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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70화 (70/120)

70화

데미안이 던진 먹이는 생각보다 멀리 날아갔다. 이쪽을 보며 뒷걸음질 치던 사슴 무리 중 새끼 사슴이 불쑥 가까이 와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먹었다. 그 모습에 활짝 웃은 데미안이 로위나의 손을 꼭 잡았다.

마주 웃은 로위나가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한발 앞서 쓰다듬고 있던 세드릭과 손이 맞닿았다.

아침의 일이 번뜩 떠올라 로위나가 급하게 손을 치웠다. 어색해진 공기를 눈치채지 못한 데미안이 새끼 사슴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나갈 때였다.

“아파!”

덫에 발을 넣어 버린 데미안이 돌연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 * *

저택으로 돌아와서도 한참 울어 대던 데미안은 안정이 되자 곯아떨어졌다. 자는 데미안의 발목을 살펴본 의사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닙니다. 흉도 안 남을 거고요. 다만 며칠 동안은 최대한 걷는 걸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일주일 후에 다시 보러 오겠습니다. 그럼.”

나이 든 의사를 배웅한 로위나가 십년감수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내 함께 있던 세드릭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많이 놀랐죠? 미안해요. 내가 괜히 숲에 가자고 해서.”

“아니에요. 사고였잖아요. 사슴을 보고 데미안도 정말 좋아했고.”

로위나가 감사의 인사 대신 옅은 미소를 되돌려 줬다. 상처가 이만한 건 덫에 발이 걸려 아파하는 아이를 보고 혼비백산한 자신 대신 그가 데미안을 달래고 업고 뛰어 준 덕분이었다. 다행히 데미안은 넓은 등과 커다란 손에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저택으로 가는 동안, 그리고 의사가 올 동안 발목에서 아이의 시선을 떼기 위해 세드릭이 필사적으로 재밌는 이야기를 해줘서였다.

―넓은 바다 너머 다른 대륙에는 귀가 크고 허리가 긴 강아지가 있어. 걸을 때마다 엉덩이를 씰룩씰룩하는데 그 모습이 귀엽거든. 너도 보면 좋아할걸?

―흑…… 정말? 보여 줄 수 있어?

―실물로는 어렵지만 그림을 그려 줄게. 정말 귀엽게 생겼거든.

―꼭이야……?

―약속해. 대신 의사 선생님 오시면 발버둥 치지 말고 얌전하게 진료받는 거야. 알았지?

―응. 알았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데미안은 어린아이가 아닌 금세 훌쩍 자란 소년처럼 보였다.

로위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마치 부자간 같다고 생각했다. 둘만 살던 시절, 길거리를 걷다 몇 번이고 걸음을 멈췄던 데미안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보고 있어 따라서 고개를 돌리면 아버지와 아들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세드릭에게 편안함을 느끼듯 데미안 또한 그에게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그 점이 고마웠다.

“차를 가져올 테니 앉아 있어요.”

“감사하지만 직접 가져올 필요는…….”

“기다려요.”

지친 로위나를 응접실의 카우치에 앉힌 세드릭이 잠시 후 하녀 대신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가져왔다.

어딘가 익숙한 향기에 의아해하던 로위나가 그가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이 차를?”

쑥을 고아 달인 차는 그녀의 고향인 외진 골짜기에서나 먹는 차였다. 쑥 자체도 깊은 시골에나 있는 데다가 가난뱅이들이 먹는 풀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수도로 올라와서는 좀처럼 먹지 못했던 차이기도 했다.

놀라워하는 로위나를 향해 씩 웃은 세드릭이 설명했다.

“좋아할 거 같았어요. 어제 요리사에게 시장 갈 때 보이면 사라고 말했거든요.”

“고마워요. 오랜만에 마시니 더 맛있네요.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맛이냐고 하지만.”

찻잔을 내려다본 로위나가 지그시 웃었다. 솔솔 올라오는 쑥 향에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찻잔의 온기에 눈을 감고 향을 음미하는 가운데,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세드릭이 대꾸했다.

“나도 좋아해요.”

“풉.”

뜬금없는 고백에 아까보다 더 놀란 로위나가 먹고 있던 차를 뱉을 뻔했다. 입을 가린 채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보자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쑥차 좋아한다고요. 뭐라고 생각한 거예요?”

“…….”

당황한 게 민망할 정도로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슬며시 시선을 피한 로위나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린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 설마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니에요.”

“맞는 거 같은데? 너무하네. 매정하게 차 버릴 땐 언제고 좋아한다는 말은…….”

“그만.”

길게 이어질 것 같은 놀림에 머리를 굴린 로위나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로렌은 잘 지낼까요?”

“우리 누님이야 어디 무인도에 던져 놔도 잘 살 사람 아닌가요.”

