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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61화 (61/120)

61화

“아가씨……?”

“용서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로위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도 너만의 이유가 있겠지. 아무 이유도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넌 그렇게 나쁜 아이도 아니었고.”

“아, 아가씨…….”

희미한 희망을 찾은 멜리사가 울먹였다.

“그럼…….”

“그러니 나도 내 이유대로 널 싫어하겠어. 용서한 것과 별개로. 이건 내 감정이니까.”

후련함과 동시에 그녀는 지쳐 버렸다. 더는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용서하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멜리사를 바다에 데려가 모든 걸 보여 주지 않는 건, 그녀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아가씨인 걸 고려한 마지막 배려였다. 오늘 밤이 지나면 멜리사는 아마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리겠지만, 그것까진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따라오지도 말고 내 이름 부르지도 마. 내 눈앞에 띄지 마. 멜리사 브라운.”

백지장처럼 파리해진 얼굴을 끝으로 로위나가 등을 돌렸다.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마부가 바로 채찍을 휘둘렀다. 넋을 잃은 멜리사가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차는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백사장으로 가자 연락을 받은 하인이 그들을 배로 안내했다. 미리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제레미가 뱃사공을 대신해 배에 먼저 타고, 데미안과 로위나의 손을 잡아 태웠다. 그 모습을 어쩐지 초조해진 마음으로 보던 화가가 불쑥 물었다.

“저도 타면 안 될까요?”

“안 돼요. 약속한 건 여기까지였잖아요.”

그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 로위나가 배를 출발시켰다. 하인 두 명이 배를 밀어 주고 물살을 따라 배가 서서히 멀어졌다.

“로위나 님!”

더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화가가 배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쪽을 보고 한 번만 웃어 주세요!”

요청과 함께 로위나가 천천히 백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달빛 아래서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화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찌릿하며 흘렀다. 동시에 막혀 있던 영감이 봇물 터지듯 범람하며 뜨겁게 온몸의 혈관을 달궜다.

흥분한 화가가 옆에 선 하인을 재촉했다.

“캔버스! 당장 마차에서 내 캔버스를 가져다주게!”

이곳으로 올 때까지 잔잔했던 바람이 점점 세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예리한 직감으로 심상치 않은 공기를 눈치챘을 테지만, 둑이 터지듯 넘치는 영감으로 화가는 사람들을 부르는 대신 붓을 쥐었다.

* * *

토미는 커다란 침실문 앞에서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손에 쥔 쪽지는 이미 땀에 젖은 지 오래였다.

―이걸 저하께 갖다 드리기만 하면 돼. 아홉 시 반을 가리키는 종이 울리면.

―밤에요……?

되묻는 토미에게 로위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갖다 드리기만 하면 아실 거야.

망설이던 토미가 천천히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주무시나 싶어 발길을 돌릴 때였다. 스르르 소리 없이 문이 열리더니 퀭한 눈의 남자가 소년을 내려다봤다.

“뭐지?”

분명 불은 꺼져 있었는데 막 자고 일어난 얼굴이 아닌, 오랫동안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야윈 뺨과 날카로운 눈매가 동굴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맹수처럼 어둑한 가운데 섬뜩하게 그를 내려다봤다. 마치 포식자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아버지를 비롯해 섬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며 경배하는 존재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숨 막히는 위압감에 토미가 옴짝달싹 못 하고 굳어 있는 사이, 미간을 좁힌 킬리언이 작은 손으로 꼭 쥔 쪽지를 발견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토미가 쭈뼛쭈뼛 서서 말을 더듬었다.

“이, 이거, 로위나 님께서 가져다 드, 드리라고…….”

허리가 꺾일 듯이 숙인 채 두 손을 모아 쪽지를 들어 올렸다. 채가듯 쪽지를 받아 든 킬리언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쪽지를 펼쳐 들었다. 내용은 짧고, 명료했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첫마디부터 그를 내리밟았다.

쪽지가 사정없이 구겨지는 순간, 울부짖으며 멜리사가 뛰어왔다.

“저하! 로위나 님이! 도련님이!”

* * *

“바다가 배를 집어삼킨 건 순식간이었어요.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는데, 아아……! 왜 그리도 빨리 탄 건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그랬으면…… 아니, 내가 말렸더라면……!”

