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부는 도망친다-66화 (66/120)

66화

“아, 다이애나. 여기 있었네요.”

로위나의 어깨를 감싸 안은 세드릭이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사색이 된 로위나가 고개를 들자 빙긋 웃은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만 나갈까요?”

“아. 네.”

먼 외국의 공작 이야기에 열을 올린 것도 잠시, 바로 눈앞의 미남자에 관심이 쏠린 여학생들을 제치고 두 사람은 서점을 빠져나왔다.

서점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도 세드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캐묻는 대신,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로위나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로위나는 땅으로 뛰어내리듯 내렸다. 그녀가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들이었다.

“데미안!”

“다이애나?”

“데미안 어디 있어요?”

초조해 보이는 로위나의 얼굴에 의아해하며 로렌이 대꾸했다.

“마부랑 망아지를 타러 나갔어요. 이제 들어올 거에요. 아, 저기 오네요.”

말하기 무섭게 멀찍이 다가오는 데미안을 발견한 로위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데미안의 손을 잡았다.

“어, 엄마?”

“짐 싸야 해. 데미안. 당장.”

“엄마?”

갑작스러운 말에 눈이 동그래진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왜, 또?”

“데미안.”

고분고분 따를 줄 알았던 아들의 반응에 도리어 놀란 로위나가 걸음을 멈췄다.

“가기 싫어! 이번이 세 번째잖아!”

얼굴을 일그러뜨린 데미안이 거칠게 로위나의 손을 뿌리쳤다.

“맨날 숨어 다니고! 도망치고! 난 이제 그런 거 하기 싫어!”

“데미안!”

기겁한 로위나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데미안의 양어깨를 잡았다. 몸부림치던 데미안이 눈물을 쏟았다.

“난 여기 좋아. 여기 있고 싶어. 엄마…….”

“데미안……, 다시 오면 돼.”

격렬한 반항에 머리끝까지 오른 흥분을 가라앉힌 로위나가 무릎을 접어 앉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서…….”

“싫어!”

씩씩대며 데미안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헤리엇 아줌마도 너무 보고 싶고, 쌍둥이도 보고 싶은데 못 봤잖아! 이번에도 그러라고?”

차곡차곡 쌓아 왔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격렬한 반항에 로위나가 작은 어깨를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맥없이 내려간 손을 흘깃 본 데미안이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따졌다.

“왜 엄마는 엄마밖에 몰라? 나는 엄마 강아지야?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하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엄마는…….”

가슴이 찢어지는 말이었다. 처음 마주하는 아들의 진심에 목 끝까지 비명이 올라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 엄마는 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자식이었다. 자신보다도 소중한 아들이었다.

“사랑해? 아니! 엄마 사랑은 거짓말이야. 그랬다면 날 이렇게 장난감처럼 대하진 않았을 거야.”

“데미안!”

분에 찬 데미안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사이, 듣다 못한 세드릭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당장 사과해.”

“형.”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데미안이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 짓궂기는 해도 항상 부드러웠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엄했다.

“엄마에게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거야.”

“……미워!”

결국 울음을 터뜨린 데미안이 뒤를 돌아 뛰쳐나갔다. 따라가려는 로위나를 세드릭이 강한 손길로 붙잡았다.

“내버려 둬요.”

“하지만.”

반박하려는 로위나에게 로렌이 다가왔다.

“다이애나, 내가 대신 따라가 볼게요. 지금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로렌…….”

“화 좀 풀리면 데려올게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응?”

안타까운 얼굴로 로위나의 어깨를 토닥인 로렌이 멀어졌다.

* * *

진이 빠진 로위나를 침실로 부축한 건 세드릭이었다. 하녀에게 진정에 좋은 차를 준비시킨 그가 그녀를 천천히 카우치에 앉혔다.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은 로위나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을 줄 알았지만, 하녀가 차를 가져올 때까지 방 안은 조용했다.

찻주전자와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하녀가 다시 방을 나간 후에야 입을 연 쪽은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한 로위나였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죠?”

