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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63화 (63/120)

63화

막 배에서 내려 약속된 장소로 향하기도 전에 누군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폭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로위나가 그녀를 밀쳐 내려는데, 눈물 젖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안젤라…….

별안간 그녀를 끌어안은 노부인이 다름 아닌 눈앞의 세네스 자작 부인이었다.

―전 안젤라가 아니에요.

―미안해요. 제 조카와 너무 닮아서 그만…… 로렌이라 불러요.

눈물겨운 얼굴로 로위나를 바라보던 자작 부인은 처음부터 그들을 온 마음을 다해 환영했다. 에셀우드 출신인 그녀는 외국에 시집와 수십 년을 살고, 몇 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영지를 꾸려 나가는 과부였다.

예술에 조예가 깊어 제레미를 후원해 주는 든든한 후견인이기도 한 로렌은 심성 또한 따뜻하고 포근해 그녀를 아는 이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로위나와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로렌은 두 모자에게 기꺼이 넓은 손님방을 내어주었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줬다. 더불어 로위나의 집필까지 응원해 주는 등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죄송해요. 처음부터 계속 신세 지기만 하네요.”

“그런 말 말라니까요. 열렬하게 좋아하는 작가 제레미 디쉬의 조카라니 오히려 내가 영광이에요.”

좋아하는 작가의 부탁이라 한들,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제 저택에 받아들여 준 로렌은 그릇이 넓은 사람이었다. 아이의 아빠를 일찍 여의고 도박 빚 독촉을 피해 도망쳤다는 사연을 로렌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택 사람들 모두 로위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렇게 된 배경은 로렌이 드넓은 영지와 농장을 관리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덕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곳이 아주 작은 나라이며 그중에서도 먼 외국의 사교계 소식은 닿지도 않는 시골이어서였다.

죄책감에 슬쩍 눈을 내리깐 로위나가 다짐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진심이에요.”

“섭섭하네요. 우리 이제 가족 아닌가요? 벌써 반년째인데.”

밉지 않게 로위나를 흘겨본 로렌이 망아지를 타고 초원을 도는 데미안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마부가 고삐를 쥐고 있는 걸 확인한 그녀가 로위나를 별장 쪽으로 이끌었다.

“맞다. 쓰고 있는 건 어때요? 곧 마무리 짓겠어요?”

“네. 거의 마무리 되어 가고 있어요. 조만간 완결할 거 같아요.”

그녀가 다시 쓰기 시작한 소설은 바로 5년 전 출간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작품이었다. 유일한 희망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일의 도화선이 되었던 글. 킬리언에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처분해야겠다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벽난로에 집어넣으려 할 때마다 도저히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제레미가 건넨 조언이 발단이 되었다.

―글은 죄가 없단다. 로위나.

―하지만…….

―오히려 그 글을 완성함으로써 네 과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상념에 젖은 것도 잠시였다. 로렌의 말에 로위나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정말 기대되네요. 제일 먼저 내게 보여 주겠다던 약속 잊지 말아요.”

“부족한 글이라 부끄럽기만 하네요. 첫 소설이라.”

“아주 예전부터 써 왔다면서요. 분명 잘 썼을 거예요.”

“감사해요. 로렌.”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젊은 신사였다.

“오, 세드릭!”

익숙한 뒷모습을 보자마자 화색이 돈 로렌이 빠른 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남자가 몸을 돌리는 순간, 로위나와 눈이 마주쳤다.

구불거리는 백금발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자였다. 뜻밖의 손님에 놀란 로위나가 굳어 있는 사이, 세드릭이라 불린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틈을 비집고 로렌이 끼어들었다.

“놀랐네. 아무 연락도 없이 오는 법이 어딨어?”

“누님.”

동생의 볼을 쭉 늘린 로렌이 활짝 웃는 얼굴로 로위나에게 그를 소개했다.

“다이애나. 이쪽은 내 막냇동생인 세드릭 고드웰이에요. 사업은 관심 없고 곤충 연구로 대부분 먼 외국에서 지내죠.”

“아…….”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한 로위나가 옅게 미소했다. 로렌이 이어 남동생에게 로위나를 소개했다.

“세드릭. 이쪽은 제레미 디쉬 소설가의 조카인 다이애나.”

“처음 뵙습니다. 부인.”

놀란 눈을 한 것도 잠시, 모자를 벗은 세드릭이 로위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거침없는 보폭에 당황한 로위나가 두어 걸음 물러서자 딱 그만큼 더 다가온 그가 허리를 숙이고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고드웰 씨?”

핀에 박힌 나비처럼 얼어붙은 로위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희롱이라 하기에는 야릇하지 않았고, 그 어떤 성적인 함의도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마치 기이한 연구대상을 발견한 듯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갈망으로 가득 찬 시선.

