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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59화 (59/120)

59화

“킬리언?”

차가운 돌벽을 짚으며 다가가자 그는 한 비석 앞에서 동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심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는 젊은 여자의 동상이었다. 로위나는 그 동상 아래 대리석에 음각된 글자를 읽었다.

“헤레이스 모니카 데본셔.”

“선선대의 누이였습니다. 내겐 고모할머니죠.”

어딘가 낯익은 이름에 기억을 되짚던 로위나가 불현듯 공작성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이분 초상화를 본 적이 있어요.”

베네딕트 서섹스 남작과 회랑을 걸었을 때 보았던 여자였다. 연인을 마음에 품은 채 외국의 대공에게 강제적으로 시집갔다던.

“꽤 예전 일이라고 들었는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로위나가 옆의 선대 공작의 묘와 레이디 헤레이스의 묘를 비교했다.

타계한 시점이 다른데 새겨진 글씨체며 동상이 쌍둥이처럼 비슷했다.

“같은 조각가에게 의뢰했으니까요.”

그녀의 의문을 읽었는지 담백하게 입을 연 킬리언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묘는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다고요?”

“타지에서 성혼을 한 몸으로 목을 맸으니까요. 가문으로선 수치이고 지워야 할 존재였죠.”

로위나는 조용히 그의 말에 경청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를 알고 곁에 있었으나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초상화도, 이 가묘도 선선대 공작이 세상을 떠난 뒤, 선대 공작이 가엾다며 이곳에 안치한 겁니다.”

마치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언급하는 게 아니라 먼 가문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어조였다.

“저하도.”

생각에 잠긴 옆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로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가엾다고 생각하세요? 아버님처럼?”

“전혀.”

‘아버님’이란 단어에 살짝 눈매를 좁힌 킬리언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선선대 공작이 옳았지. 사적인 감정으로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고 씻을 수 없는 오명까지 안겼으니까.”

“…….”

“그깟 감정 따위로 모든 걸 망쳐 버렸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죠.”

아니. 사실 헤레이스 데본셔는 그나마 용기라도 있었다. 원치 않은 남자와 사느니 스스로 결단하여 필요 없는 생명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에 비해 여배우 따위와 놀아나다 함께 마차 사고를 당한 그의 아비가 더 한심한 인간이었다. 성혼 전 함께 음독자살이라도 해서 정조를 지키거나, 모든 걸 버릴 기세로 전날 밤 함께 야반도주라도 해야 했다.

프레드릭 제넌 데본셔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자살할 용기도, 모든 걸 버릴 용기도 없는 겁쟁이였다. 아내가 낳은 아들의 이름에 정부의 이름을 넣을 정도로 비겁한.

그가 두 무덤을 차례로 보며 조소하는 사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킬리언 데본셔다운 말에 로위나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왜 이 앞에 서 있으세요?”

“얼마 전 당신이 그랬지.”

못 박힌 듯 동상을 바라보던 킬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 버리면 슬퍼해 줄 거냐고.”

“그건 농담…….”

반쯤 오기로 했던 말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 당황한 로위나가 변명하려는데, 그가 말허리를 끊었다.

“아마 난 머지않아 다른 아내를 들일 겁니다. 공작 부인 자리는 그리 오래 비워 둘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약혼을 앞둔 여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의 가슴이 찢어지길 바랐던 건 너무 큰 꿈이었을까. 어쩌면 이 남자는 자신이 사라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로위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분노도 슬픔도 내보이지 않는 로위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킬리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하죠. 이곳, 내가 묻힐 옆자리는 당신 자리라고.”

손끝에서부터 오싹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음산하지만 그 어떤 말보다 더 뇌리에 박히는 통보였다. 뒷걸음치는 로위나의 팔을 잡은 킬리언이 그녀의 턱을 들게 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반짝였다.

“내 옆에 어떤 여자가 서건 마지막엔 당신만이 남을 거고.”

“킬리언…….”

“백 년이건 이백 년이건 우린 이곳에 나란히 누워 있을 겁니다.”

저번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지독하게 오만한 통보였다. 가파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왼 가슴을 뚫고 나와 귀에 울리는 듯했다.

뭇 아가씨들이 들었더라면 애끓는 사랑 고백이라며 뺨을 붉힐 말이었지만, 로위나는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기는 대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태중 약혼녀는요?”

