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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62화 (62/120)

62화

“배를 조사한 결과, 백작 부인의 증언처럼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파도가 치면서 뒤집힌 것 같습니다. 배에 올라타려고 했던 손자국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젖은 숨을 들이켠 제녹이 힘겹게 말을 끝맺었다.

“도련님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로위나 필로네는 제 목숨보다 아끼는 아들까지 데리고 그런 위험한 모험은 하지 않을 여자였다.

쨍그랑. 대답 대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 킬리언이 그대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벽에 던졌다. 다시는 붙일 수 없게 산산조각이 난 파편을 흘깃 본 제녹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부들과 젊은 청년들을 모두 동원해 계속 구조작업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건…….”

“아니.”

카우치에서 벌떡 일어난 킬리언이 충혈된 눈을 하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여자가 죽었을 리 없어.”

“…….”

그가 꺼낸 건 다름 아닌 섭정관의 아들이 건넸던 로위나의 쪽지였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좋겠어요.

무슨 뜻이었을까.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쪽지를 노려보며 지하 영묘 안에서 당돌하게 저를 올려다봤던 여자를 떠올렸다.

아니, 그가 기억하는 여자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사장 위에서 생경한 표정으로 식사하던 로위나. 잔잔한 밤바다 위에서 초연한 얼굴로 섬을 바라보던 로위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느릅나무 아래서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로위나. 여우 사냥철, 그의 약혼 통보에 잠깐이나마 단단한 껍질 안쪽을 그대로 드러내던 로위나.

제 앞에서 웃고 분노하고 슬퍼하던 여자의 얼굴이 수십 번 수백 번 겹쳐지고 흩어졌다.

이름 한 번 불러 준 적 없는 그의 아들도.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려고 하면 누군가 목을 틀어쥔 듯 쉰 소리만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쥔 킬리언을 향해 흐린 얼굴로 제녹이 다가왔다.

“저하…….”

“어딘가에 아주 철저히 숨어 있을 겁니다. 숨어서 나를 비웃고 있겠지.”

“…….”

제녹이 땀으로 젖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었다. 증거와 진실만 받아들이던 그의 주인은 처음으로 모든 이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조금 야위고 초췌해진 것뿐 겉으로는 반년 전과 다를 바 없이 행동했지만, 차갑고 아름다운 대리석 동상처럼 그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한 귀퉁이부터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숨 막힐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에 몇 번 입을 벙긋거린 제녹이 움츠렸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한 가지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화가 말입니다. 저번에 로위나 님의 초상화를 의뢰했던. 어제 막 완성했다고 합니다.”

잠시 기억을 되짚는 듯 미간을 좁혔던 킬리언이 고개를 까딱했다. 제녹이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가를 들여보냈다. 깍듯하게 인사한 화가에 뒤이어 하인 두 명이 들어왔다. 흰 천으로 감싸인 커다란 초상화을 조심스레 받친 채였다.

“걷어.”

“예.”

제녹의 눈짓에 화가가 지시했다. 묵례한 두 하인이 흰 천을 걷어 냈다.

초상화 속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킬리언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그림을 태울 듯한 기세에 눌린 화가가 희게 질린 얼굴로 제녹에게 도음을 요청했다. 킬리언의 뒤로 다가간 제녹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저하?”

소리는 의미도 없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새파란 시선은 오롯이 이쪽을 보고 웃는 한 여자에게만 못 박혀 있었다.

분명 잘 아는 여자였지만 낯선 여자였다. 눈두덩을 붉게 칠하고 입술 또한 타오를 듯 새빨간 색이었다. 이런 짙은 화장을 한 여자는 로위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저런 화장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바로 앞에 있는 듯 생생한 얼굴이었다. 둥글고 작은 이마, 살짝 올라간 가늘고 우아한 눈썹, 부챗살처럼 사르르 펼쳐지는 길고 섬세한 속눈썹과 한여름의 신록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 금 타래를 하나하나 엮어 만든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부드러운 금발.

당장이라도 낯선 여자의 초상화를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얼굴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후련한 듯, 다 놓아 버린 듯, 어딘가 초연하고 비장한 미소.

“로위나 님은 더없이 아름다우시고 우아하시지만, 항상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존재 같달까요. 남의 손길에 잘 입혀지고 잘 꾸며진 인형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긴 시간 고뇌하고 고뇌했습니다. 저는 추하건 아름답건 사람을 그리는 화가이지 아름다운 인형을 그리는 화가는 아니니까요.”

넋을 놓고 제 작품을 보는 두 남자에게 화가가 조심스레 제 의견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날…… 그분을 본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꽂힌 듯 모든 의문이 풀리고 동시에 놓고 있던 붓을 다시 들고 싶었습니다. 제게 이런 강렬한 욕망이 남아 있었는지 몰랐을 정도로요.”

