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후 세 사람은 몰라보게 가까워졌다. 나빴던 인상과 달리 조금씩 알게 된 세드릭 고드웰은 살짝 특이하지만 친절하고 사려 깊은 남자였다. 세드릭이 그녀가 집필에 몰두하는 동안 데미안과 잘 놀아 주었다는 걸 알고 난 뒤, 로위나는 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조금 특이한 부분은 있었지만 사람의 호감을 사는 데에 익숙한 남자였다. 무엇보다 연구를 위해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여러 경험을 쌓은 세드릭의 이야기는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의 흥미를 자극했다.
“제일 흥미로운 광물은 바로 오팔이라는 보석이에요.”
“오팔?”
“말 그대로 여덟 개의 빛깔을 가진 보석이에요. 아직 이쪽에서는 유명하지 않은데, 반대편 대륙에서는 없어서 못 구하죠.”
재킷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낸 세드릭이 그것의 뚜껑을 열었다. 하지만 보이는 건 기대했던 휘황찬란한 보석이 아닌 우윳빛의 탁한 광물이었다.
“이게 보석이라고요?”
실망한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커튼을 친 세드릭이 햇살에 오팔을 갖다 댔다. 동시에 오색찬란한 빛이 투과되며 마룻바닥을 비췄다. 마법 같은 모습에 로위나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 반응에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은 세드릭이 덧붙였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고한 다이아몬드도 좋지만, 나는 이렇게 다채로운 빛깔을 지닌 보석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아름답네요.”
“자기가 빛을 내야 할 때를 알고 있는 거죠.”
빙긋 웃은 세드릭이 대뜸 로위나의 한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반짝거리는 오팔을 얹고는 주먹을 쥐게 했다.
“무, 무슨…….”
커다란 손이 손등을 감싸자 따뜻한 온기가 피부를 타고 흘러들었다. 자연스러운 접촉에 로위나가 주춤한 것도 잠시, 손을 거둔 세드릭이 속삭였다.
“선물이에요.”
그 어떤 성적 함의나 유혹도 없는 눈이었다. 도리어 머쓱해진 로위나가 슬며시 거절했다.
“이런 귀한 건 받을 수 없어요.”
“저번 일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해 줘요.”
“저번 일이라면.”
대답 대신 세드릭이 두 손으로 부리를 흉내 냈다. 암탉이라고 말한 일을 의미하는 거였다.
“그건 저도 잘한 게 없는데요. 저야말로.”
얼굴을 붉힌 로위나가 시선을 내렸다. 웬만한 모욕에도 그냥 꾹 참고 마는 자신이었다. 환경 바뀌니 성격도 바뀌는 건지, 홧김에 뺨을 올려붙이고 나서도 스스로 꽤 놀랐었다. 그런 용기가 자신에게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이 남자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옛날 천진난만한 소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공작의 정부라는 자리에 있을 땐 남들 눈에 부끄럽지 않은 여자가 되려 애쓰고 발버둥 쳤다면 지금은 그냥 있는 그대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고 있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인데도 이상하게 편했다.
“저야말로?”
기어들어 가듯 작아진 뒷말을 따라 한 세드릭이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때린 건 미안해요…….”
한결 가까워진 거리에 다시 긴장한 로위나가 어깨를 움츠리는데, 입매를 끌어 올린 그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괜찮아요. 맞을 만했고. 또…….”
“또?”
“난 재밌었어요.”
“네?”
“통속적인 대사인지 모르겠지만, 날 때린 여자는 당신이 두 번째거든요.”
“……보통,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라고 하지 않나요?”
“아쉽게도 첫 번째 여자는 로렌 누님이라서.”
“일리 있네요.”
피식 웃은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다시 햇볕에 반사된 백금발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손에 쥔 오팔만큼이나 다채로운 색이었다. 곱슬기 있는 머리칼이 마치 한 마리 강아지 같아 무심코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부스스한 앞머리 사이로 자수정 같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세드릭이 긴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혹시 첫 번째가 아니라 아쉬워요?”
“별게 다 아쉬울까 봐요.”
잠깐이나마 넋을 놓고 본 게 민망한 로위나가 헛기침을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오팔을 돌려주려고 하는데, 돌연 긴 손가락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덫에 걸린 토끼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큰 눈을 깜박이는 로위나를 향해 세드릭이 나직이 해명했다.
“속눈썹이 붙어서요.”
“…….”
알 수 없는 야릇한 눈빛에 로위나가 눈을 크게 뜨는데 때마침 명랑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엄마. 그거 뭐야?”
얼어붙은 건 한순간이었다. 막 낮잠을 자고 내려온 데미안에게 방금 전 모습을 들켰을까 놀란 로위나가 잠시 말문을 잊었다. 반면, 그녀와 달리 능청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 세드릭이 대신 대꾸했다.
“뭘 거 같아? 맞춰 봐.”
