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아이 앞에서 할 말 안 할 말이 따로 있어요.”
일갈한 그녀가 데미안의 손을 잡고 나갔다. 휑하니 두 모자가 가 버린 후에야 일련의 소동을 굳은 채 지켜보던 로렌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세드릭을 몰아세웠다.
“제정신이니? 내 손님한테? 쫓아가서 제대로 사과해. 당장!”
“암탉이 뭐가 어때서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기가 막힌 로렌이 멈칫했다.
“다산하는 데다 맛있잖아요.”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새인데.”
“너…….”
로렌이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세드릭이 붉어진 뺨에 손을 얹었다. 얼얼하고 찌릿했다. 억지로 보여 주는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분노하고 노려보는 눈이 오싹오싹했다.
“귀엽지 않아요?”
암탉이 귀엽다는 건지 제 뺨을 때린 여자가 귀엽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로위나가 떠난 자리를 집요하게 보는 보라색 눈동자에 로렌은 어깨를 움츠렸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간 접근하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그 어떤 미인이 다가와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녀석이었다. 이건 마치…….
불현듯 한기를 느낀 로렌이 단호하게 경고했다.
“다이애나는 안 돼.”
“누님.”
“다른 여자는 괜찮아도 다이애나는 안 돼. 내게 거스르려면 당장 내 저택에서 나가. 사과하지 않아도 마찬가지…….”
“설마, 그녀를 죽은 안젤라에게 투영해서 보기라도 하는 겁니까?”
말허리를 끊은 세드릭이 불쑥 물었다. 얼굴이 새파래진 로렌이 입술을 떨었다.
“그 이야기는 첫날 언급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잊었어?”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기묘한 인연이죠. 쌍둥이처럼 꼭 빼닮은 얼굴에 데본셔 공작까지.”
“세드릭!”
“데미안은 아마.”
“그만해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차마 더 듣지 못한 로렌이 동생의 입을 틀어막았다. 안젤라는 그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가장 아끼는 조카였지만 가세가 기울어 고아가 되고, 사고로 목숨까지 잃은.
“만약 다이애나…… 아니, 로위나가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볼 땐 소름 끼칠 거 같은데.”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그럴 리가요. 누님.”
눈을 접어 웃은 세드릭이 제 입을 막은 손을 잡아 내렸다.
“그냥, 저 좀 도와달라는 거죠.”
“……장난이라면.”
“난 한 번도 장난인 적 없어요. 어떤 것도.”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죽은 조카와 꼭 닮은 외모는 둘째치고, 비극의 주인공으로 소문이 자자한 여자가 떡하니 외국의 시골에 있을 줄이야. 그것도 전 약혼자의 죽은 태중 약혼녀의 이모 집에.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장소였다. 산이며 바다 밑까지 샅샅이 뒤진다 한들 절대로 찾아내지 못하리라. 그래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재밌는 여자였다. 자연스레 계속 눈길이 갔고 지켜보다 보니 차츰 빠져들었다.
“……당분간만이야.”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눈에 결국 로렌이 백기를 들었다.
“로위나가 진심으로 널 밀어내면 깨끗하게 포기해.”
“아무렴요.”
빙긋 웃은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했다.
* * *
이후 로위나는 세드릭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신세 지고 있는 은인의 동생을 때렸다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들이 보는 앞에서 무례하게 군 남자에게 사과를 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다행히 그런 그녀를 로렌은 탓하지 않았고, 세드릭은 연구 목적으로 머무는 것이기에 점차 식사 자리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다시 평화를 되찾은 저택 안에서 로위나는 밤이건 낮이건 집필에 몰두했다. 살아오면서 그토록 뭔가에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늦은 밤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완결을 달려갈 즈음엔 데미안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미루고, 온전히 방에만 틀어박혀 글에 집중했다.
식사를 하는 것도 밖에 나오는 것도 미루고 미룬 끝에 로위나는 긴 여정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드디어…….”
끝. 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는 이미 막 동이 틀 무렵이었다. 농사도 휴지기라 이른 새벽에 일어난 사람은 저택 안에 아무도 없었다. 고요함을 한껏 만끽하면서 창을 연 로위나가 드넓게 펼쳐진 설원을 내려다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한 가지에 집중하여 끝을 본 것은. 뭔가를 마지막까지 온전히 만들어 본 것도. 최선을 다했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맞다.”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의자를 뒤로 끈 로위나가 문을 열었다.
“오늘은 아직이네.”
로렌은 매 끼니를 거르는 로위나를 위해 항상 방문 앞에 식사를 가져다줬다. 메뉴는 매번 바뀌었지만 아침만은 언제나 신선한 달걀과 갓 짜낸 우유였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 것도, 규칙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전부 그 덕분이었다.
시킨 건 로렌이었지만 남들이 자는 시간에 일어나 축사에 가서 달걀을 가져오고 우유를 짜내는 건 언제나 한 사람이었다. 신선한 유류품이 담긴 바구니 위엔 짧고 사려 깊은 메시지를 담은 카드가 늘 놓여 있었다.
