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까마득한 검푸른 물결이 배 아래로 출렁였다. 제 여자와 아들이 바다 아래로 사라진 이후, 남자가 처음 내려다보는 바다였다. 금방이라도 바다에 뛰어들 것 같은 모습에 제녹이 슬며시 다가왔다.
“저하. 물살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객실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신경 꺼요.”
“아니면 외투라도 걸치시는 게…….”
냉정한 거절에 안절부절못하며 제녹이 두툼한 외투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내뱉는 숨이 모두 입김이 되어 얼어붙는 날씨였다. 두껍게 차려입은 자신조차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데 위태롭게 뱃전에 선 공작은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가져가요.”
“저하……!”
눈길도 주지 않은 거절에 제녹이 거듭해서 주인을 불렀다. 일등석 객실을 세 개나 전세 내었다 해도 그들이 있는 곳은 수백 명을 수용하는 큰 여객선이었다. 그만큼 보는 눈이 많았고 입도 많았다.
이도 저도 못 하고 서성이는 제녹을 일별한 킬리언이 코웃음을 쳤다.
“소문이라도 날까 봐?”
세간에는 죽은 약혼녀를 잊지 못하는 낭만적인 남자로 포장되었지만, 귀족의 시선은 달랐다.
결혼 후 각자 암암리에 연인을 둘지언정, 겉으로는 집안의 품격과 이름에 걸맞는 상대와 귀족 연감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는 게 상식인 세상이었다. 대개 약혼의 파투는 그저 사업의 무산이었고 따라서 약혼녀의 죽음이란 그렇게 기리거나 애달파할 문제도 못 되었다. 그게 한낱 정부였던 여자라면 더더욱.
반년간 약혼녀가 죽은 섬에 칩거하더니 돌연 식도 올리지 않았던 여자를 고결한 가족 영묘에 빈 묘로 안치하질 않나, 기념한다며 초상화를 공표한다는 연이은 발표에 사람들은 점점 데본셔란 이름에 경의보다는 공포를 느끼게 됐다. 그리고 그 공포는 명확한 사실관계를 기반한 두려움이었다.
사고로 연달아 죽은 두 명의 약혼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제녹을 향해 눈매를 좁힌 킬리언이 덧붙였다.
“내가 로위나를 죽였다더군.”
“누가 그런 망발을!”
듣도 보도 못한 소문에 기겁한 제녹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바다 쪽으로 몸을 돌린 킬리언이 피로한 눈으로 제 두 손을 내려다봤다.
“내 저주 때문이라고 하던데. 데본셔 가문이 묻힌 피의 죗값이라고.”
그의 손에 많은 피가 묻은 건 사실이었다. 거기에 대해 딱히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고 참회한 적도 없었다. 신을 믿은 적도 없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도 않았다. 실소한 킬리언이 이를 악물었다.
“신이건 악마건 있다면 우습지도 않지.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내릴 것이지 아무런 죄도 없는. 그런.”
이어진 말은 뱃전에 부서지는 거친 파도 소리에 묻혔다. 조금 거세진 바람이 여윈 그의 뺨을 매섭게 스치고 지나갔다.
“저하…… 정말 이젠 그만…….”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제녹이 한 걸음 더 다가간 순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내려다본 킬리언이 홱 고개를 들었다.
“유령이 있을까?”
“저하……?”
한 걸음 더 다가가서야 제녹은 옅은 술 냄새를 맡았다.
로위나 필로네가 사라진 지난 반년간, 킬리언은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헤맸다. 필요하다면 가진 모든 걸 동원해 바다를 다 퍼낼 기세였다.
낮이면 미친 사람처럼 모든 섬사람을 동원해 바다에 몰아넣고, 밤이면 독한 술과 담배에 스스로를 절이던 킬리언이 변한 건, 화가가 초상화를 가져온 밤부터였다.
초상화를 받은 이튿날, 드물게 이른 오전에 일어난 킬리언은 뒤늦게 공식적으로 그녀와 아들의 죽음을 인정했다.
동시에 잠시 미뤄 두었던 일들을 다시 손에 잡았으며 우두머리의 부재로 휘청이던 조직을 다시 바로 세웠다.
영묘에 텅 빈 무덤을 만든 날, 홀로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낸 킬리언은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왔다며 안도한 것도 잠시, 오랜 시간 그를 곁에서 보필해 온 제녹은 킬리언의 내면이 무언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킬리언 막시밀리언 데본셔는 그날 이후 근본적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있다면 왜 나타나지 않지?”
무섭게 휘몰아치기 시작한 바다 위에서 형형한 눈빛이 제녹을 옴짝달싹 못 하게 사로잡았다. 소름 끼치도록 번득이는 안광에 마른침을 삼킨 제녹이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유령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모릅니다.”
세상이 바뀌며 엄하게 금지되던 금주령이 느슨해진 게 얼마 전이었다.
