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부는 도망친다-67화 (67/120)

67화

“그건…….”

만약 킬리언이 그녀와 데미안을 찾으면 어떻게 될까. 불현듯 떠오른 가정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자신은 데미안의 정체를 숨긴 것도 모자라 죽음을 가장하여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으니 가만두지 않을 건 확실했다. 아마 그들 모녀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 게 분명했다.

이를 테면 그녀를 어딘가 가둬 두고 데미안과는 평생 만나지 못하게 한다거나……. 제 자식이라 한들 귀족 연감에도 없는 데미안을 끔찍한 군사학교에 보낼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무서운 점은 더는 킬리언의 생각과 행동을 예상할 수 없다는 거였다.

애써 외면해온 탓에 오늘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는 바로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말은 까마득히 잊고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혼하지 않았다. 거기다 반년 전 죽은 그녀의 무덤까지 만들고, 초상화까지 공표하겠다고 하기까지.

원래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말 몇 마디로 들은 소문조차 옅은 광기가 느껴졌다. 로위나는 그 광기의 원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물건은 버려도 자신이 버리는 사람이었다. 제 소유의 것이 도망쳤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변하는 건 예상치 못했지만.

무서운 사람. 생각하니 등줄기부터 오싹한 감각이 올라왔다. 양어깨를 감싸 안은 로위나가 공포에 입술을 떠는 사이, 마찬가지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느라 말이 없던 세드릭이 불쑥 물었다.

“여길 떠나서 어떻게 숨을 건데요?”

“어디든 다른 나라로 가서 정착해야죠.”

“평생? 평생 도망 다니면서 살 건가요? 데미안까지 데리고?”

“…….”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외삼촌인 제레미 디쉬 씨가 지원해 준다 해도 한계가 있고, 데미안이 자라는 환경으로도 떠돌이 생활은 최악이란 걸.”

어린아이를 달래듯 차분하게 덧붙인 세드릭이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로위나는 그런 세드릭의 얼굴 위로 무심코 제레미를 겹쳐보았다.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작 네다섯 살인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도 그가 지금은 아득히 어른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지치고 힘들 땐 어쩔 수 없이 기댈 사람이 필요했다. 외삼촌인 제레미가 그녀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래도 여기 있을 수는…….”

상념은 잠깐이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다시 입을 여는데, 다가온 손에 말문이 막혔다. 흐트러져 흘러내린 긴 금발의 끄트머리를 툭 건드린 세드릭이 불쑥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다이애나. 흑발도 잘 어울릴 거 같네요.”

“……네?”

“데미안은 금발이 잘 어울릴 거 같고요.”

무슨 소리인지 미간을 찌푸리던 로위나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하나의 생각이 내리꽂혔다.

“변장을, 하라는 말인가요?”

“기왕 가명까지 썼으니까요.”

“……가명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연달아 두 번의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로위나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일어난 세드릭이 성큼 다가오더니 휙 등을 굽혔다.

“완벽하진 않지만, 당신도 당신 비밀 하나를 털어놨으니 나도 털어놓을게요.”

돌연 확 좁혀진 거리에 덫에 걸린 토끼처럼 로위나가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크게 떴다. 코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춘 세드릭이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알았냐니. 당신은 거짓말이 서툰데 몰랐나 봐요.”

저도 모르게 몸을 등받이로 바짝 물린 로위나가 이어진 이름에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힐끔 본 세드릭의 미소가 짙어졌다.

“다시 인사하죠. 만나서 반가워요. 로위나 필로네.”

* * *

세드릭 고드웰에게 로위나 필로네의 첫인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오래전 죽은 조카와 똑 닮은 여자. 로위나 필로네는 자세히 보면 눈매며 입가가 다르지만, 얼핏 봐서는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로 비슷하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의 정체를 알자마자 밀려든 건 강렬한 호기심이었다. 아무리 한 번 버려졌다 한들 공작의 아들까지 낳아 공작 부인이란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었는데도 교묘하게 죽음을 위장해 먼 외국까지 도망친 여자.

온갖 여자들이 손에 넣으려고 안달인 자리에서 제 발로 뛰쳐나온 경위가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그럴 수 있었던 담대함과 결단력이 그를 잡아끌었다.

그저 예쁜 인형으로 유명했던 여자가 아들을 데리고 이 먼 외국으로 도망쳐 온 것도 대단했지만 외삼촌의 피를 이어 소설가로서의 재능 또한 갖춘 것도 신기했다.

―어째서인지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지만 그녀는 분명 재능이 있어.

―누님이 후하게 봐준 건 아니고요?

―정말이야. 두고 봐. 곧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할 테니까. 소설가로서 명성도 거머쥘걸.