“세드릭!”

로위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지는 사이 다가온 로렌이 넓은 등을 크게 후려쳤다.

“그렇게 사람을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잖니!”

* * *

이상한 첫 만남을 시작으로, 세드릭 고드웰은 열흘째 저택에 눌러앉았다. 시골에 홀로 있는 저택치고는 규모가 있었고, 방도 많았기에 로위나는 새 체류자에 대해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무시하려 할수록 세드릭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 나갔다. 모두 모이는 식사 때마다 로위나는 체할 것 같은 속을 간신히 가라앉혀야 했다. 딱히 말을 거는 것도, 그때처럼 서슴없이 다가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마치 새로운 연구 주제를 발견한 학자처럼.

중간에 선 로렌은 미묘한 입장에서 로위나의 눈치를 봤다.

“미안해요. 다이애나. 세드릭 때문에 불편하죠?”

“아니요. 제가 군식구인걸요. 로렌의 가족이니 얼마든지 머물 수 있죠.”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눈 밑에는 그늘이 선명했다. 한숨을 내쉰 로렌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관심을 안 보여서 걱정인 녀석이었거든요.”

말만 동생이지 나이 차이가 거의 부모 자식만큼이나 나서 애지중지하는 막냇동생이었다. 투덜거리는 말에도 깊게 깔린 애정에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성격은…… 조금 특이해도 머리는 굉장히 좋았어요. 한 번 보면 무엇이든 절대 안 잊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조류에 관심을 갖더니 관련 학문 박사 학위를 받고는, 외국 대학에서 부교수로 임명받았지 뭐예요. 오라버니를 도와 가족 사업을 보필하리라 기대했던 아버지의 바람을 무참히 깨뜨리는 사건이었죠.”

“그래서요?”

“집안에선 엄청 반대하셨죠. 오죽하면 그동안 들인 모든 지원을 다 끊겠다고 통보했을 정도니까요.”

“결국 대학교수가 됐나요? 아니면 포기?”

“그게.”

손사래를 친 로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직접 써서 낸 학술집으로 막대한 돈을 벌더니 집안의 바람도, 교수직도 보기 좋게 걷어차고는 이번엔 광물에 빠졌어요. 보석뿐 아니라 지질에 따라 나는 모든 종류의 광물이요.”

“…….”

“1년 만에 다시 석사 학위 따고 지금 박사 과정 준비 중이랍니다.”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말이었다. 그 범위가 다소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럽기는 하지만. 잠시 넋을 놓았던 로위나가 뒤늦게 반응했다.

“이제 막 서른둘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기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아직 애 같은 거죠.”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자랑스러운지 어깨를 으쓱한 로렌이 작게 혀를 찼다.

“이상한 연구심도, 역마살도 문제지만 뭐 한 가지에 빠지면 그것에 미쳐 버리는 게 제일 걱정이에요. 언제쯤 장가를 가서 데미안처럼 귀여운 조카를 안겨 줄는지. 정말 괴짜라니까.”

“엄마!”

로렌의 한탄이 더 길어지려는데, 때마침 귀여운 방해꾼이 조르르 달려왔다.

“데미안. 엄마가 내준 숙제는 다 했어?”

“응! 다했어. 있잖아, 나 오늘 세드릭 형이랑 망아지 타고 광산까지 가도 돼?”

“뭐?”

갑작스러운 말에 두 여자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휘둥그레진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데,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여기 와서 저택 주변 농장 외에는 못 가 봤다길래요.”

홱 고개를 든 로위나가 세드릭과 시선을 맞닥뜨렸다. 언제 데미안과 가까워진 건지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은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입매를 늘렸다.

“반나절 정도 걸릴 거 같아서.”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눈은 생선 앞에 선 고양이 마냥 반짝였다. 호기심, 스산한 기운에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불길해진 로위나가 데미안을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왜에.”

“위험해.”

외진 시골이라 정체를 들킬 일이 없다 쳐도 저 알 수 없는 인간과 어딘가로 보내는 건 허락할 수 없었다.

“세드릭 형이 같이 가는데!”

입을 쭉 내민 데미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엄마!”

칭얼거리는 데미안을 따끔하게 혼내려 입을 여는데, 눈을 가늘게 뜬 세드릭이 끼어들었다. 로위나는 귀를 의심했다.

“과보호네요.”

“……뭐라고요?”

다음 말은 더 가관이었다. 코끝을 찡긋한 세드릭이 덧붙였다.

“안절부절못하는 암탉 같아요.”

“…….”

정수리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얼어붙은 분위기에서 로렌이 벌떡 일어나 세드릭을 비난하려는 순간, 한발 앞서 일어난 로위나가 그의 뺨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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