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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69화 (69/120)

69화

“그런데 세드릭 씨는?”

“형은 오늘 바쁘다고 했어.”

“그래?”

본업이 학자인 세드릭은 평소엔 집무실에 틀어박혀 연구에 매진했다. 장난기 많은 평소와 달리, 집무실에 있을 때는 작은 소음조차 예민할 정도로 연구자 그 자체였다. 시무룩한 얼굴로 침대에 올라온 데미안이 로위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런데 엄마. 형이 어제 낮부터 계속 안 나와. 문밖에 식사도 그대로래. 잠은 자는 걸까?”

“어제부터 그런 거면 걱정되긴 하네.”

아들의 뺨을 부드럽게 쭉 늘린 로위나가 불쑥 제안했다.

“식사도 안 하고 잠도 안 자다니. 나쁜 아이네. 혼내러 가 볼까?”

장난기 어린 눈빛에 벌떡 일어난 데미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 엄마 씻을 때까지 기다려.”

생기 넘치는 대답에 피식 웃은 로위나가 아들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꿈의 내용은 모조리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 * *

“세드릭 씨.”

“…….”

“세드릭 형?”

“…….”

번갈아 가며 부르고, 노크를 했지만 안쪽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간만에 응석을 부릴 생각에 신났던 데미안이 로위나를 올려다봤다.

“자고 있나?”

“그러게.”

자고 있다면 데미안의 수선으로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식은 식사를 내려다본 로위나가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방에 가서 식사를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해 줄래?”

“응.”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멀어지자 로위나는 확인차 다시 한번 노크했다.

“들어갈게요.”

대답은 없었다. 자고 있다고 확신한 로위나가 슬며시 방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드릭 씨?”

로렌이 사용하던 때와 달리 방 안은 마치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들어오자마자 발에 차인 책에서 시선을 뗀 로위나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산처럼 쌓인 책과 논문 사이에서 거의 파묻히듯 불편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로위나는 로렌이 떠나기 전 했던 당부를 떠올렸다.

―천재라고 떠받들지만 사실 내 눈엔 애 같아요. 챙겨 주지 않으면 식사도 잠도 제대로 챙기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번거롭더라도 애 둘 있다고 생각하고 잘 부탁해요.

혹시 집중하는 데 방해할까 봐 어제 하루 동안 내버려 둔 게 실수였다. 아침인데도 어두컴컴한 방 안을 휘 둘러본 로위나가 작게 혀를 찼다.

“방도 엉망이고, 커튼도 안 치고…….”

혹시 집필에 몰두했을 때 자신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내심 콕콕 찔렸다. 곯아떨어진 세드릭을 지나 창가로 다가간 로위나가 굳게 닫힌 암막 커튼을 걷었다.

“으음…….”

갑자기 쏟아진 햇살에 창을 등지고 앉아 있던 세드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 커튼까지 모두 걷고 나서야 로위나가 세드릭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요. 벌써 아침이에요. 자려면 식사라도 하고 제대로 침대에서 자요.”

“으응…….”

잠긴 목소리로 고개를 저은 세드릭이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일어나긴커녕 불편한 자세로 더 자려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만 자라는 말이 아니에요. 일단 방으로 가요. 네?”

“귀찮아요……. 할 것도 많고.”

웅얼거리듯 대꾸한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의지가 되던 얼마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귀를 막아 버리는 행동에 로위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부스스한 머리가 마치 투정 부리는 강아지 같았다. 그것도 말도 안 듣는 대형견.

이러다간 오늘도 종일 집무실에서 콕 박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에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청혼을 받아들였으면 남편이 아니라 다 큰 아들을 얻을 뻔했…… 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이 끌어당겨졌다. 몸의 중심을 잃기 무섭게 상체가 훅 내려가더니 야릇한 미소가 코앞에 드리워졌다.

“무시한 거 아니었어요?”

“……그건.”

“실연의 아픔을 잊고자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자꾸 마음 설레게 할래요?”

추궁하듯 덧붙인 세드릭이 요염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코와 코가 옆으로 맞닿고 입술 또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췄다.

하루 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사람치고는 눈매만 조금 퀭했을 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가까이 보니 역시 흐트러져도 미남은 미남이었다. 이지적인 눈동자와 조각한 듯 완벽한 콧대, 조금 두툼하고 붉은 입술까지. 그와 대비되어 여자보다 긴 속눈썹은 머리칼과 같은 새하얀 색이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가만히 눈만 깜박이던 로위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애 딸린 여자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요.”

“말하는 게 꼭 누님 같네요. 나보다 어리면서.”

코끝을 찡그리며 웃은 세드릭이 그녀의 팔을 잡았던 손을 내려 갈 곳을 잃은 채 책상을 짚은 로위나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나쁜 여자네. 날 갖고 노는 게 재밌어요? 휘두르고 주무르고?”

“못 하는 소리가 없네요.”

데미안과 단둘이 살 시절, 이런저런 추파와 유혹을 받아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는 처음이었다.

“방금 그 말도 농담이라고 생각할게요. 훨씬 어울리는 상대가 있을 거예요.”

“……어울리는 상대라. 누구요?”