“묻다뇨?”

찻잔을 기울이던 세드릭이 반문했다. 치맛자락을 쥐었다 편 로위나가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점에서부터 지금까지요. 제가 이상하게 행동했잖아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은 세드릭이 빙긋 웃었다. 그 미소에 로위나는 힘이 들어간 어깨를 풀었다.

장난기 많은 소년 같다 생각이 들다가도 속은 백 살 먹은 노인이 들어앉은 것 같은 남자였다. 워낙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이것저것을 보아 온 사람이라 그런 걸까 싶었다. 역시 이 남자와 있으면 편했다. 경직된 공기가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이상하지 않았나요? 정신이 이상한 여자라고 봐도 할 말이 없는데.”

“말하고 싶어요? 그럼 말해도 좋아요.”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았다. 안정감 있는 목소리에 조금 경직된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불현듯 방금 전 데미안의 모습이 아른거린 로위나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난…… 최악의 엄마예요.”

“…….”

“데미안을 위한다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요. 아이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고, 엄마인 나와 있는 게 가장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정작…… 데미안이 없으면 안 되는 건 나인데.”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어렸다. 어린 마음에 갑자기 환경이 바뀐 게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을지, 그리고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위험천만한 일을 겪게 했다.

“결국 내가 제일 우선이었던 거예요…….”

미안함에 잘해 주려 노력했지만 정작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녀의 상처가 너무 컸고 그녀가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그녀의 상처를 들여다보느라 아들의 상처는 들여다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어깨를 들썩이는 로위나를 바라보며 세드릭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탓하려면 얼마든지 해도 돼요.”

언뜻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품고 있는 뜻은 차가우리만치 단호했다.

“자책하고 죄책감에 떨고 미안해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니까.”

이어진 말에 로위나가 젖은 얼굴을 들었다. 여느 때와 달리 그는 진지한 얼굴로 조언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과해요.”

“……이해해 줄까요?”

모든 걸 이야기하는 상상만 해도 정신이 아득했다. 네가 지냈던 성이 사실 네 친부의 성이었으며 우리가 그곳에서 도망친 이유는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요. 날 더 이기적이고 못된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다이애나.”

옅게 웃은 세드릭이 청천벽력 같은 질문을 던졌다.

“혹시 데미안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격렬하게 부정한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배려하지 못했을지언정 데미안에게 해를 끼칠 생각을 한 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이야기해요. 데미안은 어린아이지만 대화가 안 통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너무 어린걸요.”

“전부 말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거짓말을 하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까지는 말하는 게 어떠냐는 거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

“데미안 입장에선, 아예 아무것도 모른 채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예요.”

이어진 세드릭의 말에 물기 어린 로위나의 눈이 반짝였다.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이리저리 뒤얽혔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해답을 찾아낸 듯한 로위나를 바라보며 세드릭이 조용히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누님에게 들었을지 모르지만, 난 상당한 늦둥이였어요. 그 덕에 내 부모님은 내게 엄청난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랑이 지나쳐 내 인생과 가치관을 좌지우지하려고 하셨었죠. 미래의 진로와 아내까지 전부요.”

“……그래서 부모님에게 벗어나려고 외국으로 간 건가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했다.

“숨이 막혔으니까요. 하지만 절대 그분들이 미워서가 아니었어요. 어디든 도망치고 싶었고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었죠. 나중에야 부모님의 마음을 알았죠. 만약 어릴 때 조금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시고 대화를 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지 종종 생각해요.”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해결책을 찾아낸 로위나가 옅게 웃었다.

“고마워요. 로렌도 그렇고, 당신도. 잊지 못할 거예요.”

“곧 떠날 것처럼 말하네요. 아까처럼.”

예리한 지적에 로위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난 더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왜요?”

“날 찾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누군지는 말 못 하지만…….”

“당신을 해칠 사람?”

덤덤하게 물은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제 두 손을 내려다보느라 눈치채지 못한 로위나가 입술을 오므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