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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60화 (60/120)

60화

“이제 말 잘 들을게. 그러니까 엄마…… 울지 마. 응?”

“이건.”

슬픔이 옮겨 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덧 데미안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니야. 데미안. 우리 아들 때문에 우는 거 아니야.”

원래라면 버젓한 부모 밑에서 한창 사랑받고 컸을 아들이었다.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눈치만 보고 이른 나이에 성숙해진 데미안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럼 왜 울어?”

“너무 기뻐서.”

“기뻐?”

“응. 이제 우리 아들이랑 외삼촌이랑 같이 살 수 있으니까.”

“……우리 셋이서만?”

“응. 셋이서만.”

되묻는 말이 확인이라 생각한 로위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머뭇거리던 데미안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근데 엄마…….”

“응?”

“……아니야.”

어느새 눈물을 닦고 환한 표정의 로위나를 보며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따 보자. 내 보물. 내 솜사탕. 사랑해.”

“응. 엄마. 이따 봐. 나도 사랑해.”

마지막으로 데미안의 양 뺨에 번갈아 뽀뽀한 로위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이의 방문을 열고 나가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다 못해 심장이 철렁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눈만 깜박이는 로위나를 향해 화가가 머쓱한 얼굴로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이곳에 계시다길래…….”

“언제 왔는데요?”

경계 어린 눈으로 로위나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 방금 막 왔습니다.”

“그렇군요…….”

이어진 대답에 그녀의 올라갔던 어깨가 내려가는 사이, 극적인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 화가가 대뜸 방 너머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여긴.”

“그림 때문에 날 찾으신 거죠?”

이례적으로 말허리를 끊은 로위나가 화가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다.

“아. 예. 맞습니다.”

“아직 원하는 표정을 찾지 못했나요?”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면목이 없어 눈을 내리깐 화가가 말끝을 흐렸다. 내일이 바로 약혼식이었다. 영광스러운 의뢰를 받은 만큼 그에 보답해야 하는데 도무지 초상화에 그려 넣을 만한 표정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피사체가 못생겼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간 그려 왔던 오페라의 어느 여가수보다, 외국의 유명한 어느 여배우보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붓을 놀리기 힘들었다. 이미 캔버스에 그린 구도도 미모도 모두 완벽한데, 용의 눈을 장식할 표정 하나만 그리면 어쩌면 길이 남을 명작이 될 수도 있는데. 틈틈이 허락받은 자리에 따라다녀도 좀처럼 이렇다 할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로위나 필로네. 지체 높은 공작의 정부에서 이제 공작의 약혼녀 자리에 앉을 여자는 시종일관 우아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낮은 이들에게 항상 친절했고 늘 옆에서 시중을 들며 말벗이 되는 두 고용인을 제외하면 말을 놓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사하게 웃고 있어도 무언가 부족했다. 백여 년 전 초상화 속 미인처럼 그저 아름답기만 할 뿐, 어떠한 생기도 감정도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오늘 밤 배를 타러 가는데, 같이 가요.”

“배를 말입니까?”

화창한 데다 바람도 선선한 초여름이었다. 더운 날도 아닌데 해가 긴 낮도 아니고 밤에 배를 탄다니 의외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화가를 향해 로위나가 옅게 웃었다.

“네. 같이 타진 못하겠지만, 괜찮으시다면요. 같이 가실래요?”

“그럼요.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될까요?”

거듭 고개를 끄덕인 화가가 되물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로위나가 이내 대답했다.

“아홉 시에 현관으로 오세요.”

* * *

저녁 아홉 시가 되자 해가 지평선 너머로 숨고, 대신 고개를 든 달이 은은하게 밤하늘을 밝혔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했다고 해도 위험한 일이었다. 제레미는 몇 번이고 두 모자에게 계획을 강조했다.

“내가 신호를 주면 바다에 뛰어들고 나서 둘 다 내가 말한 곳으로 바로 헤엄쳐 오는 거야.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외삼촌.”

“맞아. 걱정 마세요!”

데미안의 손을 꼭 잡은 로위나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애 엄마가 되었다 한들, 제레미의 눈엔 그녀는 아직도 작고 어린 조카였다. 못 미더운 눈으로 로위나와 데미안을 번갈아 보던 제레미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와 데미안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 되겠다. 역시 너무 무모해. 오늘 말고 내가 다른 수를 써서.”

“외삼촌.”

쓰게 웃은 로위나가 그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 제레미를 힘주어 불렀다.

“내일이면 약혼식이에요. 더는 데미안의 정체를 숨기기도 힘들고요. 곧 모든 가능성이 닫혀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에요.”