“좋은 집안에 아이도 없는 젊고 예쁜 아가씨요.”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더 장난으로라도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은인이자 친구인 로렌의 가장 아끼는 막냇동생이고 앞날이 창창한 남자니까.

“그러니 이제 그런 장난은 그만하고.”

“그걸 누가 정하는데?”

어색해진 공기에 애써 웃은 로위나가 화제를 돌리려는 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추궁했다. 로위나가 주춤하는 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세드릭이 추궁했다.

“당신이 정한 건가?”

“그건.”

“로위나.”

시선을 피하는 로위나의 턱을 돌려 저를 보게 한 세드릭이 통보했다.

“내 마음도, 나한테 어울리는 상대도 내가 정해. 그러니 당신이 말한 그 ‘상상의’ 여자는 정중히 사양할게.”

한 치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는 눈빛이었다. 부드럽지만 언제나 차분한 물 같았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날카롭게 벼려진 칼 같았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놀라 꼼짝도 못 하는 로위나를 보며 빙긋 웃은 세드릭이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아. 참고로 난, 그저 그런 집안에 귀엽고 영리한 아들이 있는 젊고 예쁜 여자가 취향이에요.”

“…….”

“안 궁금하겠지만.”

그 말 그대로 돌려받은 로위나가 잠시 말을 잊은 사이, 문 쪽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세드릭이 침묵을 깨뜨렸다.

“거기 있었구나. 데미안.”

집무실 앞에서 데미안이 어디까지 듣고 어디까지 보았는지 몰랐다. 로위나는 내내 아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데미안이 보기에 부끄러운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못내 마음이 불편할 뻔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다행히 데미안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형. 요 근처 숲에 토끼랑 사슴이 산다며? 보고 싶어.”

“그래? 오늘 날도 풀렸고, 한번 가 볼까?”

“좋아! 엄마도 같이 가자. 응?”

데미안이 가져온 식사를 간단하게 먹고 난 후 미뤄 두었던 잠을 정오까지 몰아서 잔 세드릭은 한결 나은 모습이었다.

점심을 먹다 말고 나온 이야기에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됐어. 둘이 다녀와요.”

“엄마. 그러지 말고 같이 가면 안 돼?”

거절에 입을 비죽 내민 데미안이 졸랐다.

“엄마랑 같이 보고 싶단 말이야. 응?”

언제 의젓하고 철이 들었었냐는 듯 데미안은 이곳에 머물며 날로 응석이 많아졌다. 아마 마음 붙일 곳이라 여겨 그런 건가 싶어 로위나는 단호하게 나올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로위나를 향해 세드릭이 권유했다.

“같이 가요. 요 바로 앞이에요. 오래 안 걸려요. 토끼굴 위치도 알거든요.”

“그럴까요.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행동하는 세드릭 덕분에 아침의 일은 금세 잊혔다. 서점에 갔던 날 이후, 그녀 또한 제대로 바깥 외출을 안 한 지 한참이었다. 바로 앞이라면 금방 갔다 올 수 있겠지 싶었다. 로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날이 풀리긴 했지만, 숲은 흰 이불을 덮은 듯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게 재밌는지 데미안은 새하얀 눈밭을 일부러 힘주어 밟고 다녔다. 한 손은 세드릭을 한 손은 로위나를 꼭 잡은 채였다. 상기된 데미안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은 로위나가 불쑥 물었다.

“좋아?”

“응! 너무 좋아.”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로위나와 세드릭을 번갈아 봤다. 언젠가 꿈꾸던 모습이었다. 가슴 한편에 한 얼굴이 아른거리긴 하지만.

“다행이다. 우리 아들이 좋아하니 엄마도 너무 좋네.”

아들의 손을 힘주어 잡은 로위나가 빙긋 웃는 때였다.

“쉿.”

갑자기 걸음을 멈춘 세드릭이 검지를 입술에 세웠다. 의아해진 두 모자가 그를 바라보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봐요.”

“우와…….”

멀찍이 서 있는 건 뿔이 우람한 수사슴이었다. 로위나와 데미안이 거의 동시에 감탄을 내뱉었다. 눈꽃이 내려앉은 겨울 숲에서 마치 주인인 양 당당하게 이쪽을 보며 우뚝 서 있었다. 그림에서보다 더 크고 멋진 모습에 데미안은 반쯤 넋을 놓은 상태였다.

경계하듯 세 사람을 바라보던 수사슴 뒤로 암사슴 두 마리가 다가왔다. 암사슴을 졸졸 뒤따르는 새끼 사슴을 발견한 데미안이 벅찬 흥분에 로위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무릎을 숙인 로위나가 눈높이를 맞춰 주자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저거 봐봐. 사슴 가족인가 봐. 너무 귀여워.”

“그러게.”

로위나의 눈엔 작은 것 하나에도 쉽게 흥분하고 신나 하는 데미안의 모습이 더 귀여웠다. 서로를 보며 해맑게 웃는 두 모자를 본 세드릭이 대뜸 외투를 뒤지더니 가져온 걸 내밀었다.

“이거 던져 봐.”

작은 종이에 쌓인 건 다름 아닌 환으로 된 사슴 먹이였다.

“멀리 던지는 거야. 할 수 있지?”

“응!”

결연한 눈으로 대꾸한 데미안이 먹이를 한 움큼 쥐고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슴 쪽으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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