“……그래서.”

초상화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킬리언이 쉰 목소리로 말허리를 끊고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정말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짧은 질문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목을 축이듯 침을 삼킨 화가가 천천히 대답했다.

“이교도지만, 그날 그 순간 로위나 님은 생명을 관장하는 크로티아의 하르메니아 여신 같았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기를 느꼈습니다.”

초상화에서 눈을 뗀 킬리언이 느릿하게 화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더 설명해 보라는 의미였다.

“하르메니아 여신은 시기가 되면 저를 불살라서 새로 태어나는 여신입니다. 제 피와 살로 온 대지를 되살리고 다시 태어나 성장하죠.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되었을 때 인간을 위해 다시 제 몸을 희생합니다.”

“…….”

“크로티아의 성서에 따르면 하르메니아 여신은 영원한 순결, 고결함, 희생, 생명의 순환. 모든 걸 의미합니다. 이른바…….”

제가 그린 역작을 자랑스럽게 곁눈질한 화가가 어깨를 펴고 말했다.

“‘또 다른 시작’이라는 거죠.”

* * *

“엄마!”

눈 덮인 설원에서 망아지를 탄 데미안이 큰소리로 로위나를 불렀다. 울타리를 따라 걷고 있던 로위나가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

멀리 있었지만 아들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알게 모르게 주눅 들었던 표정이 어느새 밝고 쾌활하게 바뀌어 있었다.

데미안은 똑똑했고 그녀를 닮아 긍정적인 아이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도 금세 이 나라 말을 배우고 저택의 하인들과 서슴없이 대화할 정도였다.

이제 망아지까지 탈 줄 알게 된 데미안을 흐뭇하게 보던 로위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익숙한 향기에 빙긋 미소 지은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로렌.”

“다이애나.”

온화한 인상의 귀부인은 두 모녀가 신세를 지고 있는 크로티아 지방의 주인인 세네스 자작의 부인이었다.

로위나는 눈앞의 부인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루프스 섬을 탈출하고 난 이후였다. 발단은 제레미의 계획에서였다.

―알아보니, 루프스 섬은 삼사 년에 한 번씩 태풍이 몰아치는 날이 있다고 해. 비수기 때의 일이고 워낙 드문 일이라 나이 든 어부들만 알음알음 알고 있더라고. 최근 십 년간 날씨를 전부 조사해 통계를 내봤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6월에서 7월쯤이라는 건 확실해.

―그럼 전 뭘 하면 되는 거죠?

―우리의 사고를 ‘목격’해 줄 사람을 부르고, 날씨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직전 배를 타고 멀찍이 나가야 해. 그리고 내가 신호를 주면 다 같이 바다에 뛰어드는 거다.

위험한 계획이었다. 처음에 로위나는 반대했다. 절대 데미안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

―이번이 유일한 기회야. 이번이 아니면 안 돼.

―하지만……!

―평생 공작의 옆에서 꼭두각시처럼 살겠지. 그리고 데미안은.

―…….

―네가 여태껏 제 아들임을 숨겨왔던 걸 알면, 그자가 어떻게 할 것 같지?

제레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로위나의 눈을 본 그가 작은 얼굴을 제게 돌렸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 해야 되는 법이란다. 그리고 데미안은 네 생각보다 약하지 않아.

제레미가 젊은 시절부터 수영에 특출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끝까지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지만 거세지기 시작한 바다에서 헤엄치는 일은 위험하고 힘들었다. 제레미가 데미안을 끌어안고 이끌어 준 덕분에 로위나는 끝까지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제레미가 포섭해 둔 외지인의 배를 타고 그들은 하루 동안 섬 반대편 창고에 머물렀다. 세 사람은 앞바다에 관심이 몰려 있는 틈을 타 텅 빈 술독에 몸을 숨겨 루프스 섬을 탈출했다. 제레미와 헤어진 건 외국으로 향하는 밀항선에 타기 직전이었다.

―여기까지다.

―외삼촌…….

―세 명이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띄어. 마무리 지을 일도 있으니 난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로위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틋하게 조카를 바라보던 제레미가 로위나의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언제든 편지하거라. 내가 알려준 여관에 ‘다이애나’란 가명으로. 알았지?

작별은 짧았고 로위나는 지친 데미안을 품에 안고 밀항선에 올라탔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은 배가 출발한 뒤에야 겨우 누그러졌다.

―여기서는 정말 필요한 게 아니면 돌아다니거나 말 한마디도 하면 안 돼. 알았지, 데미안?

―언제까지?

―배가 외국의 항구에 닿을 때까지. 닷새 동안.

다행히 작은 시골 항구까지 킬리언의 손이 미치지는 않았는지 무사히 작은 나라인 크로티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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