“로위나…….”

“아무리 명예롭고 고결한 자리라 한들 저는 이대로 그의 약혼녀가 되고, 공작 부인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이 아이, 데미안이 가질 수 있던 것들은?”

단호하게 탈출을 준비하던 제레미가 마지막으로 떠보듯 물었다.

“네 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작위와 재산과 명예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외삼촌…….”

“제 아들임을 알게 되면 아무리 개자식이라 할지라도 제 자식은 귀여울 거다.”

“아니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두 손으로 데미안의 귀를 슬쩍 막았다.

“그 사람은, 그런 남자가 아니에요.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생겼다고 해도 절대 믿지 않을걸요. 어찌어찌 믿게 한다고 해도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절대로.”

끝의 끝까지 실낱처럼 잡고 있던 희망을 내려놓자 결심은 더욱 견고해졌다. 흔들림 없는 진심을 확인한 제레미가 옅게 웃었다.

“그래.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외삼촌…….”

“공작에게서 무사히 탈출하면, 네게 소개해 줄 사람들이 있단다.”

“소개해 줄 사람들이요?”

“그래. 네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르겠지만…….”

제레미의 혼잣말에 의아한 로위나가 눈을 깜박이던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에 이어 문밖에서 멜리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로위나 님. 외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비장한 눈으로 제레미와 눈빛을 주고받은 로위나가 데미안에게 모자를 눌러쓰게 했다.

긴 계단을 내려오자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마차가 그들을 맞았다. 데미안을 먼저 마차에 태우고, 올라타기 전 로위나는 뒤를 돌아봤다.

불이 꺼져 있을 줄 알았던 침실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로위나는 창문 너머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마주했다.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새파란 눈동자가 어둠 속 짐승의 눈처럼 반짝였다.

“로위나 님?”

로위나는 그 눈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자신을 부르는 멜리사의 목소리와 투레질하는 말들의 울음소리, 투명하고 선선한 밤공기도 전부 사라졌다. 잠시 주변 모든 게 사라지고 둘만이 남았다.

그녀가 한때 그토록 사랑하고 원하던 눈이었다.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봐 주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이 자라면 똑 닮게 될 얼굴이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처럼 서로의 시선을 옭아매던 두 쌍의 눈이 끊긴 건 헐레벌떡 다가오는 인기척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갑니다!”

“화가 선생님?”

화들짝 놀란 멜리사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낮도 밤도 없이 따라다니시면 어떡해요.”

“이건 로위나 님이 허락해 주신 일이에요.”

동의를 구하듯 화가가 로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팽팽했던 줄다리기에서 먼저 손을 놓은 로위나가 들었던 고개를 바로 했다.

“이분 말이 맞아.”

“로위나 님…….”

멜리사가 섭섭한 얼굴로 로위나를 바라봤다. 조앤도, 자신도 바닷가로 같이 가는 걸 거부한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 안 지 고작 몇 달밖에 안 된 화가에게 동행하자 권유하다니 그럴 자격이 없는 걸 알면서도 서운함이 치밀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얄밉게 데미안의 옆에 앉은 화가를 흘겨본 멜리사가 부탁하듯 졸랐다. 어째서인지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거 같다는 기묘한 예감에 초조해졌다.

“같이 배엔 못 타도 배웅이라도 하게요. 네?”

“안 돼.”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슬쩍 위를 올려다봤다.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들을 굽어보던 남자는 없었다. 커튼은 쳐졌고 불은 꺼졌다.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로위나는 마차 문을 닫았다.

“5년 전 넌 날 배신했어. 그런데 이 밤에 날 따라온다고? 내가 널 어떻게 믿겠니.”

“로... 로위나 님…….”

“내 이름 부르지 마.”

“아…… 아아.”

머리 위에 벼락이 꽂힌 듯 비틀거린 멜리사가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본 로위나가 담담하게 뇌까렸다.

“역시 네가 맞았구나.”

“…….”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처음엔 작은 불씨였다. 5년 전 일이 베네딕트 서섹스의 모함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불쑥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과연 누가 서섹스 남작에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을지.

거트루드가 아니라면.

윌리엄이란 남자를 만나길 주저하는 그녀를 등 떠민 것도, 그녀의 부정을 증언한 것도 모두 멜리사였다. 왜 킬리언이 그것까지 말해 주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녀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멜리사가 어깨를 들썩이며 애원했다.

“정말 죄송해요…… 저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용서해 주세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헐떡이는 멜리사에게 로위나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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