유난히 추운 아침이네요.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암탉이 오늘은 병아리를 네 마리 낳았어요. 새 생명의 기운을 받아 오늘도 집필이 잘 되길 바라요.
조금 있으면 꽃이 필 거 같아요. 모종을 가져왔으니 봄의 냄새를 맡고 하루를 시작해 보세요.
매번 달라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로위나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누군지 알아내서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었다.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온 로위나의 걸음이 빠르게 축사로 향했다. 마침 들어온 사람이 있는지 닭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에 반가운 얼굴로 로위나가 축사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안녕하…….”
“…….”
밝고 쾌활한 인사는 점점 땅으로 파고들었다. 로위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축사 안 둥지에서 허리를 굽히고 달걀을 꺼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세드릭이었다. 옆에는 데미안이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왜……, 당신이……?”
“엄마!”
석상처럼 굳어 버린 로위나에게 바구니를 짚 위로 팽개친 데미안이 달려들었다.
“웬일로 밖으로 나왔어? 글은 다 쓴 거야?”
“아. 응…… 데미안.”
엉거주춤 아들을 끌어안은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신난다! 그럼 이제 방에 안 있는 거지? 나랑 있는 거지?”
“그럼. 그런데…….”
따사롭게 아들을 보던 시선이 점차 경계 어린 눈으로 변해 세드릭 쪽으로 향했다.
“왜 여기 있어? 저 사람이랑?”
알 수 없는 얼굴로 싱긋 웃고 있는 남자 앞에서 사고가 마비된 느낌이었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두 사람 사이에 데미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세드릭 형이 하자고 한 거야!”
“뭐?”
“엄마, 기운 내게 해 주자고 매일 아침 우리 둘이 젖소에서 우유도 짜고 달걀도 꺼내 왔어!”
“……그래?”
“응! 이제 달걀이랑 우유 짜러 가려고 했는데.”
그 말을 뒷받침하듯 세드릭이 양손에 들고 있던 달걀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눈만 깜박이는 로위나를 향해 물었다.
“뭐 해요?”
“네?”
“바구니.”
“아.”
뒤늦게 널브러진 바구니를 주운 로위나가 달걀을 받아 들었다. 뺨을 때린 뒤로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사이라 멋쩍고 어색했다.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 기어 들어가듯 감사 인사를 했다.
“그…… 고마워요.”
“뭐가요?”
“달걀이랑 우유요.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
“그리고 또 있지 않나?”
“또?”
어안이 벙벙해진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세드릭이 덧붙였다.
“카드.”
당연히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가 쓴 건 줄 알았다. 사려 깊은 내용에 부드러운 필체까지. 알게 된 진실에 입을 벙긋하던 로위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농부처럼 편한 차림이었다. 귀족 집안 신사답지 않게 투박한 차림이었지만. 이상하게 맞춘 듯이 잘 어울렸다. 새벽빛에 백금발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문득 그 빛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구석에 놓아둔 양동이를 들었다.
“가요.”
“어, 어디를요?”
“우유 짜러.”
“아. 이제 안 해도 돼요. 카드도 달걀도 우유도 정말 고마워요.”
옆을 스쳐 축사 문을 연 세드릭을 향해 로위나가 거듭 인사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였다.
“몰랐는데 이기적이시네요.”
“……네?”
“혼자 먹는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도 먹어야지.”
“…….”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멍하니 서 있는 로위나를 향해 세드릭이 쐐기를 박았다.
“소 젖, 짜 봤어요?”
“지금 같이하자는…….”
“뭐, 손이 그렇게 고우니 무리려나. 무서우면 옆에서 구경해요.”
로위나의 말허리를 끊은 세드릭이 휙 축사를 나갔다.
“엄마……?”
감동도 잠시, 주먹을 꼭 쥔 로위나를 올려다본 데미안이 거듭 그녀를 불렀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진짜야.”
자존심에 불을 지피는 말이었다. 데미안의 손을 잡고 축사를 나온 로위나가 세드릭의 뒤를 따라갔다. 막 자리를 잡고 작업을 시작하려는 그의 옆에 선 로위나가 지시했다.
“비켜요.”
“뭐라고요?”
“내가 그쪽보다 젖 짜는 데엔 일가견이 있으니 비키라고요.”
골짜기에 살던 시절, 그녀가 키운 닭이며 염소가 여럿이었다. 소는 키우지 않았지만 옆집 할아버지네 축사에서 일을 거들고 직접 젖소 젖을 짜서 우유를 받고는 했었다.
“내기할래요?”
휙 세드릭을 옆으로 민 로위나가 젖소 아래에 양동이를 두고는 젖을 짜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멀거니 지켜보던 세드릭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하죠.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뜬금없이 시작된 내기에 흥분한 데미안이 방방 뛰었다.
“내기? 재밌겠다! 나도 할래!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