그의 진정한 사랑은 죽은 태중 약혼녀였다. 대체품으로 그녀와 전처. 두 여자를 갖고 놀았을 정도로.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뜬금없는 이야기에 킬리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그 전에 가로막혔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로위나가 나직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번에 제가 한 말 기억하시니 이 말도 한 번 더 여쭤볼게요.”

“…….”

“5년 전 일. 모든 걸 다 알고도, 정말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믿을 사람 한 명 없이 살아왔던 그의 삶에 대해 들었다. 5년 전 그 나름대로 그녀를 위했었다는 사실도. 그게 용서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잘못했다. 오해했다. 널 믿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람이면 당연히 해야 할 말이었다. 그 잔인하던 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섬을 홀연히 나왔는지.

그 말을 한다면 그를 용서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아무 미련도, 원망도 없이 후련하게 그의 앞에서 사라질 수 있으리라.

“정말 없나요?”

로위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피가 돌며 저릿저릿할 정도의 갈망이 치솟았다.

두 번의 물음에 서늘한 지하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흔들리는 램프의 불빛, 그 불빛에 붉게 비친 그의 얼굴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무표정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킬리언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보상을 하죠.”

“……네?”

“평생 부귀영화와 명예 속에서 살게 해 주겠습니다. 지난 3년간 빈곤은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답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빠르게 식었다. 로위나는 손끝부터 조금씩 차가워졌다. 얼음을 깎아 만든 날카롭고 차가운 비수가 심장에 그대로 박힌 느낌이었다.

“그 외에 필요한 게 있습니까?”

필요한 것?

눈매를 일그러뜨리던 그녀가 참은 숨을 토해 내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대체 뭘 기대했던가.

5년 전 일은,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에게는 마치 타고 있던 마차에 걸인이 치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부의 책임이지만 도의적으로 치료비를 내주는 것.

말이 통하고 안 통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온 환경과 주어진 배경만큼이나 눈앞의 남자는 그녀와 달랐다. 사고방식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양심과 도덕의 기준이 달랐다.

이해하려 드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은 순식간이었다. 로위나는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황량해진 자신의 마음을 마주했다.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

“로위나.”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는 로위나의 어깨를 커다란 손이 감싸 안았다.

손에 힘을 준 킬리언이 뭐라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탈진한 안색으로 로위나가 속삭였다.

“어지럽네요. 위로 올라가고 싶어요.”

조금 전 제안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었다.

* * *

로위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주 앉은 킬리언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차 안은 내일이면 약혼을 하는 남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 선 분위기였다. 바닷가에서 오붓하게 둘만의 식사를 가졌던 날과는 정반대로 팽팽한 공기 속에서 제녹만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진땀을 뺐다.

“오늘 저녁은 거를게요. 입맛도 없고 내일 약혼식이라 체할까 걱정되니까요.”

“좋을 대로 해요.”

냉담하게 대꾸한 킬리언이 그녀를 스쳐 지났다.

현관홀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앤과 멜리사가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다가왔지만, 로위나는 대답 대신 그녀들을 뒤로하고 홀로 계단을 올랐다.

“엄마!”

복잡한 얼굴로 방문을 열자마자 데미안이 로위나의 품에 안겼다.

“데미안. 삼촌에게 이야기 다 들었지? 준비는 잘했어?”

“응! 다 했어!”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해사하게 웃었다. 푹 파인 왼뺨의 보조개에 그와 닮은 보조개를 가진 남자의 얼굴이 겹쳤다. 로위나의 미소가 굳어지자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

“엄마. 나 어깨 아파.”

“……아. 미안.”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을 내려다본 로위나가 데미안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우리 아들. 그동안 삼촌에게 밤마다 수영 배우느라 고생 많았어. 오늘 헤엄 잘 치면 앞으로 무리하게 수영할 필요 없을 거야. 엄마 때문에 모르는 곳에 끌려와서 고생 많았지?”

덤덤했던 목소리는 갈수록 물기가 묻어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을 뻗은 데미안이 로위나의 뺨을 닦았다.

“난 좋았어, 엄마. 그러니까 울지 마.”

“울……어?”

무슨 말인지 되뇌던 로위나가 눈을 깜박이자 눈시울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다. 놀란 그녀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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