“처음 보는 건데.”
“아, 이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위나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세드릭이 말허리를 끊었다.
“오팔이란 거야. 갖고 싶어?”
“응!”
“그럼 ‘주세요’ 해야지.”
“주세요.”
눈을 반짝반짝 빛낸 데미안이 엄마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데미안에게 미안한 게 많은 입장이었다. 단호히 고개를 젓기가 어려운 로위나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데미안. 이건 엄마 게 아니고…….”
돌려서 거절하려는 때였다. 씩 웃은 세드릭이 제안했다.
“정 받기 그러면 대신 주말에 나랑 잠시 시내에 나가요.”
* * *
혹시 데이트 신청이라면 거절하려고 했지만 힘 빠지게도 세드릭이 제안한 건 그저 ‘동행’이었다.
마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다름 아닌 서점이었다. 로위나도 잘 아는 곳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세드릭이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여기 바로 있네요. 인기 작품 코너.”
그가 들어 보인 건 다름 아닌 다이애나라는 이름으로 출간한 로위나의 책이었다. 세드릭이 길게 늘어선 계산대 줄을 눈짓했다.
“어때요? 고생에 대한 보답을 보는 기분이.”
로렌의 지인인 서점 주인의 호의로 진열대 앞에 꽂힌 게 발단으로, 지역 기자의 눈에 띄어 지방 유력 일간지에 호평이 실린 게 결정적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소녀의 인생을 특별하게 그려 낸 수작
소설은 한 시골 소녀의 자전적인 이야기였다. 못된 공장주에게 속아 도시에서 고된 노동을 하다 한 남자를 만나는 이야기로, 상대는 부자에 다정한 남자였으나 신분 차로 인해 헤어진 후 아픔을 겪는다. 그 후 자신의 특기를 살려 성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마냥 낭만적이고 밝은 기존의 로맨스 소설에 비해 현실적이고 어두운 면까지 담아 생생하고 공감을 많이 이끌어 냈다는 평이었다.
“이러다가 단번에 유명 작가가 되는 거 아니에요?”
“그저 운이 좋은 거죠. 잠깐 반짝하는 반응일 수도 있고요.”
겸손하게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잠시 감격에 겨운 얼굴로 자신의 책을 만지작댔다. 어깨를 으쓱한 세드릭이 길게 늘어선 계산대 줄에 합류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신문 코너를 살피던 로위나의 귀에 익숙한 이름이 파고들었다.
“들었어? 에셀우드의 데본셔 공작의 약혼녀가 약혼식 전날 파도에 익사한 이야기.”
“알지. 굉장한 미남이라던데. 벌써 약혼녀가 두 명이나 죽은 거잖아. 어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옹기종기 서서 신문을 넘기던 근처 기숙학교의 여학생들이었다.
데본셔. 지난 반년 동안 어떻게든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이름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들리는 순간, 신문을 향해 손을 뻗던 로위나가 그대로 굳었다.
아무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고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들, 이곳은 먼 외국인 데다 외딴 시골이었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이런 곳까지 파다하게 소문이 퍼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다. 재빨리 등을 돌린 로위나가 모자챙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녀는 복이 없다더니 미남도 마찬가지인가 봐. 불행한 미남 공작이라니.”
눈물을 글썽인 여학생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마치 비극의 한 장면 같지 않아?”
비극. 가슴에 꽂히는 단어에 로위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더 충격인 건 이어진 말이었다.
“낭만적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죽은 약혼녀를 기리기 위해 영묘에 빈 무덤을 만들었대. 14대 공작 부인으로.”
영묘? 빈 무덤? 14대 공작 부인?
그녀의 고국과 언어가 똑같아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인데 의미가 쉽사리 전달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머. 세상에! 정말로 사랑한 거구나.”
올라오는 메슥거림에 로위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연이은 충격에 이명이 울리고, 속이 거북하고 어지러웠다. 간신히 책장을 짚고 버티는 로위나에게 다음 말이 쐐기를 박아 넣었다.
“뿐만 아니야. 그 약혼녀 초상화도 곧 대중에게 공표할 예정이래. 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공작 부인이라는 거지.”
초상화? 공표?
로위나는 귀를 의심했다.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마음 놓았던 곳이 한순간에 위험해졌다. 평화로운 일상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아……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너무 슬퍼.”
“내가 그 빈자리를 메워 주고 싶어.”
“야, 되겠니? 엄청난 미녀라면 모를까.”
“그건 그래. 모르긴 몰라도 죽은 약혼녀의 미모가 굉장했대.”
“정말? 궁금하다. 초상화 공개되면 신문사에서 안 내주려나.”
휘청이는 로위나를 발견한 여학생 중 하나가 화제를 돌렸다.
“어 근데 저분…… 어디 아파 보이지 않아?”
“그러게. 저기요.”
시선을 교환한 여학생들이 로위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