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뭐죠?”
“바다에서 나룻배를 타고 싶어요. 약혼 후엔 바빠질 테니, 약혼식 전에요. 내일이든 모레든.”
“그럼 바로 준비시켜 놓죠.”
“아니요.”
순순한 대답에 홱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덧붙였다.
“킬리언 당신이랑 말고요. 내 아들 데미안이랑요. 또 노를 저어줄 사람 한 명이랑.”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등에 힘줄이 섰다. 흘깃 그의 손을 곁눈질한 로위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약혼식 준비로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 거 같아서요. 안 될까요?”
“…….”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나직한 허락이 떨어졌다.
“좋을 대로 해요. 배는 미리 준비해 놓을 테니.”
* * *
약혼식 준비가 거의 막바지에 달하자 초대받은 손님들이 하나둘씩 넓은 별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고아인데다 일가친척이 없는 로위나를 위해 백작 부인은 그녀의 어머니 역할을 자처했다.
그녀의 살롱 구성원들도 약혼 당사자라 바쁜 로위나를 대신해 자잘한 역할을 기꺼이 맡았다.
바야흐로 약혼식 전날, 당일 입을 드레스와 구두를 확인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준비되셨답니다.”
옆으로 이어진 방문을 열고 나온 조앤이 기다리던 귀부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작 부인이 눈을 반짝였다.
“어서 보여 줘요. 궁금해서 못 참겠네.”
“그러니까요. 얼마나 예쁠지!”
기대에 찬 목소리들이 하나둘 더해지는 가운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옅은 살굿빛의 약혼 드레스를 입은 로위나가 멜리사의 손을 잡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로위나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찬탄이 쏟아졌다.
“세상에 천사가 따로 없네.”
“그러니까요. 열여덟 살 같아요.”
“저하께서 그렇게 푹 빠지신 이유를 알겠네.”
“약혼식 때 이 정도인데 결혼식 때는 뭇 신사분들 눈이 멀겠어요.”
“과찬이세요.”
민망할 정도의 칭찬 세례에 어색하게 웃은 로위나가 레이첼 백작 부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을 알아챈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의를 환기했다.
“자자. 칭찬은 이쯤하고. 다들 내일 밤 있을 피로연 준비를 맡았잖아요? 마지막으로 점검해 주세요.”
“백작 부인은요?”
“저는 마무리만 조금 돕고 따라갈게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우르르 살롱을 나갔다. 그제야 자리에 앉은 로위나의 옆으로 백작 부인이 다가와 앉았다.
“너무 예뻐요. 로위나.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고마워요. 백작 부인 덕분이에요.”
“어머. 무슨 그런 말씀을.”
가벼운 공치사를 나눈 로위나가 본론에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밤 뱃놀이를 하려고 해요.”
“어머. 내일이 약혼식인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약혼하고 나면 또 결혼식을 준비해야 하니 바빠질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죠. 지금보다 더 바빠질 거예요. 폐하와 알현도 해야 하고.”
순순한 대답에 로위나가 미소했다.
“같이 가실래요?”
“같이요? 좋죠.”
화색이 돈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갈 건데요?”
“오늘 아홉 시 반쯤에요. 달빛에 반짝이는 바다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해서요.”
“달밤에 뱃놀이라…… 좀 드물긴 하지만, 낭만적이네요. 그나저나…….”
“백작 부인?”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백작 부인이 뭔가 생각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진 로위나가 왜냐고 물으려는데, 그녀가 말없이 조앤과 멜리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조앤. 멜리사. 잠시 나가 줄래?”
“네. 알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백작 부인의 의사를 읽어 낸 로위나가 두 사람을 물리고 나서야 백작 부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몇 번이고 말해야지 했는데.”
“무슨 말이요?”
“사고로 죽은 태중 약혼녀요.”
“…….”
한동안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존재가 언급되자 로위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던 백작 부인이 이내 고백했다.
“어영부영 덮였지만 8년 전 그 사고, 폐하께서 계획하셨다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아서.”
“살해당했다…… 이 말인가요?”
누군가 정수리 위로 찬물을 들이부은 느낌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로위나는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인 백작 부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로위나도 알고 있겠지만, 저하의 결혼은 단순히 가문 간의 결혼이 아닌 국익과 관련된 일이에요.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여러 사람이 얽혀 있죠. 그 태중 약혼녀도 모든 걸 다 고려하여 까다롭게 고르고 고른 경우였어요.”