레이첼 백작 부인이 오열하며 백사장 위로 주저앉았다. 새빨개진 얼굴로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여주인 옆에 시녀 두 명이 달라붙었다.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고개를 저은 백작 부인이 흉흉한 얼굴로 바다를 노려보는 킬리언의 바짓자락을 잡았다.

“로위나는 살아 있을 거예요. 그렇죠? 사람을 풀면…….”

“백작 부인.”

약혼을 고작 하루 앞두고 바다에 삼켜진 신부. 백사장을 가득 메운 하객들과 섬사람들은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풀고 싶어도 풀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 화창했냐는 듯 바람이 스산해지고 날씨가 궂어진 건 로위나가 배를 타고 멀리 갔을 무렵이었다.

파도가 금방이라도 섬을 집어삼킬 것처럼 거세게 휘몰아쳤다. 내리기 시작한 비는 천둥까지 동반하여 비극을 고조시켰다. 침음을 삼킨 제녹이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일단 다들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휘말리면 목숨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강풍 속이었다. 백작 부인을 시작으로 섭정관이 하인들을 시켜 하나둘 별장으로 안내하는 가운데, 킬리언이 뒤를 돌았다. 그가 향하는 곳을 본 제녹이 몸을 던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비켜.”

간담이 서늘해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발 진정하세요! 지금 나가시면 저하마저 큰일 납니다!”

“비키란 말, 안 들리나?”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드물게 두 번 경고했다. 세 번은 없었다. 그걸 앎에도 제녹이 꿈쩍도 하지 않자 쯧, 혀를 찬 그가 총을 꺼내 들었다. 총구가 이마에 겨눠진 순간에도 제녹은 비키지 않았다.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쏘고 가세요.”

“…….”

“날씨가 조금 잦아들면 바로 하인들을 풀겠습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바다에 뛰어드는 건 오히려 자살이나 다름없습니다!”

비바람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목소리가 물안개처럼 흐릿하게 골을 울렸다. 명령 불복종.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킬리언이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였다.

“배가 보입니다!”

혹시 몰라 백사장의 능선을 따라 수색하던 하인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반색한 제녹이 뒤를 돌기 무섭게 킬리언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났다.

항구의 조직들을 통합하며 목숨이 위험했던 숱한 순간에도 뛰지 않았던 남자였다. 미친 듯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던 제녹 또한 뒤늦게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 * *

당일 발견된 배는 텅 비어 있었다. 로위나와 데미안은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약혼은 비극적인 사고로 취소됐고, 하객들은 침통한 얼굴로 돌아갔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계절 또한 두 번이 바뀌었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될 동안 언제 비바람이 몰아치고 집어삼킬 듯 파도가 일었냐는 듯 섬은 평화로웠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날씨와 달리 섬 전체는 장례식 분위기였다.

그 사건 이후 남은 건 스산한 섬의 분위기와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같이 위태로운 별장의 공기뿐이었다. 킬리언은 매일 새벽 물안개를 헤치고 배에 올라타 해가 질 때까지 수색을 이어 갔다. 피로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망망대해를 헤매는 그의 모습은 광기 그 자체였다.

날로 여위어 가는 모습을 보다 못한 제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본토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하.”

대답 대신 형형한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희번덕거리는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하자 제녹은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제 상처를 핥고 있는 맹수를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살갗을 타고 오싹오싹한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제녹이 젖 먹던 용기를 끌어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벌써 반년입니다. 오래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제가 본토를 오가며 일을 처리했으나, 점점 저하께서 직접 보셔야 할 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불어 외국에서도 반역의 움직임이…….”

말을 이어 나가던 제녹이 짙은 술 냄새에 코를 막았다. 별별 냄새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된 그조차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지독한 술 냄새가 집무실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러나 밤새 홀로 독한 스카치를 연거푸 세 병을 마시고도 킬리언은 또렷한 얼굴이었다. 불호령을 기다렸던 제녹에게 뜻밖의 질문이 날아왔다.

“도망쳤을 가능성은?”

“저하?”

“아직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같이 탄 선생 놈도.”

침통한 얼굴로 제녹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을 다시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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