비공식적인 방문이었다. 암암리에 운영하는 길리터스 사의 새로운 교역망을 뚫으러 가는 길이었다. 언어가 비슷하다고 하나 구태여 긴 바닷길을 돌아가야 하는 크로티아를 또 다른 교역로로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제녹은 측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킬리언이 굳이 험한 해역을 선택한 건 화가의 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로위나를 크로티아의 여신에 빗대어 말했기 때문에. 단지 그뿐이 아니었음을 그는 이 순간 이해했다.
비바람 속에서 희번덕거리는 새파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저 거칠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창백한 손이 뻗어 나와 제 팔을 잡아당기길 원하고 있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 차갑고 새카만 심해까지 기꺼이 끌려 들어가 주리라 결심한 눈이었다.
“저하. 제발.”
저 광기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하면서도 결코 알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용기를 끌어낸 제녹이 간곡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너무 지치셨습니다. 제대로 주무신 지도 오래되셨고요. 내일이면 크로티아에 도착합니다. 바로 수도로 가셔야 하고요. 그러니 오늘은 이만…….”
“내일……, 내일인가.”
마른세수를 한 킬리언이 핏줄이 도드라진 주먹을 한 차례 쥐었다 폈다.
“그래. 거기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
속삭이는 말은 자기 세뇌에 가까웠다. 부축하려는 제녹의 팔을 뿌리친 그가 아득한 물안개 너머로 모습을 숨긴 나라를 노려봤다.
초상화를 푼 이유는 기념 따위를 위한 게 아니었다. 모래알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처절한 발버둥이자 집착 어린 염원이었다.
낯선 외국을 샅샅이 뒤진 후에 다시 파도치는 바다에 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곳이 차디찬 바다든 먼 외국이건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 * *
“그동안 잘 숨어 있었습니까?”
마주한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대로였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로위나는 더는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는 걸 직감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은 데미안이었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를…….”
“내 말에 먼저 대답하지.”
카우치에 파묻히듯 앉아 있던 킬리언이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매캐한 시가 냄새가 햇살로 가득했던 방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데미안. 데미안을 찾아야 해. 로위나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멀리 보내야 했다. 적어도 데미안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이 남자에게 붙잡힐 수는 없었다. 등 뒤로 손을 가져가 손잡이를 잡는데, 말없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킬리언이 불쑥 일어나 다가왔다.
“오, 오지 말아요.”
“언제까지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차분하면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아무런 높낮이가 없는 어조였다. 앞으로 펼쳐질 일에 두려움으로 질린 로위나가 다급하게 문고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킬리언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발버둥 칠 필요 없어요. 당신도 어차피 날 원하잖아.”
“아니야!”
울부짖듯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뺨을 그러쥔 킬리언을 쏘아봤다.
“아니. 당신은 날 아직도 사랑해.”
다른 한 손을 그녀의 왼 가슴에 얹은 킬리언이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날 끔찍이 무서워하고 증오하면서도 날 사랑하잖아.”
“…….”
“당신은 날 벗어날 수 없어. 로위나.”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잔잔했던 바다에 해일이 일었다. 귓바퀴에 닿는 뜨거운 숨결이 모든 걸 다 태워 버릴 것 같았다.
숨 막히는 열기가 숨통을 조였다.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로위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마!”
“…….”
“엄마!”
언제 들어왔는지 머리맡 의자에 앉은 데미안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악몽에서 막 깨어난 로위나가 눈을 비비며 창문 쪽을 봤다. 늦잠을 잤나 싶었지만 커튼 너머로 힐끗 보이는 밖은 이제 막 해가 뜰 무렵이었다.
“데미안…… 무슨…….”
“편지 왔어!”
졸음에서 허우적거리는 로위나의 말허리를 끊은 데미안이 봉투를 내밀었다.
“로렌 아주머니가 보낸 거야! 무슨 내용인지 알려 줘. 응?”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상체를 세워 봉투를 건네받은 뒤 내용을 읽어 내렸다.
생각보다 장례 일정이 길어져서 더 오래 걸릴 거 같아요. 돌아가려면 최소 열흘 뒤이지 않을까 싶네요. 필요한 건 집사에게 모두 말하고 잘 지내고 있어요. ―로렌
저택의 주인인 로렌이 자리를 비운 건 데미안이 처음으로 반항한 날, 집사가 들고 온 비보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수도에서 병사했다는 소식.
비보를 듣자마자 로렌은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영지를 떠났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지도 어느덧 일주일째였다.
존재만으로도 방의 분위기를 가득 채웠던 로렌이 자리를 비우자 저택 안은 한층 조용해졌다. 저택에 머무는 동안 로렌을 이모처럼 따르던 데미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을 쏟았다.
“로렌 아주머니가 뭐래? 언제쯤 돌아오신대?”
“열 밤 정도 자고 오신대.”
“저번에도 열 밤이었잖아.”
“응. 좀 더 늦게 오실 모양이야.”
“그렇게 늦게?”
“장례식 일정이 길어졌대. 그리고 겨울이잖아. 여기서 수도까지는 거리도 멀고 마차가 느린 건 어쩔 수 없는걸.”
축 처진 데미안의 등을 두들긴 로위나가 불쑥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