 유전적인 원인이 작용했을 거라 보더군요. 원래 갑자기 발병하는 병이라고…….”
“맙소사. 하느님.”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로위나가 충격에 몸을 떨었다.
“방법은 없는 건가요? 효과가 좀 있다던 약을 계속 먹으면…….”
“외국에 다행히 같은 사례가 있어 의사가 간신히 외국에서 몇 알만 가져온 약이에요. 효험은 있었으나 지속적으로 복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더군요.”
“돈이라면 내가 보탤게요. 인세로 받은 걸 다 붓는 한이 있어도.”
“로위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눈을 질끈 내리감은 세드릭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의사가 이례적으로 한 번 가져오긴 했으나, 아직 허가받지 않은 그 약을 이 나라에 들이는 것 자체가 불법이에요. 약 자체가 엄격한 품목이다 보니 허가를 받으려면 일 년은 더 걸릴 거고요.”
눈앞이 아득했다. 암담한 얼굴로 세드릭이 뇌까렸다.
“방법은 하나뿐인데…… 거의 불가능하죠. 은밀히 시도는 하고는 있지만…….”
“그게 뭔데요?”
“불법으로 밀수처를 찾아 거래하는 거요. 누님의 인맥뿐 아니라 내 인맥까지 모두 동원해서 찾고 있지만…….”
세드릭이 얼굴을 흐렸다. 언제나 태연하고 당당해 보이는 남자의 약한 모습에 로위나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 또한 이 상황이 힘들고 슬펐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이자 가족인 세드릭만큼은 아닐 터였다.
“나도 힘을 보탤게요.”
등을 두드리는 손에 고개를 돌린 세드릭이 로위나와 눈을 마주했다. 방법을 묻는 눈에 로위나가 웃었다.
“나는 이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진 신예작가예요. 몰랐어요?”
조금 뜬금없지만 일리는 있는 이야기였다. 수도 사교계에는 예술이 유행이었고,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어떤 방식이건 예술가와 연을 맺고 자신의 고상함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잠깐 흔들린 듯 말이 없던 세드릭이 이내 거절했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세드릭. 지금 물불 가릴 상황이 아니에요.”
“최악의 상황이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당신이 거기까지 감수할 수는…….”
그가 말한 ‘최악’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둘 다 알고 있었다. 언뜻 떠오른 얼굴에 잠시 주먹을 쥐었다 편 로위나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말한 대로 해 보려고요.”
“무슨…….”
“변장할 거예요.”
“지금 같은 변장을 말하는 거라면.”
“아니에요. 물론 가발은 계속 쓸 거지만, 가면 또한 쓸 거예요. 얼굴에 화상 자국이 너무 심해 어쩔 수 없이 썼다고 하고요.”
“……그래도 위험해요. 당신은 외국인이라 눈에 띄니까.”
“그럼.”
강경한 반대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던 로위나가 폭탄선언을 던졌다.
“당신의 아내가 될게요.”
생각지도 못한 선언에 석고상처럼 얼어붙은 세드릭에게 로위나가 통보했다.
“물론 신분증까지 증명할 일은 없을 테니, 가짜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