“그건 그래요. 정말 멋있어요. 못하는 게 없잖아요. 저택 관리, 농사일, 사업, 예술가들 후원까지.”

가볍게 던진 세드릭의 농담에 눈을 반짝인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열성적인 반응에 주춤한 세드릭이 슬쩍 물었다.

“설마 닮고 싶어요?”

“네. 할 수만 있다면.”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양 바로 수긍한 로위나가 발그레 뺨을 붉혔다.

“나도 로렌처럼 그런 멋진 여자가 되고 싶어요. 홀로 서는 멋진 여자.”

놀리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정말 진지한 얼굴이었다. 생각을 바꾼 세드릭이 불쑥 말했다.

“로위나. 지금도 충분히 멋있어요.”

“괜히 띄워 줄 필요 없어요.”

손사래를 친 로위나가 부끄러워하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정말이에요. 아이도 사랑으로 낳아 길렀고 이제는 글도 써서 출판도 했잖아요.”

“…….”

“난 당신이 진심으로 멋있고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여느 때처럼 반쯤 장난 어린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말투였다. 가슴 깊이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느낌에 로위나가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뜨겁고 열정적인 보라색 눈과 마주했다.

“그래서 당신이 좋아요. 당신 남편이 되고 싶고 당신 아이 아빠가 되고 싶을 만큼.”

“세드릭…….”

“거듭 말하지만 청혼은 진심이었어요. 데미안은 날 꽤 좋아하고 따르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번처럼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확실하고 직설적인 고백이었다. 로위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연애라는 걸 해 보기도 전에 정부가 되었기에 이런 상황이 낯설고 어색했다. 이렇게 대놓고 직진하는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에요.”

어쩔 줄 몰라 하는 로위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 세드릭이 기세를 몰아 상체를 숙였다.

“당장은 사랑이 아니라도 좋아요. 친구라도 괜찮으니 생각해 줄래요?”

“그건…….”

“설마 그것마저 안 된다고 하진 않겠죠.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로.”

열기가 넘치는 얼굴에 로위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첫인상이 별로였을지언정, 차츰 알게 된 세드릭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과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로렌을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됐지만, 그를 좋아하는 데미안을 떠올리자 마음이 흔들렸다.

“……좋아요.”

확답은 뒤로 미룬 채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받은 긍정적인 반응에 화색을 한 세드릭이 뭐라 말을 하려는 때였다.

“세드릭 님! 다이애나 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하녀 한 명이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큰일 났습니다! 마님께서!”

* * *

하녀가 들고 온 소식은 다름 아닌 로렌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급작스러운 발작을 하고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됐다.

세드릭이 한 시간도 안 돼서 짐을 꾸리고 마차를 준비했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간신히 이성을 붙잡은 세드릭이 배웅 나온 로위나에게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애써 태연한 척하는 세드릭을 보며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이 걱정되고 초조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친 데미안이 있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괜찮으시겠죠?”

“그럼요. 우리가 방금 말했잖아요. 무인도에 던져 놔도 잘 살 사람이라고. 도착하면 바로 연락할게요.”

아이를 쓰다듬듯, 로위나의 뺨을 한 번 어루만진 세드릭이 마차 문을 닫았다. 마부가 채찍을 내리치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차가 멀어졌다. 로위나는 가슴을 움켜쥐며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봤다.

그렇게 세드릭이 떠나고, 열흘이 금세 지나갔다.

평온했던 저택의 분위기는 살얼음처럼 얼어붙었다. 데미안의 상태는 조금씩 좋아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며 안도하면서도 로위나는 로렌에 대한 불안으로 매일 밤 새벽까지 기도했다.

“엄마. 오늘 로렌 아줌마 편지는? 세드릭 형은 언제 와?”

“편지는 아직 안 왔어. 형은 요새 바쁜가 봐.”

차마 로렌이 크게 다쳤다는 말은 못 하고, 세드릭이 연구로 자리를 비웠다고 말하자 데미안은 목이 빠질 듯 세드릭을 기다렸다.

“데미안이 안 보고 싶은 걸까?”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덫을 멋대로 밟았잖아. 그래서 화난 거야?”

“그럴 리가.”

시무룩한 데미안을 힘주어 끌어안은 로위나가 아이의 뺨에 입 맞췄다.

“그냥 바빠서 그러실 거야. 그보다 우리 오늘 산딸기 잼 만들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맞다! 그랬지?”

심각하다가도 아이다운 천진함을 드러내는 얼굴에 빙긋 웃은 로위나가 데미안의 뺨을 살짝 늘렸다.

“응. 재료 준비할 동안 손 닦고 와.”

“알았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방을 나갔다. 혼자 남자마자 표정을 굳힌 로위나가 서랍에 숨겨 놓은 편지를 펼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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