로렌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가명이지만 로위나의 이름은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외딴 시골이지만 머지않아 수도까지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 어깨를 잔뜩 올리고 다녀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텐데 로위나는 오히려 더 겸손해졌다.

―문제는 유명해지기 시작하면 저쪽에서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는 거야. 가명을 썼고 공식적인 자리는 나가지 않을 테니, 아주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로렌의 걱정은 타당했다. 세드릭은 그녀가 말하는 ‘저쪽’이 누군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한 결과 그는 하나의 해결책을 떠올렸다.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새로운 신분을 주면 되죠. 공식적이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그게 뭔데?

―그건…….

로렌이 이야길 듣자마자 어처구니없다며 손사래 쳤던 해결책을, 세드릭은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완벽하게 숨고 싶으면, 내 아내가 돼요. 로위나.”

“……뭐라고요?”

이름을 불린 충격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로위나가 귀를 의심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나라는 국민의 배우자에게 신분증과 거주지 증명서를 발권해 줘요. 완벽하게 신분을 세탁하고 싶다면, 임시로라도 내 아내가 되라는 말이에요. 머리도 염색하고 밖에 나갈 때는 분장도 조금 해야겠죠.”

마치 옛날부터 준비해 온 대사인 듯 술술 나오는 말에 로위나는 혼비백산해졌다. 충격에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에게 세드릭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다이애나 고드웰. 썩 예쁜 이름 아닌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위나는 가만히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자주 드는 생각이지만 보면 볼수록 양파 같은 사람이었다. 로렌의 말대로 세상과 거리가 있는 괴짜 같기도 하고 진지한 학자 같기도 하고, 어떨 땐 듬직한 연상인데 또 어떨 땐 데미안보다 더 짓궂은 소년 같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인 로위나가 덤덤하게 평가했다.

“멋도 낭만도 없는 청혼이네요.”

“기다려 주면 꽃이라도 꺾어 올게요.”

“네?”

“무슨 꽃이 좋아요?”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당장이라도 일어나 들꽃이라도 꺾어 올 기세였다. 그 모습에 그녀의 입에서 결국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사하지만, 그럼 꽃만 받고 거절할게요.”

로위나는 방금의 말이 그가 분위기를 풀려고 던진 농담이리라 생각했다. 농담도 참 이상한 방식으로 하는 남자였다. 담백한 청혼에 이은 담백한 거절에 세드릭이 얼어붙기 무섭게, 로렌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굳은 공기를 깨뜨렸다.

“다이애나!”

쭈뼛쭈뼛 로렌의 손을 잡은 데미안만이 로위나의 눈에 들어왔다. 돌아온 아들에게 뛰어간 로위나가 작은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데미안!”

“엄마…….”

“엄마가 정말 미안해…….”

“아니야. 나도 소리 지르고 화내서 미안…….”

로렌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되려 잔뜩 미안한 얼굴로 데미안이 훌쩍였다.

“엄마가 날 누구보다 사랑하는 거 알아……. 근데 나 너무 힘들었어……. 사람들이랑 헤어지고 하는 거 너무 슬프단 말이야.”

“응. 알아. 미안해. 내 아가.”

포옹을 푼 로위나가 말랑거리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았다.

“엄마가 너무 흥분했던 거 같아. 당장 떠나는 건 보류할게.”

말을 마치며 로위나는 로렌과 눈을 마주쳤다. 세드릭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로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로렌은 잠시 놀란 얼굴이었지만, 곧 로위나의 생각에 수긍하듯 옅게 미소 지었다.

“정말?”

언제 축 처져 있었냐는 듯 고개를 든 데미안이 화색을 했다. 그 모습에 맥없이 웃은 로위나가 약속했다.

“응.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끝은 이상한 화제로 빠졌지만 세드릭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상하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별것 아니리라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낙관이었다.

킬리언은 그녀가 죽은 걸로 알고 있었다. 초상화를 뿌린다고는 했지만 어차피 이곳에서까지 화제가 되는 건 아주 잠깐일 테고, 애도의 기간을 마치고 나면 공작 부인을 새로 들일 테니 그때까지만 잘 숨어 있으면 될 것이다. 다행히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로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충성심이 높고 입도 무거웠다.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도 거의 없고.

“나 여기 정말 좋아, 엄마!”

밝게 웃은 데미안이 로위나의 뺨에 뽀뽀했다. 아들의 애교에 마주 웃으려는데 흐릿한 한마디가 로위나의 귀에 파고들었다.

“한 가지만 빼고…….”

“한 가지?”

고개를 갸웃한 로위나가 그게 뭐냐고 물으려는 때였다.

“로렌 님!”

무언가를 손에 든 집사가 다가와 쥐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급한 일입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