“그런데 왜 사고를 당한 거죠?”
“가문에서 운영하던 선박이 가라앉아 사실상 가세가 기울었대요. 그래서 성혼의 의의가 사라져 그랬다는 말이 제일 유력해요.”
“…….”
“이후 성혼도 폐하께서 주선하셨던 거고요. 말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로위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문득 얼마 전 집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킬리언이 남들은 당연하게 받아 온 애정도 느끼지 못하고 자라 왔다고. 잠시 마음이 술렁이긴 했으나 금세 잊었다. 과거야 어쨌건 지금은 모든 걸 다 가진 남자니까. 그녀가 감히 동정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거니와 그런 동정을 반가워할 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태중 약혼녀를 고모인 여왕에게 잃었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할 말을 잃고 잠시 굳어 있던 로위나가 번쩍 떠오른 생각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전 멀쩡하죠?”
“로위나.”
“폐하께서 왜 절 가만히 두는 거죠? 전 눈에 차지 않다 못해 수치스러운 존재일 텐데.”
타당한 의문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언제 들어왔는지 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저하께서 손을 쓰셨습니다.”
제녹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두 여자가 뒤를 홱 돌아봤다. 제녹은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잠시 숙였다.
“5년 전 로위나 님은 항상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정부로 인정은 받았으나 호시탐탐 로위나 님을 노리는 눈이 있었죠. 그 끝엔 폐하가 계셨고요.”
“난…….”
뜻밖의 이야기에 로위나가 눈을 깜박였다. 5년 전, 그의 정부였던 시절 단 한 번도 누군가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 없었다.
“몰랐어요.”
“그러시겠죠. 그만큼 철저하게 지켰으니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제녹이 담담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지난 5년간 저하는 폐하께 더는 휘둘리지 않으려 새로운 세력을 쌓으셨습니다. 하루도 제대로 자는 날이 없을 정도로 외국과 국내를 넘나들며 고군분투하셨죠. 그 결과 이 약혼도 암묵적인 허락을 받아 내셨고요.”
은혜를 베풀었다는 듯듯한 말투에 발끈한 백작 부인이 로위나 대신 나섰다.
“설마 저하께서 로위나를 지키려고 일부러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이 말은 아니겠죠?”
날카로운 힐난이었다. 주춤한 제녹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순순한 수긍에 백작 부인이 쏘아붙였다.
“저하께서 세력을 키우신 건 저하 본인을 위해서였어요. 로위나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이혼한 사실이 없어지진 않죠.”
로위나가 놀란 눈으로 레이첼 백작 부인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호의적인 편이었으나 종종 저울에 재는 듯 그녀와 베로니카를 재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위해 그토록 두둔하던 공작까지 비난하고 있었다. 가슴이 찡해졌다.
“백작 부인과 논쟁을 하려던 건 아닙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두 분께 죄송합니다.”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인 제녹이 금세 꼬리를 내렸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을 지켜보던 로위나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죠?”
* * *
제녹이 그녀를 데려온 곳은 크고 황량한 건물이었다. 멀찍이 봤을 땐 특이하게 생긴 석조 건물이라 생각했는데 들어와 보니 안은 무척 넓고 예스러웠다.
첫인상은 무슨 의식을 치르는 곳 같았다. 모서리마다 무장한 기사의 동상이 수문장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가족 영묘라는 걸 안 건 지하로 이어지는 커다란 입구를 보고서였다. 입구 앞에 비통하게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천사상이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긴…….”
“데본셔 공작가의 가족 영묘입니다.”
“이곳에 저하가 계시다고요?”
전에 왜 이 섬에서 결혼식을 올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로위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제녹이 입구와 마주 보는 제단 위에서 램프를 가져왔다.
“아래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같이 안 들어가시나요?”
“허락받은 공작가의 일원 말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긴 시간 킬리언에게 충성을 바쳐 온 제녹마저 발을 들이는 것이 금지된 곳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들어가도 되는지 망설이던 로위나의 손에 그가 램프를 쥐여 주었다.
“그대로 쭉 내려가시면 됩니다. 계단도 높지 않으니 위험하실 일은 없습니다.”
“……고마워요.”
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차근차근 지하로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